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가정의 달 특집-아주 특별한 가정의 아주 특별한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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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가정의 달 특집-아주 특별한 가정의 아주 특별한 독립
  • 성동신문
  • 승인 2021.05.26 12: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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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성영아원에서 이든아이빌까지 “우리는 가족이었으니까요!”
- 돌아갈 수 없는 집이지만, 늘 돌아갈 수 있는 가족을 지닌 청년
이든아이빌 2021년, '퇴소아동' 남윤성 씨가 옛 화성영아원 기억을 되살리며 이든아이빌 집 앞에 섰다. 이든아이빌 2021년,
이든아이빌 2021년, '퇴소아동' 남윤성 씨가 옛 화성영아원 기억을 되살리며 이든아이빌 집 앞에 섰다. 이든아이빌 2021년,

움직일 때마다 돈이더라고요!

“독립을 했다는 것을 언제 가장 강하게 느끼느냐?”고 물었다. 돌아온 답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움직일 때마다 돈이 드는 거요!”

2000년생. 올해로 스물두 살이 된 청년 남윤성을 만났다. 이든 아이빌에서는 '퇴소아동'으로 부르는 그는 어느새 청년이었고, 퇴소는 곧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든아이빌이라는 둥지를 떠난 후, 그들의 삶이 궁금했다.
“이전에는 모든 것이 다 있었잖아요. 잠자리에서부터 먹는 거까지 다. 그런데 이제 밖에 나가니까 모든 걸 다 제가 해결해야 하는 거예요. 밥 한 끼를 먹어야 하는 일도, 사먹거나 아니면 재료를 사서 해먹어야 하는 거죠. 그런데 혼자 사니까 요리를 하면 늘 재료를 버리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때는 라면 하나로 때우기도 하고, 햇반에다 계란하고 간장으로 먹기도 하고 그러죠.”

- 눈물 젖은 빵이로군요.(웃음) 독립은 굉장히 중요한 과제였을 거 같은데, 준비가 잘 됐던 것 같아요?

“모아서 수업도 하고, 자산관리나 일상생활, 직장생활, 진로기술 이런 것도 계획하고 그랬거든요. 자립홈에서 이미 여러 해 경험도 해보고 그랬는데…. 근데 막상 닥치기 전까지는 실감이 하나도 안 났던 것 같아요. 혼자 살면서 돈을 내보니까 '아! 독립했구나!' 확 닥치는 거죠. 전기세도 내야하고, 먹을 때, 입을 때, 이동할 때도 돈이 나가요. 아 이렇게 돈이 많이 나가는구나 알게 되죠. 더 싸고 더 효율적인 게 무엇인지 계속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 작은 일이 아니고,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군요. 경제를 운영해 간다는 일이.

“제가 휴학을 하면서 학생이 아니고 백수가 된 거잖아요. 기초생활지원비를 받으려면 일할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해서 제가 60만원 이상 소득을 벌어야 돼요. 알바를 하고 정기적으로 자립정착금이 들어오죠. 그런데 제가 소득이 60이 안 돼서…. 그런 게 조금 쉽지 않죠.”

- 그래도 완전히 혼자서 문제를 감당하고 있는 건 아니죠?

“이전 집(이든아이빌) 엄마네와 밴드로 정보를 교환해요. 선생님이 이런 활동을 하는 게 있다. 이런 배우는 게 있다 올려주시기도 하고요. 기술연수생 모집이라든가 심리정서지원 프로그램이라든가 하는 게 있으면 서류를 지원해 주시기도 하고요. 저도 어린이날이라든가 바자회 행사 등이 있으면 가서 도와주기도 하죠. 현재 제 집은 LH 청년전세에 들어가 있어요. 황학동에 있는 거. 2년을 살고 나면 2년을 다시 연장할 수 있어요. 남자 선배들은 직장도 구하고 집도 구해서 독립해 살기도 하죠.

이든아이빌에서 살 때, 윤성이에게도 '엄마'가 있었다. 때로는 '선생님'으로도 부르고, 어떤 때는 '이모'라고도 불리는 사회복지사들. 되도록 일반의 가정과 같은 환경에서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이든아이빌은 아이들에게 개인 방을 주기도 하고, '형제'가 같은 방을 쓰기도 했다. 밥도 '중앙 공급'이 아니라, 방마다 엄마가 따로 밥을 만들기도 하는 시스템으로 이든아이빌은 운영됐다.

화성영아원 초기 사진. 1950년대
화성영아원 초기 사진. 1950년대

돌아갈 수 없는 집, 늘 돌아갈 수 있는 가족

- 참, 자기 소개가 늦었네요. 요즘 윤성 씨는 어떻게 지내고 있죠?

“현재는 (한성대) 컴퓨터공학부 다니다가 지난해 2학기에 휴학했어요. 열심히 달려왔으니까 좀 쉬고 싶었죠. 반년 정도 친구들도 만나고, 놀러도 다니고. 현재는 홀서빙 알바도 하고 있어요. 프로그래밍 언어나 웹디자인, 코딩도 따로 배우고 있죠. 잘 따라가야 하니까. 전공적성은 잘 안 맞는 것 같기도 해서 고민인데, 다른 길로 가기엔 늦은 것 같아서 더 열심히 해보려고 하고 있어요. 어릴 때부터 같이 놀던 친구들은 대개 다 군대 갔으니까 저보고 '군대 오라'고 그러는데, 됐다고 그래요.(웃음). 복학도 해야하고, 자격증도 따야하니까 할 일이 많죠.”

- 하고 싶은 일도 많겠군요.

“많죠. 여행을 다니고 싶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아요. 다닌다면 주로 다른 나라? 일본도 가까우니까. 동남아는 더우니까 좀 패스하고, 미국이나 유럽 같은 데도 가고 싶죠. 헬스나 수영 같은 것도 하고 요즘엔 개인크리에이터도 많이들 하니까 동영상 편집 이런 것도 흥미가 있어요.”

- 중고등학교 시절에 특별히 좋아했던 것이나 관심 있는 쪽이 있었다면?

“저는 무난하게 공부하고, 진학의 꿈을 갖고 공부를 해왔어요. 학원도 가고, 봉사자분들과 과외도 하고. 그러다보니까 사실 아이들하고 같이 지낸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 거예요. 다른 친구들이나 동생들은 다양하게 뭐든 배우러 다니기도 하고 그랬거든요. 자원봉사자들과 1대1로 연결되어서 과외처럼 하거나, 축구 수영 미술 같은 활동도 여러 번 바꾸어가며 활동하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 그 당시에 자원봉사자의 집에 가서 하룻밤 자고 오거나, 함께 여행을 가는 일도 있었죠. 말하자면 다른 문화와 만나는 건데, 어떤 게 기억에 남아요?

“강릉에 갔던 기억이 있어요. 자주 갔던 거 같아요. 어릴 적엔 더. 자원봉사자들과 시간을 맞춰 함께 움직이면서 해수욕장도 가고, 고기도 구어먹고, 산도 오르고요. 담력 훈련 같은 것도 했어요. 밤에 어디까지 갔다 오는 건데, 중간에 선생님들이 숨어있다가 깜짝하고 나타나시는 거죠. 그런 게 가끔가끔 생각나죠. 친구네를 가거나 자원봉사자네 가서 자기도 하죠. 그런데 우리랑 다른 거는 사람 수가 다른 거? 다른 거는 '다 가정이구나' 하게 되죠. 차이 같은 건 못 느꼈어요.”

'차이를 못 느낀다'는 건 그만큼 자연스럽게 이곳이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소영 원장은 아이들의 아침밥으로 세 가지를 준비하던 집 이야기를 썼다. 샌드위치와 김밥 그리고 콘푸레이크. 아이들이 각자 원하는 바대로 선택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아이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 대답으로 나온 건 침대였다. 방마다 그 침대를 넣어주려 노력했던 것도 이든아이빌이었다. 정서와 학습에 더하여 가족관계프로그램, 자립지원 등에 이르기까지 전문적 영역의 선생님들이 촘촘한 계획을 세우고, 상의하고 진행하고, 평가하는 일상이 지속되는 것이다. 선생님이면서 엄마면서 삼촌이면서 이모인 이들에게 이것은 일인 동시에 소명이기도 하다. 그리고 윤성씨에게도 '친구들'이 있다. 집 안에 형제이면서 친구들이고, 밖에도 친구이면서 형제가 된 이들.

이든 아이빌 임직원들. 입양의날 대통령표창 수상 뒤 기념사진
이든 아이빌 임직원들. 입양의날 대통령표창 수상 뒤 기념사진

화성영아원에서 이든아이빌까지, 변하지 않은 건 사랑

“미운 정도 정이잖아요. 좋은 일이 있으면 축하해 주고, 안 좋은 일이 있다고 하면 우리도 같이 화가 나죠. 우리들이 쌓아온 시간들이 있잖아요. 우리는 가족이었으니까.”

- 이형숙 원장님도 기억나요?

“저희는 왕할머니라고 불렀어요. 당시에는 연로하셔서 저희를 직접 돌봐주신 건 아니고요. 이곳에 큰나무들도 있고, 정원도 있던 기억이 나요. 마당도 넓어서 여기로 저기로 뛰어 다니면서 놀았죠. 당시엔 거실로 나가면 모든 아이들을 다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건물들이 서고, 방들로 쪼개지면서 점차 아이들을 다 볼 수 없는 거예요. 그런 게 저는 아쉬웠어요. 공부한다고 집에 있는 시간이 적었거든요. 애들이랑 같이 못 지낸 거 그게 제일 아쉽죠.”

기자는 특별한 어떤 삶이 윤성씨에겐 따로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었을까? 그런 게 아니었다. 그에게도 우리들과 나와 똑같은 삶의 과제가 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도 그를 걱정하는 친구들, 늘 관심을 갖고 기억하면서 찾아오면 도움이나 조언을 줄 수 있는 가족들이 거기 건재하고 있었다. 1950년에 세워져 57년부터는 어디 이사도 가지 않고 있는 집이니, 어찌 보면 그는 더욱더 든든한 집을 갖고 있는 이인지 모른다. 독립해도 돌아갈 곳이 있는, 내가 살아왔던 집과 관계를 맺었던 이들. 집을 떠난 아이가 오면 언제든 그를 기억해 주었다가 환대해주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도움을 주려는 사람. 그 사랑을 나누는 관계, 그걸 우리는 친구요 가족이라고 부른다.

·이든아이빌(구 화성영아원) : 서울 성동구 왕십리로21라길 11
·전화: 02)2292-0421 / www.edeni.or.kr

 

고 이형숙 원장(왼쪽)과 이소영 현 이사장.
고 이형숙 원장(왼쪽)과 이소영 현 이사장.

“아이들이 가족 만드는 꿈 꿔요”

고 이형숙 원장님은 2008년 11월 27일 93세로 타계했다. 화성영아원(和成영兒院)을 지을 때, 마당을 넓게 하고, 목련과 라일락 등 나무를 많이 심고 가꾸었다. 아이들에게 늘 곱고 따뜻한 옷을 입혔다.

1984년 국민훈장 석류장, 1994년 성동구민 대상을 받았다. 따님 이소영은 바이올린을 전공한 음악도다. 어머니의 삶과는 다른 길을 가리라 했지만, 어머니가 떠나면서 운명처럼 그 일을 맡았다. 아이들이 누구든 하나쯤의 악기를 연주할 수 있도록 도왔다. “어른 천사를 보려한다.”는 게 이소영 이사장의 꿈이었다.

최근엔 이제 막 독립을 시작한 아이들(2000년에 영아원 법이 바뀌어 화성영아원도 아동들을 18세 독립때까지 맡을 수 있게 됐다) 2010년 시설명을 바꾼 이든아이빌에서는 이제 막 청년들이 독립하고 있다. 그 아이들이 자신의 가족을 이루고, 이전의 가족 '이든아이빌'로 인사를 하러 오는 모습을 보는 것. 이건 이소영 이사장의 가장 최근 꿈이다.

【원동업=성수동 쓰다 편집장】
3bigpicture@naver.com





















고 이형숙 원장님은 2008년 11월 27일 93세로 타계했다. 화성영아원(和成영兒院)을 지을 때, 마당을 넓게 하고, 목련과 라일락 등 나무를 많이 심고 가꾸었다. 아이들에게 늘 곱고 따뜻한 옷을 입혔다.
1984년 국민훈장 석류장, 1994년 성동구민 대상을 받았다. 따님 이소영은 바이올린을 전공한 음악도다. 어머니의 삶과는 다른 길을 가리라 했지만, 어머니가 떠나면서 운명처럼 그 일을 맡았다. 아이들이 누구든 하나쯤의 악기를 연주할 수 있도록 도왔다. “어른 천사를 보려한다.”는 게 이소영 이사장의 꿈이었다.

최근엔 이제 막 독립을 시작한 아이들(2000년에 영아원 법이 바뀌어 화성영아원도 아동들을 18세 독립때까지 맡을 수 있게 됐다) 2010년 시설명을 바꾼 이든아이빌에서는 이제 막 청년들이 독립하고 있다. 그 아이들이 자신의 가족을 이루고, 이전의 가족 '이든아이빌'로 인사를 하러 오는 모습을 보는 것. 이건 이소영 이사장의 가장 최근 꿈이다.

출처 : 성광일보(http://www.sgilb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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