[소설] 현실적인 Anima(3)

윤 정 소설가 성동문인협회 회원

2024-07-24     성광일보
윤 정 소설가

소외감 느끼지 않게 역사적 사명을 띠고 유난히 반기던 자겁님, 아는 것도 많고 말할 것도 많은 님 덕에 한시도 웃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오.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여러 님들 덕분에 신입 아니마의 첫 모임 즐거웠다오.
오랜 운전으로 피곤하여 밤 10시쯤 자리에 누우려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아니마의 자겁' 그가 핸드폰을 빌려갔을 때 저장해 놓은 이름이다.
“웬일이세요? 이 밤중에.”
“잘 갔어요? 먼길 다녀가느라 피곤했지요?”
“욕쟁이님이 화성까지 동승해줘서 지루하지 않았어요.”
“그 형님 참, 자기 차는 놔두고. 내가 같이 갔어야 했는데....”
“하하하”
“그 형님 조심해요.”
“재미있던데요. 욕을 입에 달고 다녀서 그렇지.”
“정말 조심하라니까요!”
“하하하, 알았어요.”
“내가 신입에게 사명감으로 친절하게 하는 거랑 아니마님에게 한 거랑 달라요.”
“에이, 다들 그러던데요. 자겁이 또 시작이라고.”
“이름이 자겁이라고 누구에게나 작업 거는 거 아닙니다.”
“그럼 지금 내게 작업이라는 거를?”
“그렇습니다. 제대로 작업 좀 걸어 보려고요.”
“난 그럴 마음이 없어요. 개인적으로 만나는 거 싫어해요.”
“나한테 안 넘어오는 여자 없어요.”
“그 자신감 어디서 오는 거죠? 세파에 시달린 얼굴? 빵빵한 뒤태?”
“일단 한 번 만나보시라니까요. 아마 헤어날 수 없을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난 안 넘어가요.”
“그렇다면 내게 기회를 주세요. 앞으로 한 달 동안 아니마님에게 전화만 할게요. 그래도 싫다면 말없이 물러날게요.”

자겁은 말대로 밤 10시만 되면 어김없이 전화를 걸었다. 처음에는 이 남자가 왜 이러나 하다가 10시 전에 자던 습관도 그와 통화를 한 후로 미루어졌다. 자겁은 남들 앞에서는 누나, 누나 하지만 은근히 '이 여자는 내 거야, 건드리지 마!' 하는 분위기로 몰아가는 것 같았다. 가끔 “넌 내 여자니까~”하고 노래도 불렀다. 그런 분위기에 사람들도 하나둘씩 동조했다. 정기여행 때도 수군거렸다.
“자겁이가 이번에는 좀 다른 것 같아.”
“맞아, 아니마님 대하는 것이 전에 신입 대하던 때와는 달라도 너무 달라.”
아니마 처음 맞는 정기여행
며칠 전부터 마음 준비 단단히 하고, 나만 잘살면 무슨 재민겨 가족들 일용할 양식 이것저것 챙겨 놓고 여기는 디새골, 웰빙, 황토방, 통나무, 유기농, 무방부제, 친환경 반갑게 맞아 주는 다시 보는 자겁이 소담스런 눈 사이로 그윽한 눈빛이 심상치 않은 앞날을 예고해.
아! 自法의 亂이여!

달콤한 포도주, 쩝 입맛 다실 때 속속 도착하는 마음, 바람따라 님들, 처음 보니 새롭고, 다시 보나 반갑구나.
다음 날은 정조와 사도세자 묻혔다는 융건릉이라.
날은 청명한데 낙엽은 바람에 흩날리고, 슬프디슬픈 父子의 옛일에 마음도 흔들리고 정사, 야사 구별 없이 쏟아지는 자겁의 입담, 거침이 없고 막힘이 없는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자겁이 잠시 사학자가 된 착각에 빠졌다오.

꽉 끼는 청바지 뒤태에 자부심을 느끼며 종횡무진,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우리 눈도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낙엽이 발밑에서 뭐라고 말을 건네면 다음에 이 숲으로 다시 오마 약속하는데 얼큰한 순두부 나눠 먹고 다음 만남을 약속하며 혼자서, 둘이서, 셋이서 오던 길 가는 우리 님들, 너나 할 것 없이 자연스레 어울리는 모습에서 돌아오는 나를 비춰 보네.

그날 오매불망 아니마를 기다리던 자겁이는 우중에 먼길 달려온 아니마를 위해 우산을 들고 주차장으로 마중을 나왔다. 식사할 때나 여흥을 즐길 때나 아니마 곁을 떠나지 않고 주절주절 자신의 얘기와 동호회 이야기를 해주었다. 자겁이 뿐 아니라 모두가 아니마를 특별 대우했기에 기분이 좋았다. 자겁이는 아니마의 여행 후기를 읽고 10시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아니마가 저녁을 먹고 쉬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웬일이에요. 아직 10시 안 됐는데.”
“아니마, 나 너무너무 감동이에요!”
“왜요?”
“후기를 어쩜 그렇게 잘 썼어요?”
“에이, 그냥 가볍게 쓴 거예요. 어땠어요?”
“이건 노벨상감이에요. 세종대왕이 하늘에서 눈물을 흘리셨을 거예요. '관동별곡'보다 '열하일기'보다 더 뛰어난 작품이에요!”

바로 앞에 있었다면 열변을 토하는 그의 침이 여기까지 튀었을 것이다. 아니마는 솔직하게 추호의 가감도 없이 본 대로 느낀 대로 썼을 뿐인데 본의 아니게 자겁이를 주인공으로 만들었으니 얼마나 고마웠을까.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고,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아니마는 그의 재미있는 화술에 넘어가고 말았다. '여자가 말하는 yes와 no 사이에 닫혀 있는 문은 없다.'고 스페인의 작가 세르반테스가 말했다. 아니마의 마음은 '사양합니다.'로 시작했는데 몰아치는 바람에 '사랑합니다.'를 준비하고 있었다.

여자가 자기를 좋아하는 남자에게 마음을 열게 만드는 것은 용모도 아니고 돈도 아니다. 자겁이의 돌출된 입에서 나오는 감동이었다는 몇 마디와 내게는 누구보다 당신이 아름답다는 말 몇 마디를 반복해서 듣다 보니 아니마는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귀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그가 내뱉는 천사의 말이 과장이 심해서 웃음이 나기도 하고 그 진의를 의심하게도 했지만 유머러스하게 당기는 맛에 아니마는 자겁이에게 가까이 가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