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헌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 광진갑더불어민주당 서울 광진갑 국회의원 이정헌입니다.광진투데이 창간 14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광진의 소식을 알리기 위해 불철주야 애쓰시는 기자 여러분과 임직원 모두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지방자치의 발전과 지역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우리 마을'의 이야기를 전하는 지역 언론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습니다.광진투데이는 광진구의 다양한 현안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그 노고에 다시 한 번 깊은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합니다.민생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은 분들이 하십니다.주민 분들을 만날 때마다, 두 손 꼭 잡으시며 "코로나 때보다 더 힘들다", "제발 민생을 살려달라" 말씀을 하십니다. 마음이 무겁습니다.어려운 시대일수록, 더 많은 대화와 경청이 필요합니다.광진투데이라는 좋은 소통 창구가 있기에 주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마음을 함께할 수 있었습니다.앞으로도 광진투데이와 긴밀히 협력하며 지역 경제를 살리기 위한 정책을 찾아나가겠습니다.소상공인과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주거, 교육과 보육, 노후 환경의 개선에 힘쓰겠습니다.저는 여러분의 일꾼으로 선택받은 국회의원으로서 구민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고 광진의 미래를 멀리 내다보는 '근청원견'의 자세로 살기 좋은 광진구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다시 한 번, 광진투데이 창간 14주년을 축하드립니다.광진을 대표하는 지역 정론지로서 지역 주민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지역의 소식을 지금처럼 신속, 정확하게 알려주시길 바랍니다.앞으로도 더욱 사랑받는 광진투데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감사합니다.
뉴스 | 성광일보 | 2024-10-11 16:13
김종박 수필가그렇다면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음대로 뜻을 펴지 못하기 때문"에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 민족에게 문자는 중국의 문자인 한자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자는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문자로 자리 잡고는 있었지만 읽고 쓰기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더구나 서적의 보급도 미미하고 따로 공부할 기회가 없었던 일반 백성들에게 한자를 통한 의사소통은 거의 기대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이두吏讀나 향찰鄕札과 같은 표기법이 있기는 했으나, 이것 역시 한자의 음音과 훈訓을 빌려 쓰는 것이기 때문에 한자를 모르면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한자를 모르던 백성들에게 국가의 명령을 전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왕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아무리 공문으로 작성해 하달해도 한자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일일이 찾아다니며 말로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 또한 이 무렵은 면리面里 제도, 오가작통 五家作統까지 갖추어질 정도로 중앙집권 체제가 확립되어 가던 때라 새로운 명령 하달 방법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약 일반 백성들도 쉽게 읽고 쓸 수 있는 문자가 있다면 왕의 뜻이 좀 더 쉽게 아래까지 전달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세종은 생각했다. 바로 이것이 '바른 정치는 바른 소리正音에서 나온다.'라는 이른바, '올바른 소리를 모르고서는 성인지도聖人之道를 제대로 이룰 수 없다,'라는 성리학의 언어관言語觀을 따른 세종이 훈민정음을 통해 이루고자 한 정치적 목적이기도 한 것이다. 실제로 훈민정음 창제 후에는 왕이 내리는 한문 교서와 더불어 대왕대비나 왕비가 언문 교서를 통해 백성들이 유교의 교리를 쉽게 배울 수 있기를 바랐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 언문청을 통해 조선 건국 시조들을 찬양한 [용비어천가], 등 여러 권의 훈민정음 관련 서적을 편찬하고, 유교 관련 기본서를 언해諺解 해 편찬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였다. 하지만 훈민정음 창제에 모두가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 집현전 학사들은 세종의 뜻에 따라 직, 간접적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지만, 집현전 부제학이었던 최만리崔萬理처럼 훈민정음 창제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경우도 많았었다.어쨌든 세종은 여러 집현전 학사와 신료들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훈민정음을 반포하고 여러 가지 관련 사업을 펼쳤다. 결국 강한 의지로 무장된 세종의 고집 덕분에 다행히 우리 민족은 훈민정음, 아니 한글이라는 고유의 문자를 가지게 된 것이다. 훈민정음 반포 이후 과연 조선조에서 세종의 뜻대로 전 백성들에게 훈민정음이 계속하여 전파, 보급, 이용되었을까?사대부에게 맞지 않고 부녀자들이나 쓸 수 있는 암클이라고 까지 폄훼되기도 했지만, 임진왜란 시에는 한자만 알고 있던 왜군을 속이는 비밀지령문으로 큰 효과를 보기도 했고, 더욱이 훈민정음이 있었기에 배달겨레의 정서에 맞는 정철의 (관동별곡) (사미인곡)과 윤도선의 (오우가) 등 국문학사에 길이 빛나는 금자탑이 탄생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19세기말 갑오개혁기 조정에선 1894년 11월 칙령 제1호 공문식公文式을 공포하여 종전의 한문 대신에 훈민정음을 국문화國文化하여 공문으로 바뀌었으니. 실로 450년 만에 훈민정음이 비로소 공식적인 국자國字의 자격을 득하는 쾌거가 되었다. 헌데, 배달겨레의 글 훈민정음이 국자의 지위를 얻었는가 했었는데 황망하게도 졸지에, 세종대왕 영령이 납셔 대탄식, 분노하시는 1910년 경천동지할 경술국치가 발생하고 말았다. 그 후 8대 35년에 걸친 일본의 총독통치로 인하여 대한제국의 언어가 하나의 민족어로 전락하고, 외국어였던 일본어가 대신 국어로 등장하고만 역사적 대 비극으로 이어지고 말았음은 불문가지이자. 배달겨레와 함께한 훈민정음도 그렇게 모진 수모를 당하게 되다니 오로지 오호 통재였을 뿐이로다! 허나 우리 배달겨레가 어떤 민족인가? 아시아 대륙의 끝자락에 옹골차게 터 잡아 굳건히 쌓아진 겨레 얼이 반만년, 아니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의하면 6천년, 9천년 동안 올올이 이어진 강인한 민족이 아니던가 말이다.우리말과 우리글을 쓰는 것을 총칼로 억누르는 일본의 '어문말살정책'으로 인한 일제강점기의 커다란 암흑기를 우리 배달겨레는 분노와 수모를 삭이며 참아내야만 했었다. 당시 우리 겨레에게는 우리말을 쓰는 것이 민족정신을 가다듬는 한 방편이 되었고, 때마침 주시경 등 국어연구가들이 훈민정음을 새롭게 '하나밖에 없는 글'이어서 '한글'이라고 창명한 바, 바로 이러한 우리글을 쓰는 것이야말로 일종의 또 하나의 독립 운동이 될 수 있다는 공감대가 암암리에 조성돼 이를 실천하는 것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었던 시절이었다. 이에 따라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480년이 되던 1926년의 정인지의 글에서 훈민정음 반포가 9월 상순의 일로 되어 있는 점을 감안, 조선어학회에서는 반포한 날을 9월 10일로 잡고, 이 날을 양력으로 환산해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뉴스 | 성광일보 | 2024-10-11 15:19
윤 정 소설가자겁이는 대학교 다닐 때, 다른 남자보다 용모가 뒤떨어져서 미팅 때마다 괄시를 당한 나머지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와 술을 마시며 한탄 했다고 한다. 그날 이후 의기투합하여 '여자의 마음을 아는 법',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의 행동', '여자는 유머 있는 남자를 좋아한다,' 이런 종류의 책을 탐독한 결과 어떻게 콧대 높은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지 터득했다고 한다. 열독을 하고 거리로 나가 실습을 한 적이 있다는데 용모를 보고 식겁해서 뒤로 물러나는 여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방법을 바꾸어 동아리에 들어가서 조금 안면을 튼 후에 적용을 하니 성공률이 점점 올라갔다는 것이다. 이후에 자신이 공략해서 반응을 보인 여자들은 아무나 접근하지 못하는 품격 있고 고매한 성품의 여자들이 대부분이라나, 아니마는 그간의 사례를 모아 '못생긴 남자가 연애에 성공하는 법'이라고 제목을 붙여 책을 한 권 출간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였다.그는 아마도 다음 두 가지 명언 중에서 최소한 하나는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여자들은 보기에 따라서 정숙할지라도, 대체로 저 아몬의 샘과 같다. 낮에는 차고 밤에는 뜨겁게 끓는다,'고 프랑스의 교육학자인 아드리안 듀비가 점잖게 말했다. '아무리 정숙한 여자라도 무엇인가 결코 정숙하지 않은 것을 자기 속에 가지고 있다.'고 프랑스의 사상가 디드로우가 심오하게 표현했다.주말여행동호회에 가입한 지도, 그와 아니마가 연인이 된 지도 8개월이 지났다. 오늘은 서해안 신두리에 가는 날이다. 아니마는 차를 청주 터미널 공영주차장에 세워 두고 그의 차에 동승하여 신두리로 출발했다. 같은 지역에 사는 몇몇 회원과 동승을 해야 하지만 자겁이가 개별 출발 한다고 선수를 쳤기 때문에 둘만 오붓이 갈 수 있었다. 남들이 눈치 못 채게 조심하고 있지만 알아도 대수랴. 나이 차이가 어마어마한 띠동갑 아닌가. 이성으로 서로 호감을 가진다 해도 믿을 사람이 없을 것 같다. 남들이 보면 '선생님과 제자', '이모와 조카' 사이라고 할까. '미녀와 야수'라고 해도 어울린다.아니마는 간단한 간식과 음료수를 준비했고 그는 지루하지 않은 입담과 신나는 음악을 마련했다. 그의 쏟아지는 입담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노래에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그의 주요 관심 분야는 우리 역사다. 정사, 야사, 두루 꿰고 있는데 아니마가 역사 시간에 배운 정사보다 야사 쪽으로 아는 것이 더 많았다. 생업만 아니라면 역사 해설가로 나서도 좋을 것 같다. 설민석을 꿈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조금 시간이 남아 한 군데 더 돌고 가니 둘을 살피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도 있다.“또 같이 왔네. 둘이 사귀는 거 아니야?”“에이, 누나가 여기 잘 모르잖아. 그래서 같이 왔지.”자겁이 넉살 좋게 둘러대었다. 오늘도 몇몇 새로운 얼굴들이 눈에 뜨였다. 주로 여자들이었는데 그 중 한 여자는 옅은 색 청치마를 짧게 입고 가슴이 깊게 파인 분홍 체크 남방을 입었다. 단추를 한 개 더 잠그면 안전하건만 움직일 때마다 위태위태하게 속살이 보일락 말락 숨바꼭질하고 있다. 30대 중반의 나이인데 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작은 리본까지 장식해서 언뜻 보면 20대 후반으로도 보인다. 언행 역시 발랄하여 뭇 남성들의 시선을 끄는 중이다. 역시나 그녀를 보는 자겁이의 눈이 빛났다. 늦게까지 여흥을 즐기고 남녀별로 정해진 숙소로 가려고 하는데 자겁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마가 매의 눈으로 여자 쪽을 살피니 양갈래도 보이지 않는다. 우연의 일치겠지 다소 불길한 예감으로 잠자리에 들었다가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 보니 몇몇은 코를 골며 자고 있고 몇몇은 나가고 없다. 밖으로 나가니 채 밝지 않은 해안에 해무가 자욱하여 운치를 자아낸다. 멀리서 움직이는 몇 사람이 있어 한 쌍은 다시 해무 속으로 사라지고 한 쌍은 이리로 오고 있다. 자겁이와 양갈래다.“어, 누나 일어났네.” 그래 방해가 됐나?“언니, 새벽 공기가 너무 좋죠?” 초면에 언니 소리를 잘도 한다.“그렇네. 둘이 나왔어?” 속 보인다.“여럿이 나왔는데 다들 저쪽으로 갔어.” 그럴테지.“언니는 하도 곤하게 자기에 깨우지 않았어요.” 그래야겠지.“언니, 우리 사진 찍자! 이리 오세요.”귀염성 있는 것이 붙임성도 좋다. 둘이 무척 잘 어울린다. 자겁이는 모란꽃 같은 아니마와 있을 때보다 작고 귀여운 꽃잔디를 닮은 양갈래와 더 어울린다.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니마는 청주에 사는 다른 회원 차에 타고, 자겁이는 미니스커트를 입은 양갈래와 함께 떠났다. 자겁이와 아니마는 여행 일정 후에는 늘 둘만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불문율이 있었건만 오늘은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헤어짐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니마는 눈치를 보는 자겁이가 안쓰러워 신입 여자를 보호해야 하는 위대한 사명감을 띤 자겁이를 모른 척해 주었다. 그래도 궁금한 아니마는 서울로 오는 길에 휴게소에 들려 전화를 했다.“어, 누나!" 누나라는 말은 둘이 통화할 때는 쓰지 않는 호칭이다. “도착하지 않았어?”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다.“어, 다 와가. 누나는?”“거의 왔어. 넌 벌써 도착한 줄 알았지.”“어디 들렀다 가느라고.”“어디..... 알았어. 조심해서 가" 양갈래와 어디에 들렀다 가는 것일까.“어, 누나도. 도착하면 전화해.”그 여자가 옆에 있나 보다. 이렇게 속전속결로 통화가 끝나는 것은 드문 일이다. <다음호에 계속>
뉴스 | 성광일보 | 2024-10-11 1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