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잉 걸' 로즈와 선이는 왜 '엄마'가 되면서 '화가'는 포기해야 했을까?
상태바
드로잉 걸' 로즈와 선이는 왜 '엄마'가 되면서 '화가'는 포기해야 했을까?
  • 성동신문
  • 승인 2021.05.16 10: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호랑이와 닭과 토기와 도자기의 작가 김선이! 그 바탕 살펴볼 드로잉 일대기展
- 어린이날 가정의 달 스승의 날 5월에 미술 전시를 준비하며

올해초 예술의 전당에서 로즈 와일리展을 보았다. 1934년생. 마치 아이같은 이 할머니의 그림 주제는 '일상'이다. 할머니는 손흥민도 그려놓았다. 영화의 인상적인 장면도 그렸다. 그림을 보고 나오면서 화가 김선이가 떠올랐다. 한국에 로즈 와일 리가 있다면 그녀다.  
김선이는 1951년생이니 로즈 와일리에 비하면 '애'인데, 연상의 이유가 꼭 할머니여서만은 아니었다. 와일리는 21살 때 다니던 미술대학을 그만두고 결혼하고 엄마가 된다. 그리고 화가의 길에서 멀어진 후, 45세가 되던 해, 영국왕립미술학교에 입학하면서 다시 돌아온다.
와일리는 '20여년 간 화가의 꿈'을 꾸어온 이였다. 김선이 작가는 경희대 미술교육과를 졸업하고, 미술교사를 하지만 결혼을 하며 역시나 '화가의 삶'에서 멀어진다. 결혼과 엄마는 왜 더 이상 화가와 양립하지 못할까?

뒷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6번째 체크무늬 옷이 김선이다. 1958년 초등1학년, 경주시·군 미술대회 시상식. 뒤에 트로피가 보인다. 선이의 꾹 다문 입술은 무엇을 다짐하고 있을까? 

할머니를 고마워하고 그리워만 하지 마실 것

우리가 신화처럼 갖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은 '굽었다'. 꼬부랑 할머니는 꼬부랑 고갯길을 꼬부랑 간다. “할머니, 나 배고파요!”하는 손자의 말은 할머니에겐 '비상벨'이다. “이미 널 향해 달려가고 있다”며 시동을 건다. 손자를 배불리 먹이겠다는 일념은 문화권을 넘어 모든 할머니들의 일반적 모습이다. 그렇게 차려진 밥상을 받는 건 모든 손자 손녀들의 특권이다. 그 할머니는 이미 엄마의 모습으로도 식탁을 준비해 왔으므로, 아니 일찍이 누나의 모습으로도, 아내의 모습으로도 그러해 왔다. 그건 피에 새겨진 '운명'이면서, 수천 년 지속되어온 '문화'라 그저 인정해야 하나? 
책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는 순천의 할머니들 이야기다. 영화 <칠곡 가시나들>는 칠곡 골짜기서 평생을 살던 아주매들이 주인공이다. 충북 영동군 용화면에서도…. 주인공들은 우리 땅 곳곳에 있다. 왜 할머니들은 유독 그러한가?
그들의 삶은 '검은 건 글씨고 하얀 건 종이'인 문맹의 일상이다. 스스로는 통장도 만들 줄 모르고, 학교 통지문도 읽을 줄 모르고, 식당서 뭘 보고서 시키지 못하는 삶. 평생 고시를 준비한 적도 없고, 기업에서 사원증을 목에 걸어보지도 못했다. 

어느 시민단체 일원이 되어 항의문을 작성해 본 적도 없다. 정부에서, 기업에서 혹은 비영리기구서 '중요한 일'을 하는 '중요한 사람'에게 밥상을 평생 차려왔을 뿐.
그 밥상이 고마운 줄 알고, 그리운 당신은 참 현명한 사람이고, 참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할머니가 지금 거기서 그 일을 하고 있는 게 정말 당연한 일만은 아니란 걸 알았으면 좋겠다.  
그건 “여자애가 배우면 버릇이 없어진다”며, 젓가락도 쓰지 못하게 한, '아버지들'의 탓이다. 이런 일이 겨우 수십 년 전에 실재했다. 지금도 우리는 “여자가 시집 잘 가, 남편 뒷바라지 하고, 아이들 키우는 게 제 역할이요 복”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 
영국에서 로즈 와일 리가 한국에서 김선이가 각기 평생의 꿈이었던 '화가의 길'에서 멀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할머니는 어디까지 갈 수 있었을까? 화가 김선이의 작품과 작업은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준다.

드로잉 걸 로즈 와일리 혹은 김선이의 용기와 힘

경주서 태어난 김선이는 그림을 그릴 때 가장 행복한 아이였다. 크레용으로 그린 유년의 흙담벼락 '벽화'로부터, 초등1학년 미술대회서 대상을 차지한 그때로부터 선이의 별명은 '김밀레'였다. 
대회에서 상으로 받은 톰보우 4B 연필을 소중하게 간직하며 그려낸 그림들을 아궁이에 넣어버린 건, 어머니였다. “그림을 그리면 여자애 팔자가 세진다”는 게 이유였다. 
대구로 유학을 갈 때는 삼 일간 단식투쟁을 해야했다. 여자애로 태어나서였다. 홍대 미대로 가고 싶었으나, 경희대(이곳은 미술교육과가 있다)만 선택할 수 있었던 것도, 오빠들이 거기서 한의대를 다니고 있기 때문(보호라는 명분으로)이었다. 유학이나 대학원 진학을 막았던 것은, 여성의 삶에서 절정인 '결혼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미술교사로서 이제 막 3년여 경력을 시작한 때였다. 

아내가 되어 남편의 회사가 있던 울산으로 가고,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엄마가 된 후로는 붓을 잡을 수 없었다. '생활의 방편'으로서 시작한 사택 미술교습과 미술학원 기간은 화가로서의 공백기였다. 그렇게 13년여. '그림이 옆에 있지만 나는 행복하지 않다. 나는 화가가 아니다. 내가 바보가 돼 간다'는 아픈 자각을 더 견디지 못하게 된 것은 김선이의 나이 서른 아홉 어느 날이었다. 선이는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학원을 그만 두고, 다시 붓을 잡는다. [물론 이 서사는 젠더-여성-에게만 국한된 문제일 수는 없다. 계층도 부도 지역이나 장애도 삶의 장애가 된다. 어느 하나가 유일한 이유도 아니다. 문제는 어떻게, 혹은 왜 풀어야 하느냐를 설득할 수 있느냐다.]

가족과 땅과 사회의 의미와 가치 전달자

김선이의 작업은 나고 자란 땅 경주, 그리고 삶에 단단히 뿌리를 두고 있다.
김선이의 작업은 나고 자란 땅 경주, 그리고 삶에 단단히 뿌리를 두고 있다.

김선이는 '호랑이와 닭과 토기와 도자기'의 작가다. 마티에르(표면을 부조처럼 부풀게 처리하는 기법) 효과를 준 이들 작품들은 몇 달의 작업 혹은 몇 년의 준비과정을 거쳐 전시된다. 
우선 호랑이. 호랑이는 우리 옛이야기와 그림에 빼놓을 수 없는 주인공이다. 한반도는 토끼 형상이 아니라 호랑이다. 산신 호랑이는 범접할 수 없는 '영물'인 동시에 '참기름 바른 개로도 아홉 마리쯤 사로잡을 수 있는 ‘바보’다. 그 변화무쌍함은 예술 창작의 자원이지만, 김선이에게 호랑이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원(祈願)과도 연관돼 있다. 7대 독자(이 경우에도 남자만 센다) 손 귀한 집안에서 부부의 기도는 호랑이굴 앞에서 이뤄졌다. 그 ‘호랑이’의 힘을 얻어, 할아버지 부부는 ‘7대 독자’의 운명을 끊게 된다. 부부의 아이 숙부는 남자애를 아홉이나 낳았다. 선이 아버지 역시 아들 둘 딸 둘에 이어 김선이를 낳는다.

토기 작품은 연원은 선이가 나고 자란 경주와 닿는다. 초등학교 3학년 때쯤부터 김선이는 사학자 윤경렬 선생과 경주의 고분과 박물관에서의 '산교육'을 받는다. 두 귀는 열고 눈도 활짝 뜨고 천년 신라의 문화유산과 토기를 만난 것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나도 무덤에 저런 토기를 만들어 넣어드릴 거야!” 그게 선이의 굳은 다짐이었다. 
김선이의 작품은 주로 청화백자이지만, 흑요와 '붉은(철화) 백자'도 자주 빚는다. 빚는다고 말한 건, 그 작업과정이 흙을 채 치고 개어 두 손으로 정성스레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도자기들은 실용적 도구인 동시에, 가장 신박했던 기술제품이요 예술품이었다. 김선이는 그것을 갖고 싶어하는 원초적 욕망에 충실하고, 좋은 것을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주고파하는 마음에도 부응한다.  

2017년 정월에 한국의 오래된 교양잡지 <행복이 가득한 집> 표지는 김선이의 작품 닭이었다. 정유년 붉은 닭의 해 특집. 흰 바탕에 땡땡 무늬가 가득한 이 잘생긴 닭에 새겨진 것은 열정과 행복이었다. 우리 옛그림 민화의 가장 큰 특징으로서 '길상(吉祥)을 꼽는다. 복은 옮음과 연결되어 있고, 하늘이 주는 고결함에 바탕한다. 닭은 하루의 첫 시간 새벽에 태양을 맞이하는 울음을 운다. 김선이는 닭을 대개 쌍으로 지었는데, 그건 존경과 사랑을 함께 나누는 부부요, 동시에 친구이며, 나아가면 이웃이 되는 관계다. 뿐인가.
경주에는 계림(鷄林)숲이 시림(始林)이고, 계림은 신라의 옛이름이기도 하다. 처음 왕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난다. 닭의 머리를 한 용에게서, 닭의 부리를 한 여자아이 알영이가 태어난다. 그녀가 혁거세의 부인이다.

줄탁동시, 작가 내면의 열정과 스승들의 격려가 필요하다.

이 모든 작품의 작업들 아래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바탕이 있다. 하나는 드로잉이고, 다른 하나는 스승들이다. 김밀레에겐 담임 김병찬 선생이 있었다. 그 선생님이 선이를 부를 때의 따스한 어감과 자부심이 선이의 마음에 있는 화가로서의 씨앗을 발아시켰을 것이다. 경주여중을 다닐 때, 그의 미술반 선생님은 손주봉이었다. '천재'로 불렸던 손주봉은 선이를 미술실에서 매일 그림 그리게 해준다. 대구 효성여고로 유학을 갔을 때, 주경 선생을 소개해 준 것도 손일봉. 주경은 선이의 가장 큰 장점, 즉 '힘 있는 선'을 발견하고 격려해 준다. 그 자산으로부터 선이의 오늘날 드로잉과 크로키 작품들이 있다.

김선이 작가는 말한다. “누구라도 어디서라도 언제라도 할 수 있는 것이 드로잉이다. 그런데 사소하다고 많은 이들은 하지 않는다. 나는 평생을 해왔다.”고. 
드로잉은 그 자체가 화가로서의 정직한 작업의 일부이다. 대상을 관찰하고 표현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감정은 발현하고 표현된다. 따라서 드로잉은 모든 위대한 작품들의 바탕이 된다. 거기서 발견되고 단련된 선이 작품에 자산이 되어 남는다. 

땅에, 그 시대의 문화 전승 전선에서, 여성은 언제나 최전선에 있었다. 여성은 아이를 낳는 생물학적인 존재에 더하여 시대와 시대를 잇는 문화적 자양의 수원지다. 여성을 교육시키고, 사회에 참여케 함으로서 사회는 더욱 풍성하고 다양한 힘을 보탠다. 
글은 비록 몰랐어도 인생을 아는 할머니들의 시(詩)며 그림 작품엔 힘이 있다. 진한 울림과 감동을 준다. 우린 거기에 더하여 질문해야 한다. “내게 밥을 지어주고 있는 이 할머니들은 어디까지 갈 수 있었을까?”
이번 전시 <김선이 드로잉 일대기展>은 그 답을 엿보게 해준다. 거기에 어떻게 다가가고, 왜 그래야 하는지 넌지시 일러준다. '드로잉 걸' 김선이가 우리 곁에 온다.

KIM SUN LEE Drawing Life Story
김선이 드로잉 일대기展
2021.05.04~06.03
스페이스 오매 : 서울 성동구 뚝섬로 9길 16 4층
전화 : 070-7578-5223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