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 영화사(永華寺) 고(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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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영화사(永華寺) 고(考)
  • 광진투데이
  • 승인 2018.09.06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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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수/건국대학교 사학과교수
한정수 교수/건국대학교 사학과

아차산은 용마산과 더불어 한양 도성을 감싸고 호위하는 외사산(外四山)의 동쪽 방위에 위치한다. 광진구는 아차산을 진산(鎭山)으로 여기고 있으며 아차산의 각종 유적과 전설, 산림 자연 등을 보존하기 위해 힘을 기울이고 있다. 더구나 아차산은 서울에서 가장 먼저 새해 첫 해돋이를 볼 수 있는 해돋이 명소이다. 때문에 광진구에서는 새해 첫 해돋이 행사를 주민과 함께 성대히 열렬히 그리고 차분히 열고 있다. 그만큼 아차산은 광진구에 있어서는 영험한 산이다. 이미 본래 이름이었던 '아단산(阿旦山)'이라는 이름에서 그 기운이 느껴진다.

그러한 영산이니만큼 아차산에는 영험한 기도처가 있다. 세계 어느 나라이든 마찬가지의 정서가 있지만 산수가 많은 우리나라에는 유독 민간 습속에 복을 비는 구복신앙이 폭넓게 퍼져 있다. 옛 기록을 보면 고려 태조 왕건이 이 같은 토성(土性)을 언급하며 그 당위성에 대해 언급한 바가 있었다. 즉, 나라를 세운 초창기에는 유교정치로서 문덕(文德)을 쌓아야 한다는 신하의 말에 대해 우리 토성(土性)이 음양과 부도 즉 불교 및 신, 그리고 산수의 영험한 감응을 믿고 있으므로 현재로서는 이를 의지하고자 한다고 답하였던 것이다. 이어 태조는 고려 건국 후 개경 내외에 10개의 대 사찰을 지었고, 이어서는 경주의 황룡사 9층탑처럼 개경에는 7층탑, 서경 즉 평양에는 9층탑을 지어 통합을 발원하게 하였다.

논산에는 본래 황산이라는 산이름을 천호산으로 바꾸고 군대가 주둔했던 곳에는 개태사라는 절을 지어 부처의 가호와 민심안정을 기도하였다.
신라 때부터도 그러했지만 현재의 수많은 사찰이 산중에 위치하고 있고, 도심 내에 있는 고찰은 거의 없다. 이른바 절들이 산으로 갔다는 표현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절들은 승려들의 수도처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이 신자들의 기도처이기도 하다.

지리산에는 화엄사와 쌍계사, 속리산에는 법주사, 영주 봉황산에는 부석사, 오대산에는 월정사와 상원사, 설악산에는 백담사와 신흥사, 월악산에는 덕주사, 치악산의 구룡사, 남해 보리암, 강화 낙가산 보문사, 양양 오봉산 낙산사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만큼 절은 산수가 영험한 기운이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그리 높지 않지만 아차산은 용마산과 더불어 광진구와 서울을 감싸고 있으면서 서울의 해가 뜨는 곳이다. 아차산 해돋이광장에서 보면 햇살이 멀리로는 한강과 중랑천, 그리고 남산과 관악산, 경복궁이 있는 인왕산 및 백악 등으로 펼쳐져 감을 조망할 수 있다. 저녁노을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그만큼 아차산은 해발 287m의 야트막한 산이면서도 아침햇살과 저녁노을, 보름달을 모두 만끽할 수 있는 아는 사람은 아는 산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차산은 영험한 산이 되었다. 영험한 산수를 갖춘 곳이라면 절을 세워 수도 도량이자 기도처를 만든 선조들이 이러한 아차산엔들 절을 세우지 않았을 리 없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아차산은 신라 때의 고승 의상대사의 발길이 닿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고찰 창건관련 이야기의 태반이 의상대사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또 구체적인 창건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상대사와 연관시키기 어려운 면이 있지만 이미 백제나 고구려에서 현재의 아차산을 중시했다는 것과 한산주를 운영한 신라 역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는 개연성을 놓고 볼 때 가능성 자체를 무시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의상이 671년 당나라에서 신라로 돌아왔고, 이후 낙산사를 창건하였으며, 676년에는 왕명에 따라 죽령 부근에 부석사를 지었다는 일련의 과정을 본다면 이를 설화로만 무시할 수도 없다. 그러한 의상의 발길이 닿아 672년에 지어진 절의 하나가 화양사(華陽寺)로서 현 아차산 영화사(永華寺)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사찰 창건설화는 대개 후대에 권위있는 혹은 영웅으로서의 지위가 있는 이를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당연히 100% 신뢰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 개연성을 믿으려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승려나 불교신자라고 한다면 자신과 관련된 사찰의 역사성과 부처의 가호를 의상의 권위를 빌어 확인하고자 하는 심리가 반영되었을 것이다.

여기에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아차산 영화사는 본래 의상이 창건할 때 화양사(華陽寺)라 하였으며, 그 위치도 용마산 중턱에 있었다. 그러나 아단산(阿旦山)이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면서 고친 이름인 '단(旦)'을 피하면서 '아차산(阿且山)'이라 표기하였다가 시적 감흥이 부족해서인지 중국의 명산 중 하나인 '아차산(峨嵯山)'이라 하였다는 것처럼 화양사의 위치도 태조의 명에 의해 산 아래 군자동으로 옮겨졌다가 언제인지 모르나 현 중곡동으로 이전하였다 한다. 태조가 그 같은 명을 내린 이유는 이 절의 등불이 궁궐에까지 비쳤기 때문이라 하는데, 시력도 좋고 요즘처럼 전기불이 휘황찬란하지 않은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그럴 수 있겠다 여겨진다.

화양사와 관련한 전설은 이뿐만이 아니다. 현재 영화사 내에는 미륵전이 있고 그 안에는 높이 약 4m의 미륵석불입상이 있다. 서울 시내 사찰 중 미륵석불입상이 있는 곳과 비교하지는 않았지만 단순하면서도 백성이 바라는 거대한 미륵의 모습이 담겨져 있어 어떤 소원도 들어줄 듯 넉넉함이 있다. 현 영화사 미륵석불입상은 본래의 중곡동 쪽에서 옮겨온 것이라 하고 있고, 이 불상이 고려후기의 양식적 특징을 띠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화양사 미륵석불의 영험함에 대해 기도하는 이들이 예부터 많았었을 듯하다.

조선시대 호불의 군주로 유명한 세조는 양양의 낙산사, 오대산 상원사, 속리산 법주사, 남양주 수종사 등등 여러 곳을 다니면서 기도를 올린 왕이다. 그러한 왕이 당시 영험하다는 말이 돌았던 화양사 미륵석불입상을 찾아 기도하였다고 한들 크게 잘못된 것이라 지적하기도 어색하다. 더구나 광진구 일대가 정종, 태종, 세종이 함께 모여 즐겼던 낙천정 이궁이 있었고, 세종이 화양정을 세우도록 하였으며, 광주가 개발되면서 광진원이 두어졌던 것을 보면 이곳에 화양사라는 절이 분명 있었을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세종이 할아버지의 상을 닮았다고 한 세조가 자신의 업을 씻고 건강과 국태민안을 빌기 위해 찾았던 절이자 미륵석불입상이 있던 곳이라 해도 하등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음은 이 때문이다.

화양사는 1907년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이전하기 전 정조대왕 때 화양사는 승려 20명 이상이 수도하는 기도처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화양사의 모습은 《한성동역도(漢城東域圖)》에 그려져 있었고 《여도비지(輿圖備志)》에서도 언급되었다. 하지만 화양정이 이미 쇠락하여 이름조차 희미해진 즈음, 왕실에서 더 이상 화양사를 찾지 않게 된 즈음에 원래의 위치라고는 할 수 없지만 다시 좀 더 산위로 올라가면서 이름을 바꾸었다. 영화사가 그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세조가 기도를 올렸다는 미륵석불입상이 모셔진 미륵전 글씨는 동국대학교 초대총장 권상로(1879~1965)가 썼다.

이제 곧 2019년도 대학입시 시즌이 돌아온다. 그리고 모든 부모들이 자녀들의 대학 합격 기원을 한다. 해돋이의 밝음과 의상의 법력, 그리고 세조의 기도는 일차적으로는 부처의 세계를 열고 부처의 자비로움을 비는 것이다. 더불어 많은 민초들도 저마다 부처님과 미륵의 법력을 빌어 소원을 이루고자 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자식을 둔 민초들의 바램은 미륵석불에게로 몰린다. 너무나도 큰 법력이 있다 믿기에 지극정성을 다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바램 위로 모두가 그럴 수는 없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되길 얹어 기도하였으면 한다. 온 누리에 아단산의 햇살이 퍼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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