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활동가 AOK(액션원코리아) 이기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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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통일활동가 AOK(액션원코리아) 이기묘 대표
  • 성동신문
  • 승인 2020.09.15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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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잘랐고, 일본은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다.”
책임은 그들에 있지만, 통일 문제 스스로 풀자 인식해야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광복을 맞았다. 일제의 식민지배를 끝내고 '빛을 다시 찾은' 명절이다. 하지만 이날은 일제로부터 수탈과 학살을 당해오면서도 하나의 민족으로 살던 우리가 분단되어 적대가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남에 진주한 미군과 북에 진주한 소련군에 의해 갈린 두 진영은 5년 후 '전쟁'으로 충돌한다. 분단은 더욱 고착화 되고, 남북은 대치를 지속하고 있다.

지난 7월 25일, 성수아트홀에서는 댄스 시어터 <행당동 115번지>가 공연됐다. 한국민이 겪은 분단과 전쟁을 몸으로 표현하는 춤극으로 풀었다. 분단으로 가족을 이별당하고, 전쟁으로 차례차례 인민군-국군, 미군-중공군-국군, 미군이 점령한 서울을 지키다 '손가락 총'에 가족과 이웃을 죽이게 된 비극이 춤꾼들에 의해 펼쳐진다. 이 이야기는 이기묘 AOK(Action One Korea) 대표의 가족사를 모티브 삼았다. 그를 직접 만났다.

강제된 분단, 전쟁은 국가가 가족에 가한 범죄

- 행당동 115번지에 아직 살고 계시죠? 가족사를 듣고 싶습니다.
“저희 할아버지 할머니 고향이 경기도 개풍(지금 북은 황해도로 편입)입니다. 삼팔선이 생길 당시 그곳은 남쪽 땅이었죠. 전쟁이 끝나고는 북쪽 땅이 되었습니다. 셋째 큰아버지와 막내인 아버지가 이곳 행당동에서 살고 있었는데, 전쟁이 나면서 당시 이승만대통령이 피신하면서 국군이 북진 중이니 국민들은 안심하라고 한 방송을 듣고 큰아버지가 '고향에 다녀올테니, 어디 가지말고 꼭 여기 있거라.'고 떠나신 후 못 돌아오셨어요. 그 이후 그 집을 떠나실 수 없다며 살아오신 것이 부모님 뜻이셨어요. 고향애 계신 분들이 행당동에 사는 걸 알고 있으니까.”

- 몸춤극에서는 가족의 이별만이 아니라 이웃간의 고통도 그려졌더군요.
“여러 헤어짐이 있겠지만 우리 부모님이나 북에 계신 분들은 피란을 가지 않았어요. 집을 지킨 거죠. 삼팔선이 그어질 때는 남쪽 땅이었는데 휴전선으로 바뀌면서 남북으로 갈라진 것이죠. 처음엔 인민군이 밀고 내려왔죠. 다음에 국군이 다시 서울로 들어왔죠. 이후 중공군이 다시 내려왔고, 다시 국군과 미군이 들어온 거죠. 인민군이 물러나고 국군과 완장찬 사람들이 동네 사람들을 지금의 행당초등학교 앞 우물가 앞으로 모았데요 총을 들이대면서. '인민군에게 부역한 자들을 대라'고. '그래야 살려준다'고. 사람들은 놀라 정신차릴 겨를도 없이 이웃들을 지목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 길로 두 군데로 나눠 끌려갔고, 이후 더 그들을 볼 수 없었다는 거예요. 그 이후론 이웃 간에 말이 적어지고 서로 소원하게 된 거죠. 뭐라고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동네 분위기를 만들어 놓은 겁니다. 어머니도 지목당했다는데, 이웃 아주머니가 이 아주머니 남편이 국군으로 참전 중이하고 말해주어서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아버지는 1945년 일제에 의해 징병되어 훈련받다가 전쟁터에 투입되기 전 해방을 맞고 돌아 왔다. 해방 후 결혼하고 전쟁이 나면서 다시 국군이 되고, 전쟁이 끝나면서 부모형제는 북에 있었다. 일곱 남매의 막내였는데, 홀로 남았으니 사실상 나무로부터 단절되어 떨어진 열매와 같았다. 막내였으니 할아버지 할머니, 형제와 누이를 그리는 마음은 한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마음놓고 부를 수도 없었다.
처음엔 이산가족 만남 신청도 하지 않았다. 북쪽에 부모형제가 그렇게 있는 걸 남들이 알면 좋을 일은 없었을 테니 또 당시는 만나면 간첩을 만났다 할 테고 못 만나면 가슴속이 아프니 이래저래 문제였으니까. 그가 분단과 전쟁과 만남금지를 '국가가 개인과 가족에 가한 범죄이고 천륜무시, 인권탄압'이라고 하는 이유다.

- 그런 가족사가 현재 통일운동을 하는 계기가 된 건가요?
“처음엔 안 그랬고 몰랐죠, 나는 교육이라는 것이 바로 가르치고, 세상에 배운 사람들도 많고, 똑똑한 사람들이 많으니까, 세상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일부 잘못된 일이 있어도 결국 세상은 상식과 양식에 맞게 바로 잡혀갈 것이라고 믿었어요. 그런데 그게 꼭 그렇지 않더군요.

세상을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말이죠. 무엇부터 잘못됐길래 그럴까? 하는 의문이 거듭되다가 분단으로 인한 문제가 여러 곳에 나쁜 영향을 미쳐왔다는 사실과 우리 가족사가 연결되면서 심화되어 가는 것 같아요”

전범국 일본 대신 한국이 분단됐다. 책임은 미국에

- 어떤 점이 그렇습니까?
“1945년 종전이 되면서, 분단을 시켜야 했다면 전범국인 일본이 갈렸어야죠. 그런데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절단됐단 말이죠. 왜 그랬을까? 미국은 일본을 항복시키고 그곳을 완벽하게 장악했어요. 일본은 미군에 군사기지를 할양해야 했고, 언제든 필요시에는 일본 전체를 군사기지로도 쓸 수 있어요. 일본은 군대를 가질 수 없고, 다른 나라를 침공할 수 없다고 못박아 놓은 거예요. 말하자면 미국화가 헌법의 내용이에요. 그러니 일본은 더 갈라놓을 필요도 없죠. 그런데 남한과 북한을 갈라놓은 건, 미국의 의도 때문인 거죠. 갈등의 도화선이 있어야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이익을 얻을 수 있고 미국이 세계의 맹주역할을 할 수 있으니까.

미국은 9월 8일 한국에 '점령군'으로 들어왔어요. 해방후 민족지도자들이 구성했던 건국준비위도 해체했죠. 상해임시정부 지도자들도 빨리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다가 늦게 들어온 다음에도 활동을 불허했어요.

남쪽에 들어온 것을 당시 맥아더사령관은 점령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남한내 일체의 정치활동 금지와 처벌한다는 내용을 포고문으로 발표했죠.

언론도 장악했어요. 일제에게 모든 걸 다 뺏기고 살았던 우리 민족 스스로 완전한 독립을 위한 사회정상화가 그 때문에 모두 멈췄죠. 이후엔 36년간 일본 앞잡이로 일했던 부역자들을 전부 다시 썼어요. 일본 아베 총리의 증조부였던 데라우찌 총독이 이 땅을 떠나며 남긴 말을 아세요? '우리는 지난 36년간 조선을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 이후 전개된 정치문제는 그런 점이 너무 많이 발견되어온 것 같아요

2020년 9월 8일에 미국 전쟁범죄 국제고발대회를 열었다. 이를 위한 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국제평화포럼(KIPF)가 많은 준비를 하면서. AOK의 정연진 상임대표가 미국의 전쟁범죄에 대해 발제했고 시니철님 등에 의해 한국전쟁기 학살 문제 등이 발표되었다. 이후엔 국제민간법정을 열어 고발내용의 객관성을 밝히기 위한 활동이 검토될 것이다.
이기묘 대표는 “판결집행까지 가서 현실성과 원칙적 입장을 고려해 논의되면 좋을 것”이라고 밝혔다.

- AOK는 “역사의 주인인 풀뿌리 민들의 통일 운동을 위해 지구촌 해외내 동포들과 2013년 LA와 서울에서 출발한 민간 운동”이라고 소개돼 있더군요. AOK는?
“서울대서 역사공부 후 징용과 일본군 강제 위안부 문제의 해결에 나섰던 정연진 대표가 겪은 일이 있어요. 국제적 호응도가 크지 않아서 고민하던 중 일본의 전쟁범죄를 고발하는 한국인들을 보고 외국인들이 그랬다는 거예요. '제대로 되지 않은 나라 사람들 말을 누가 듣겠냐?'고요. 아직 분단돼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는 나라 말이 먹히겠느냔 거예요. 그래서 통일운동이 기본이라고 보고 나선 것이죠. 미국에 이민생활을 하면서 LA에서 설립했고, 3개월 후 서울에서도 만들어졌어요. 나는 여러 통일단체들과 뜻을 모으는 활동을 하던 중 AOK와 인연을 맺었고 공부를 위해 북한대학교 대학원 연구과정에 이어 건국대학교 대학원 통일인문학 박사과정도 수료했고 2019년 9월부터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성동협의회 교류협력분과장도 맡게 되었어요. 통일을 위해선 바른 사실 이해와 단결이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행당동 115번지, 몸춤극에 평화 통일 염원 담았다

이번 행당동 115번지 역시 AOK가 공모에 참여한 '2020 서울시 시민참여형 평화통일 교육의 일부다. 김은희 연출가가 구성을 했고, 윤혜정 안무가가 함께 기획과 준비를 거쳤다. 춤을 출 수 있는 바닥이 받쳐줄 수 있었던 곳이 성수아트홀. 구로문화재단의 오류아트홀도 성수동 공연 3일전에야 열렸다. 코비드19가 가로막았지만 공연 3일전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어 관객들이 참석하여 공연할 수 있었다.
이기묘 대표는 사회생활을 하다가 27세에 대학을 갔기에 정치나 사회문제를 남들보다 늦게 알게 되면서 여러 활동을 했다고 한다.
“사회문재들을 보니까 비상식, 비양심적 오해하기 어려운 현실들이 보였어요. 뒤늦게 문제의식이 싹트는 중에 대학 졸업 후 직장에 들어간 이듬해 87년 6·10민주화 투쟁이 발발했지요, 6·10민주화 투쟁의 영향으로 건강한 사회 건강한 직장이라는 솔로건이 내 걸리고 사무직 노조가 연이어 만들어졌어요.

이 활동에 동참하면서 당시에 노무현 의원과 권영길 기자도 만났어요. 통일문제연구소 백기완 선생님께 가장 큰 영향을 받았죠. 아직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어요.”

백기완 선생은 한국사회가 가진 역사적 질곡을 가장 앞장 서 싸워온 이다. '새내기' '동아리' '달동네' 같은 정겨운 우리말이 그에게서 나왔다.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리하여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되, 올바로 잘살자”는 노나메기는 그의 사상이다.

민간의 통일운동을 열어가는 이기묘 대표의 길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분단의 책임이 원초적으로 미국에 있고 지금도 미국이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지만, 잠시 좋으려고 그들에 매여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를 지연시키는 것은 온당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 비합리적인 문제들의 대부분이 분단이 만든 분열과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된다는 점입니다. 그것말고 지엽적인 문제해결만 보는 자세는 미봉책일뿐입니다. 자손들에게도 밝은 꿈과 희망이 있는 사회를 물려준다는 생각에서 우리 스스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가도록 해야죠.”
지금 우리에게 더 중요한 무엇을 생각하게 해주는 그의 말이었다.

출처 : 성광일보(http://www.sgilb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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