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고전13:6) 2019.01.23
“1418년부터 1450년까지 흑점 기록이 하나도 없다. 또한 그때를 전 후로 150년간 흑점 기록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양홍진 한국천문 연구원 박사는 이 시기가 소빙하기와 일치하는 때로,‘태양 활동이 매우 적었고 일조량이 적어 농사 짓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 견해를 밝혔다. 실제로 세종 시대는 가뭄의 연속이었다.”
KBS 한국사傳 제작팀 저(著) 「한국사傳3」(한겨례출판, 245-247쪽)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세종 시대는 환경이 좋지 않았습니다. 「세종실록」을 보면 세종 즉위 이후 10여년간 단 한 해도 가뭄이 들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흙을 파먹는 백성이 생겨날 정도였습니다. 세종 6년에는 가뭄 때문에 강원도 전체 가구의 3분 1이 사라지고 농토의 절반이 폐허가 되었습니다.
농업이 국가의 기반이던 시대에, 연이은 흉년은 국가적 위기였습니다. 이에 세종은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 하기 위해 거처하던 강녕전을 버리고 경회루 한쪽에 초가집을 짓고 무려 2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고민 속에 열하루 동안이나 앉은 채 밤을 지새우기도 했습니다.
세종은 이런 극심한 어려움 속에서 빛을 발합니다. 과학영농을 시작하여 농업기술을 한 단계 끌어올리고자 측우기(測雨器), 자격루, 간의(簡儀), 혼천의(渾天儀) 등 많은 과학기구를 발명하게 합니다.
또한 모를 옮겨 심는 이앙법을 실시하여 획기적인 농업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세종 대에 정비한 이양법은「농사직설(農事直設)」 이라는 책에 잘 적혀 있습니다. 그 결과 세종 후대에 토지 1결당 생산량은 1200두까지 높아졌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골리앗을 만나면 저 큰 덩치를 감당할 수 없다고 지레 죽어 버립니다. 믿음의 사람이 골리앗을 만나면 덩치가 저렇게 크니 아무데나 돌을 던져도 맞을 거라며 눈이 반짝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삼상17:45)
한재욱 목사
강남 비전교회
서울시 강남구 삼성2동 2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