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대 구본관, 어떤 가치가 있어 국가등록문화재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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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구본관, 어떤 가치가 있어 국가등록문화재가 되었나
  • 성동신문
  • 승인 2021.05.07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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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원의 엉뚱 발랄 성동 이야기 (23)한양대 구본관(국가등록문화재 751호)
한양대 구본관(역사관) 현재 모습 ⓒ서성원
한양대 구본관(역사관) 현재 모습 ⓒ서성원

 

- 문화재 적은 성동구에 반가운 소식

○ 소재지: 서울시 성동구 행당동 한양대 서울캠퍼스

건물에 부착된 명패. ⓒ서성원
건물에 부착된 명패. ⓒ서성원

오지라퍼 : 성동구에 문화재 몇 갠지 아세요?
성동인 : 문화재? 있긴 해요? 아, 살곶이다리!
오지라퍼: 그것 말고는요?
성동인 : 없을걸요.
오지라퍼 : 그럴까요.
성동인 : 에헤, 오지랖씨, 그런 거 묻지 마쇼.
오지라퍼 : 알았슴다. 말 나온 김에 제가 찾아본 건 알려드릴게요. 7개래요. 보물 2, 유형문화재 2, 민속문화재 1, 국가등록문화재 2개. 이 중에 국가등록문화재가 2건인데요, 모두 한양대에 있어요. 한양대역에 내려서 한대 들어가면, 저거다 싶은 건물이 있어요. 구본관입니다. 그게 국가등록문화재랍니다. 2019년에 문화재청으로부터 지정을 받았으니 최근이죠. 문화재가 적은 성동구(주1)로서는 반가운 일이죠. 만약 구경하러 오는 이들 생겨난다면 더 좋겠죠. 그렇게 될까요?

◆ 졸업식 때 포토존이 되는 건물

72년에 한양공대를 졸업한 분에게 물었다. 구본관에 대해 해줄 얘기가 없냐고. 등록금이나 내러 가고 성적증명서 뗀 것밖에 없다고 했다. “아참, 졸업식 때 사진 찍었네.”

그래서 나도 기억을 불러올 수 있었다.

동생은 노량진에서 재수하고 한양공대에 지원하려 했다. 나는 동생과 함께 접수창구 앞에서 종일 지켜보고 있었다. 마감 직전에 지원서에 산업공학과를 적어서 접수했다. 80년대 얘기다. 그날 접수창구가 어디였더라. 그 동생이 졸업하던 날, 구본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날씨가 꽤 쌀쌀했었다. 4남매는 학교 앞에서 돼지갈비를 먹고 헤어졌었다.

이렇게 보면 구본관은 한양대 얼굴이 확실하다. 왜 그럴까. 열주랑(주2) 때문인 거 아닐까. 석조건물이 있는 대학은 많다. 고려대는 고딕양식이 특히 많다. 석조건물이라도 돋보이는 건물이 있다. 경희대, 한양대다. 열주랑 건물이 있는 대학이다. 그리스의 신전처럼 보인다. 사진 찍기에 그만이다.

1층 열주 사이로 보이는 신본관. ⓒ서성원
1층 열주 사이로 보이는 신본관. ⓒ서성원

◆ 시대는 영웅을 만들고 암반은 한양공법을 만든다

한양대에서 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면 잘 보인다고 한다. 캠퍼스가 산이어서 그렇다고. 대부분 건물은 산에 세웠다. 건물 지은 얘기가 참 재밌다.

인문대는 행당산 정상에 위치한다. 지대가 높아 남산의 석양을 조망하는 명소로 유명하단다. 인문대를 지을 때 돌산의 암반에 건물을 올리는 게 그 당시 기술로서는 쉽지 않았다고 한다. 한양대 건물은 출입구가 많다. 사회대는 1층, 3층, 4층에 출입구가 있다. 경사가 급한 땅이어서 4층이 지상과 연결되는 곳이 있는 것이다. 또 건물 옆구리에 구멍을 뚫어 구름다리로 연결해서 옆 건물로 간다.

암반에 건물 올리기, 공중 부양 건물, 출구 많은 건물, 구름다리 건물 등등 이런 건축법을 ‘한양공법’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했단다. 위키백과를 보면 재미있는 게 더 많다.

최수묵 교수의 미디어 리터러시 수강 막바지 2020년 겨울, 루미나리와 어우러진 구본관을 보았다. ⓒ서성원
최수묵 교수의 미디어 리터러시 수강 막바지 2020년 겨울, 루미나리와 어우러진 구본관을 보았다. ⓒ서성원

◆ 한양대 구본관의 건축적 가치

한양대 구본관이 어떤 가치가 있을까. 건축 과정을 살펴봐야 한다.

한국전쟁 후에 한양대는 현재 위치(성동구 행당동 산8의 2번지)로 이전했다. 1953년 9월이다. 목조 바라크로 본관을 지었다(사진1). 56년 3층 석조건물로 본관을 세운다(사진2). 기역자 모양의 건물로 설계자는 박학재, 이해성 교수다. 63년에 불이 난다. 65년 장기인 교수가 디귿자형 4층 석조건물로 증축했다(사진3). 이때 정면 중앙부에 열주랑을 세웠다. 그때의 건물 모습이 현재까지 이어졌다.

한양대 한동수(건축학) 교수는 구본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한국전쟁 후 혼란기에 신축된 건물의 하나로 당시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최초 설계자, 증개축 설계자의 생각이 중첩된 건물로 학술 가치가 높다.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한 문화재청의 발표를 보자.

‘한양대 구본관은 외관을 석재로 마감하고 정면 중앙부에 열주랑(列柱廊)을 세우는 등 당시 대학 본관 건물에서 보이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디자인적인 요소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공학을 모태로 성장한 대학으로 경제 개발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기술 인력을 배출한 한양대학교의 역사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오지라퍼 : 그런데 한양대 인재들은 문제가 있어요.
성동인 : 문제라뇨. 무슨?
오지라퍼 : 낙수효과가 없잖아요.
성동인 : 낙수효과라뇨.
오지라퍼 : 배출한 인재들이 국제무대 같은 데로 떠나니까, 지역에는 얻는 게 별로라구요.
성동인 : 네에? 건축 얘기하다 말고 …. 역시 오지랖이군요.
오지라퍼 : 내 말이 답답한가요? 한양대 가보세요. 시원한 전망에 가슴이 뻥 뚫릴걸요. 구본관, 한양공법 건물도 구경하면 일타삼피, 인생 뭐 있나요. 꼭 가보세요.

주1) 성동구 문화재 7. 보물2, 유형문화재2, 민속문화재1, 국가등록문화재2. 구별 문화재를 알아보았다.
●1~10개: 양천, 구로, 금천, 영등포, 성동, 강동 (6구)
●11~66개: 마포, 강서, 도봉, 송파, 동대문, 중랑, 광진, 강북, 은평, 동작, 노은, 서초(12구)
●67~466개: 관악, 성북, 중, 서대문, 용산, 종로(6구)

주2)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진 다수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공간.

사진1: 1953년 한국전쟁 후 목조 바라크 건물의 본관. (출처 한양대뉴스포털)
사진1: 1953년 한국전쟁 후 목조 바라크 건물의 본관. (출처 한양대뉴스포털)
사진2: 1956년 3층 석조 구본관 (출처 한양대학교 박물관)
사진2: 1956년 3층 석조 구본관 (출처 한양대학교 박물관)
사진3: 1965년 증축한 구본관  (출처 한양뉴스포털)
사진3: 1965년 증축한 구본관  (출처 한양뉴스포털)
사진4: 1970년 추정, 설계도 부분, 현재 건물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70년 2월에 화재로 4층이 소실되어 그 후에 복구했는데 그때 설계도로 보인다. (출처 한양대학교 박물관)
사진4: 1970년 추정, 설계도 부분, 현재 건물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70년 2월에 화재로 4층이 소실되어 그 후에 복구했는데 그때 설계도로 보인다. (출처 한양대학교 박물관)
사진5: 2021년, 정면에서 바라본 현재의 구본관. 현재는 역사관이다. 코로나로 관람은 불가. ⓒ서성원
사진5: 2021년, 정면에서 바라본 현재의 구본관. 현재는 역사관이다. 코로나로 관람은 불가. ⓒ서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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