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K를 한 번도 마중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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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K를 한 번도 마중 나오지 않았다
  • 강서양천신문사
  • 승인 2019.05.03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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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장면을 실어 나르던 K의 중학교시절 이야기 -

◈ 기고

이상호 정책위원장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자장면을 실어 나르던 K는 중학교에 입학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 어머니의 억지어린 당부에 책가방을 들어주던 친구와는 이별을 했다. 주변 친구들에게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그의 태도도 마음에 안 들었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친구의 선행상 수상이었다.

몇 년이고 다리 아픈 친구의 가방을 들어주었던 것이 선행으로 포장되어 전교생이 다 모이는 자리에서 친구는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물론 K는 고마운 친구에게 한마디 하라며 전교생이 바라보는 자리에 그 불편한 걸음으로 단상을 올라 친구의 선행을 찬양해야 했다. 그날 퇴교 길은 긴 장마의 끝자락을 이어 가고 있었다. 선행상에 고무된 친구는 어김없이 가방을 들어 주려 했고 마땅치 않았던 K는 할 일이 있다며 먼저 가라 했다. 학우들이 퇴교 하는 시간에 걸음을 하면 당연히 주목을 받게 되니 피해서 가는 길은 날이 저문 어두운 저녁이었다. 비는 오고 교복은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더구나 길은 어둠이 내렸으니 잘 보이지 않았다. 돌부리에라도 걸리게 되면 흙탕물을 뒤집어 써야 했다. 14살에 K에게는 참으로 멀고 험한 길이었다.

친구들에게는 즐거웠던 등하교가 K에게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멀고 먼 길이었다. 넘어져서도 울었지만 죽을 만큼 굴욕적이었던 친구의 선행을 치하하는 자리도 그러했다. 단상을 올라가던 몇 분간의 걸음은 K에게는 평생 잊히지 않았다. 전교생이 쳐다보는 가운데 단상의 계단을 선생님의 손을 잡고 올라가던 일은 K에게는 고문과도 같았다. 학교가 싫었다. 다만 어머니의 걱정을 알고 있으니 억지로라도 길을 향해야 했다. 웬일인지 비오는 날, 어머니는 단 한번도 K를 마중 나오지 않았다. 친구에게 가방을 맡기라는 암묵적인 압력인 줄로만 알았다.비오는 날! 교문 앞은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엉켜 있었다. 우산을 들고 마중을 나오는 이들, 차를 타고 가는 아이들, 이도 저도 아니면 비오는 거리를 재미삼아 냅다 뛰어다니는 아이들 덕에 교문 앞은 북적거렸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K는 떡볶이 집을 단골 삼았다. 비가 그치면 다행이지만 비는 밤이 되도록 쉴 줄을 몰랐다. 학교 가까운 곳에는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이왕 비는 맞아야 하니 뚝방(방죽의 충청도 사투리) 길에 살고 있던 친구를 찾아갔다. 그곳에는 가난이 멈춰 서 있었다. 부모님들은 일을 나가서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으시니 아이들 끼리 어울려 해가 지도록 뚝방 근처를 헤매고 다녔다.

저녁밥은 아이들에 손에서 만들어 졌고 반찬이라고는 단무지 몇 조각이 전부였다. 불편한 걸음이었으니 먼 곳은 가지 못했던 K에게 뚝방촌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장애가 별 다를 것이 없었다. 가난에 밀려온 장애인도 많았고 아픈 사람끼리 이해해주고 힘을 실어주는 정서가 그 곳에는 있었다. 친구는 요리사를 꿈꾸고 있었다. 동생을 공부시키고 가족을 책임져야 했던 친구의 형은 프레스 기계에 손이 잘린 체 세월을 신음하고 있었다. 그도 요리사가 꿈이었다. 공장에 다니며, 얼마간의 돈이 모이면 요리학원에 다닐 요량이었다. 당시 학교에서는 군인아저씨에게 위문편지를 보내는 것이 유행이었고 적절한 반공교육 덕에 그것은 또 다른 애국인 줄만 알았다. 편지를 어떻게 썼는지 모르겠으나 어느 날 학교에 연락이 왔다. 직접 군인아저씨가 보고 싶다고 일간 휴가이니 학교로 오겠다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그의 형은 스타가 됐다. 선생님께서도 개교 이래 위문편지를 받고 직접 군인아저씨가 학교에 직접 온 일은 없다고 했다.

군인 아저씨가 학교로 오던 날! 직접 교장선생님까지 나서서 칭찬을 해 주었다. 그의 위문편지는 교내 백일장의 귀감이 됐다. 군인 아저씨와의 외출을 학교에서 일부러 수업을 빼 줄 정도로 배려를 해 주었다.그날 그의 형은 평생 처음 탕수육을 먹었다. 일찍이 부모를 여윈 그의 형에게 잊지 못할 하루였다.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학용품까지 사주었던 군인아저씨 덕에 그는 개선장군처럼 학교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날은 그의 형에게는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날이었나 보다.

혀끝에서 살살 녹는 탕수육의 맛을 잊지 못해 그의 형은 요리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 어린 나이에도 그에 선택의 배경에는 집안 사정이 있었다. 사실 그의 형은 소설가가 꿈이었으나 당시에도 글 쓰는 일은 돈이 되지 않았으니 요리사가 현실적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불과 17살의 소년이 이런 결정을 하게 된 것이다.

 

뚝방의 현실은 가난과 설움의 똬리를 어린 꼬마의 가슴에도 멍울로 자리하고 있었다. 하루하루를 살아나가기 어려웠던 그의 집안은 그의 형에게 고등학교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했다. 일찌감치 그의 형은 문래동 공장 골목에서 자리를 잡았다. 어린나이이니 일은 똑같이 해도 월급은 적었다. 아침 7시 반까지 출근하여 일찍 끝나도 8시 경이었다.사장은 저녁 먹을 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넘기며, 돈을 아끼고 있었다. 차비를 아껴 귀가하면 밤 열시를 훌쩍 넘으니 17살짜리 소년은 배고픔보다 설움이 복 받쳤다고 했다. 뚝방에 앉아 흐르는 냇가를 쳐다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K의 친구는 형을 기다리며 단무지 비빔밥을 만들곤 했다.

그의 장기였다. 이렇다 할 반찬이 없으니 그의 집안사정을 잘 아는 구멍가게 아저씨는 단무지가 쉬기 전 그를 불러 모아 주곤 했었다. 참기름, 깨소금, 단무지, 고춧가루를 적당히 볶아내 비비게 되면 색깔이며 맛이 그런 대로 먹을 만 했다. 아니 맛있었다.

K는 처음 빗길을 피해 뚝방길에 접어들었으나 날이 더 할수록 주변의 시선이 불편했던 그의 집안 골목보다 뚝방길을 택하는 날이 잦아졌다. 어느 날이었던가? K의 친구를 한동안 골목과 학교에서 보지 못했다.

프레스에 손목이 날아간 형을 간호하기 위해 K의 친구는 병원에 머물고 있었다. 물론 동생들 학비와 생활비를 감내하며 요리사의 꿈을 위해 모아두었던 피눈물 나는 돈은 병원비로 흔적 없이 사라졌다. 군인아저씨와 보냈던 꿈같은 짧은 하루도 기억에서 지워야 했다.

그의 형은 현세에서 유일하게 즐거움으로 남게 하기 위해 하느님이 주신 꿈이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의 누이는 형벌과 같은 운명을 택한 것 같다. 모두가 서로에게 죄스러웠고 또한 그것은 상이하게도 서로의 위안이 됐다.

할머니는 빨리 죽어야 한다는 말을 늘 하셨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고 손주에게 기대야 하셨던 그녀의 모진 운명을 저주하며 말이다.그의 형은 알코올 중독이 되어 갔다. 허나 동생이 돌아 올 시간이면 어김없이 기운을 차려 단무지 비빔밥을 만들었다. 잘린 손목을 동여매고 말이다.

그의 누나는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모른 척 해주는 것이 고맙기도 했고 서럽기도 했다. 다만 이쁜 누나 왔다며 착착 감기는 동생, 연민의 시선을 보냈던 할머니, 죄책감에 그의 누나를 쳐다보지 못했던 그의 형, 부록으로 다리는 절름거리기는 하나 자주 동생과 어울려 노는 K에게 그녀는 가장이거나 어머니이기도 했다.

그녀는 가장이거나 예쁜 누이이거나 짐을 홀로 진 어머니였다. 그의 형, K의 친구, 할머니의 생존을 책임져야 했던 그의 누나는 술집을 나가고 있었다. 모두 다 아는 사실이었지만 모두 다 몰라야 하는 사실이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유독 K를 쩔뚝 다리라고 놀리는 놈이 있었다. 분을 못 이겼던 K는 언젠가는 응징하리라 다짐을 했다. 허나 놀리고 도망가는 데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K와 그의 친구는 모의를 나누었다. K는 군용 포크를 준비했고 그의 친구는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놈을 화장실로 몰아주었다. 그날 그놈은 허벅지에 선명하게 구멍이 났다.

낄낄대며 통쾌해 했던 K와 친구에게 선생님은 매를 들었다. 그날 K와 친구는 숟가락을 들지 못할 정도로 매를 맞았다. 마침 그놈은 부잣집 아들놈이었으니 선생님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그 아이는 K와 친구에게 알아서 부하가 되어 주었다. 선생님보다 더 무서운 것은 K와 그의 친구였기 때문이다. 단골이었던 떡볶이 집에서 값을 치루는 것은 오로지 그 아이 몫이었다. K의 책가방도 그 아이에게 들려졌다. 비오는 날! 으레 어머니는 마중 나오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K는 그날따라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날, 비 그치기를 기다리지 않고 K는 집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집에 없었다. 마실(마을에 놀러가다, 강원도 사투리) 가셨으려니 동네를 찾던 중 바로 옆집에서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비오는 처마 밑에서 K는 어머니의 울음 섞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K의 험난했던 치료 과정이며, 학교에서 놀림 받는 아이의 마음고생을 어찌해야 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장애가 창피해 비오는 날 마중가지 못하는 어미의 마음을 통곡으로 토해내고 있었다. 그날, K는 가출을 했다.

뚝방에서 잠을 잤고 K의 친구, 그의 형에게 생에 처음으로 소주를 얻어 마셨다. 어머니가 밉기도 했으나 왠지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날 일은 K의 친구, 그의 형에게만 할 수 있었다. K의 친구, 그의 형이 장애인이어서 그랬는지 K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몇 년 뒤! 그의 형, 그의 누나는 과일행상을 시작했다. 술집에서 그의 누나가 빠져 나오기란 쉽지 않았다고 했다. 그의 형의 악살에도 건달들은 물러 서주지 않았다고 했다. 할머니가 길에 내동댕이쳐지고 K의 친구 역시 머리가 깨졌다고 했다. 한 팔을 마저 자르겠다고 그의 형이 칼을 빼들고 그의 누나가 병을 깨들고 자해를 해서야 멈춰 섰다고 했다. 얼마간 그의 누나의 고혈을 착취한 돈을 빼앗아 리어카를 사고 장사거리를 마련해 그의 누나와 그의 형은 길을 나서게 됐다.뚝방길에 또다시 비가 내린다. 비가 오니 장사를 공친 뚝방길 골목에는 단무지 비빔밥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다. K의 어머니는 K를 생각하며 울고 K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울고 있다. 마치 청개구리 모자와 닮아 있다.

비만 오면 비가 대신해 우는 것인지 K가 함께 우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꽤 긴 시간! 뚝방길 냇가에서 K를 볼 수 있었다. 팔이 잘린 그의 형과 말이다. 왜 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도 울고 있었다. 1970년대 끝자락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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