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의 노포] 뚝도시장 성수커즈펫 신윤식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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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의 노포] 뚝도시장 성수커즈펫 신윤식 대표
  • 원동업 기자
  • 승인 2021.07.29 15: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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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소 굶는데, 동네일 먼저'던 소년, 수처작주 입처개진의 삶
열대어에서 애완견까지, '확실하게 편안하게' 상인 정신 그대로
20년 전인 2001년 6월자 를 들고있는 신윤식 대표. 성동신문이 창간된 그 해다.
20년 전인 2001년 6월자 를 들고있는 신윤식 대표. 성동신문이 창간된 그 해다.

 

성동신문이 이번 호로 20주년을 맞는다. 그 의미에 맞게 '특별하면서 평범한 우리 주변사람의 모습'을 싣고 싶었다. 신윤식 대표를 만난 뒤에 생각했다. '우주엔 기운이 있구나! 간절히 바라는 것은 슬그머니 다가와 그 모습을 드러내는구나!' 

신대표가 <활어 수족관 뉴스>를 보여주었다. 20년 전인 2001년 5월 26일, 이곳 성수이로 대로변에 '제일아쿠아룸'을 이전 개업한 소식이 실렸다.(당시 188호를 냈던 이 타블로이드판 신문은 여전히 지금도 월간지로 발간되고 있단다) 열대어와 금붕어 그리고 수족관을 취급하던 그의 아쿠아룸은 이제 애견 관련 용품을 주로 취급하지만, 그의 가게엔 여전히 수족관도 있고 바깥엔 지저귀는 새들도 있다. 그곳서 62년생 신윤식의 일과 삶 살아온 땅들에 대해 물었다.

- 성수 커즈펫을 운영하시기 전엔 '제일 아쿠아룸'을 운영하셨군요.
“60~70년대에 수족관은 평창동 성북동 장충동 저택에서만 주로 주문했죠. 그러다 80~90년대 들면서 경제가 성장하고 많은 집들이 수족관을 들여요. 1만달러 시절엔 수족관, 2만달러엔 골프, 3만달러엔 승마, 4만달러엔 요트…. 뭐 그런 얘기도 있죠. 스텐레스 골조에 콜타르랑 실리콘으로 마감한 것이었는데, 그 기술도 점점 발달해 왔고.”

◆60~70년대 번성하던 아쿠아룸, 이젠 애견애묘로 바뀌어

- 하긴 어렸을 적엔 저희 집에서도 작은 어항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반상회도 했잖아요. 통장 반장 집서…. 그러면 그 집을 보고 다음날엔 이집저집서 또 샀죠. 수족관가게도 엄청 많았어요. 요즘은 서너 집 걸러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데 그땐 열대어라고 할까? 공공기관 같은 데서도 대형 수족관을 둔 곳이 많았고. 저는 수족관을 설치해주고, 그 관리를 맡는 방식으로도 영업했어요. 지방서도 요청이 많았는데, 거기까지 가기 어려우니까 서울과 수도권만 맡아서 했어요. 국민연금관리공단 지사들, 대한생명 지점들 맡으면서 정말 바쁘게 보냈죠. 이제는 대개 다 비워졌어요. 애견애묘 쪽으로 바꾸지 않았으면 지금은 정말 어려웠겠죠!”

- 시대가 바뀌었지요. 오랜 동안의 사업에서 오신 판단의 기준도 있으실 듯합니다. 
“커즈펫으로 바꿀 당시 제가 3호점인가 4호점인 가 그랬어요? 혜택도 많이 입었고. 무엇보다 좋은 게 가맹점 제품이 아니어도 더 좋은 게 있으면 쓸 수가 있죠. 눈치를 주지도 않으시고. 그래도 본사 제품을 30% 이상 유지해요. 매출도 꽤 높죠. 처음엔 포스기계 쓰는 일도 어렵고, 제품군이 천여 가지가 넘으니까 배우는 데 두 달쯤 걸린 거 같아요. 딸아이는 금방 배우던데.”

신 대표는 관상어 관리사다. 부산서 수화학 등 물공부를 한 뒤 1기 관리사가 됐다. 물을 보고 맛을 보면 대략 물의 ph값이 나온다. 
“물이 좋아야 하는데, 그게 꼭 맑다고만 좋은 게 아니거든요. 아마존강, 니그로강은 흙탕물, 불랙워터로 불리는데, 그게 나무가 오래돼 썩으면서 우러난 물이거든요. 건기에 바싹 물이 마른 흙탕물에 고기들이 새끼를 되게 많이 낳아요. 그 시기를 지나고 우기가 오면 거기 물이 스며들면서 물고기들이 번성하는 거죠.”

그의 가게 성수 커즈펫에는 견공들의 의식주 관련 용품이 대개 있다. 작은 집도 있고, 먹거리도 주식과 간식이 다르고, 옷과 목걸이도 다양하다. 곁에는 애완묘 용품들 그리고 여전히 열대어 용품들과 새들의 모이와 장(집)도 있다. 그의 집엔 오랜 동안 애어, 애조, 애묘, 애견인들이 드나들었다. 그 중엔 그냥 신 대표랑 인사를 나누고자 들어오는 이들도 여럿이다. 그의 집이 편안한 건, 그가 늘 편안하기 때문이다. 일에서든 관계에서든.

◆'혹독하게 아닌 확실하게' 일 배워 평생의 자산을 삼다

- 아쿠아룸과 처음 관계를 맺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시죠.
“저는 가평서 나고 자랐어요. 워낙 궁벽한 곳이라 어머니가 주장해 남양주 마석쪽으로 옮겨갔어요. 제가 열 살 때. 거기가 평산 신씨가 많이 사시는 마을. 가보니 거긴 동네에 버스도 다니고, 전기도 들어와 있고, 사람들이 나보다 다 똑똑해 보였어요.(웃음) 그래서 긴장을 하고 지냈죠. 5학년 때, 보통은 6학년이 하는데, 부락반장이 됐어요. 아이들 모아 학교에도 가고, 아침엔 동네청소도 하고 그런 역할이었죠. 부모들이 농사짓기 바쁘니까 어린애들 살피고 그러는 거죠. 1학년 앞에 서고, 우리가 뒤에 서고. 그 뒤 4H라고 아세요?”

머리(Head 지성)와 가슴(Heart 영성)과 손(Hand 노동)과 몸(Health 건강)의 4H의 역사는 유구하다. 19세기 미국서 시작돼 1914년에 미전역에 조직됐고, 세계 각국에도 퍼졌다. 우리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를 통해 소개됐고, 1948년부터 흥농회-농촌청년구락부 등으로 번져갔다. 우리는 13세부터 29세까지를 포함해 영농후계자로 연결되는 관민 협동 프로젝트였다. 그는 4H의 리더 즉 청년회장이 된다. 

“당시 예금금리가 10~15%쯤 하던 때인데, 영농후계자에겐 1.5~2% 저리로 돈을 빌려주는 거죠. 축사는 제가 지었고, 비육우 살 돈을 대출받아 소를 기른 거죠. 참깨, 고추, 벼농사도 지었는데, 땅이 없으니까 별 소득은 안 되고. 축산은 가능성이 있다 본 거죠. 당시 아버지가 돌아가신 터라 열심히 했는데, 결국은 돈은 많이 못 벌고 처분됐죠.”

이유는 군입대. 동네서 근무할 줄 알았던 예상이 빗나갔다. 어머니가 축사를 맡았지만, 사료값도 오르고 소값은 하락했다. 제대를 했을 때, 친구들은 여럿 마을을 떠나있었다. 그때 동네에 개발위원회가 조직돼 있었다. 이장, 부녀회, 노인회, 반장과 새마을지도자 그리고 그 청년회장까지 소속된 마을조직. 동네 송천3리 새마을지도자였던 주정식 사장은 이곳서 열대어 부화장을 열고 있었다.
“한국서 제일 큰 곳이라 했죠. 거기 자주 놀라가 소일하곤 했는데, 저를 서울로 소개시켜 줬어요. 뭐든 배워야지 하시면서.”

그래서 가게 된 곳이 용두동의 제일공판장(대표 조봉제). 수족관과 부자재들, 관상어들 일체를 취급하는 곳이었다. 일이 많고 많아 겨우 1개월 혹은 채 6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직원들이 바뀌는 곳이었다. 신대표는 그곳에서 '혹독하게'가 아니라 '정확하게 확실하게' 일을 배워갔다.

“처음 가니까 화장실 청소부터 시키더군요. 시골서 농사일하며 자란 사람 장점이 있어요. 거친 일을 두려워도 않고, 일을 잘한다는 거. 청소해 놓고 칭찬을 기대했죠. 근데 한 삼십분쯤 혼내는 거예요. 그리곤 시범을 보여요. 면도칼로 오줌으로 노랗게 돌이 된 부분을 다 긁어내요. 내가 이를 악물었어요. 새벽 5시부터 일을 시작해 지방에도 무수히 가고….”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 4H서 만났던 고교생 문승옥은 아내가 돼 있고 아이들도 생겼다. 그에겐 돈이 없었으므로, 보여야 할 것은 지혜요 땀이었다. “탁월한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던 그는 농부의 성실성과 기술 그리고 부락반장과 청년회장으로 단련된 헌신을 보여주었다. 조봉제 사장은 그가 결혼해 석관동서 출퇴근을 할 때 차량을 지원해주고, 8년 만에 독립해 93년 성수동 뚝도시장으로 이사와 개업할 때도 물심양면 지원해 주었다.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란 말은 신윤식 대표에게 어울린다. 그는 선 곳마다 주인이 되었다. 그가 선 곳은 마을이 되고, 진지한 삶의 터가 되었다.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란 말은 신윤식 대표에게 어울린다. 그는 선 곳마다 주인이 되었다. 그가 선 곳은 마을이 되고, 진지한 삶의 터가 되었다.

◆좋은 마을 가꾸는 것이 가족과 몸담은 가게 위하는 길

- 새들 지저귐과 몸짓이 맘을 편안하게 합니다. 물고기들도 활발히 뛰어놉니다. 자식농사도 잘 지으셨겠습니다. 
“첫아이가 다운증후군이예요. 염색체 21번 개수가 하나 더 많죠. 올해 스물일곱인데, 아이 어릴 때, 특수교육 받는다고 많이 힘들었어요. 다닐 곳은 다 다녔을 거예요. 근데 지금은, 아마 직업이 있어서 그럴 건데, 굉장히 잘 지내요. 합기도도 스무 해 넘게 했죠. 일요일이면 교회 가서 신앙생활을 하고, 강아지 데리고 산책도 다닙니다. 그 아이들만의 즐거움이 있어요.”

아들 동준 군은 성동장애인종합복지관서 바리스타로 일한다. 시설내서 직업교육을 받았다. 뚝도시장 근처 비호체육관서는 합기도를 한다. 송정제방을 산책한다. 딸 지오 양은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하고, 학교서 취업에 도움을 주어 (코로나로 현재 돌아와 있지만) 미국서 자리 잡았다. 올해는 결혼 30주년인 신 대표는 아내를 홀로 3박4일로 여행도 보내주었다. 아이들과 남편이 가면 '짐'이라면서. 

- 뚝도시장에서 상인번영회(회장 김미정) 일을 오래 하고 계시죠? 축구회에서도 활동하시고, 라이온스클럽서 봉사활동도 해오셨고. 
“번영회에선 현재 부회장이죠. 뚝도축구회는 삼십 년 동안 해왔고. 회장 어려운 줄 아니까 여전히 잘 도와서 같이 하죠. 해외서 라이온스 클럽서 지은 학교 같은 걸 봐요. 기쁘죠."
-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마을일을 하신 거죠. 우리들 삶이란 게 대개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쁜데. 쉽지 않은 길을 그렇게 꾸준히 하신다는 게 놀랍습니다.

“그게 팔자라고요.(웃음) 어머니도 그러셨어요. 우리집 소는 굶고 있는데, 큰아들이란 게 늘 바깥일부터 먼저 한다고. 아내도 시시때때로 '쎄게' 말을 해요. 장을 맡으면 '이혼하겠다'고 엄포를 놓죠.”
그는 성동장애인복지관 장애아부모협의회서 책임을 맡고 있다. 뚝도시장 상인대학에선 학생회장이 됐다. 여러 사람이 그를 추대했다. 대개 그래 왔었다. 그 책임감이 아니더라도 그는 매주 화장실 청소를 했을 것이었다. 그는 겪고 느낀 시장의 성장과 변화에 대해 발표도 했다. 3천여 명이 모인 군산에서의 시장경진대회, 서울시대표로 나간 그는 우수상을 받았다. 

“예전엔 시장 수가 적고 인구는 많았던 시대였죠. 지금은 다르잖아요. 예전 그대로면 안 되죠. 나는 내가 먼저 변하고, 솔선수범하려고 해요. 욕먹더라도 해야할 일을 해야하고. 정당한 일을 해도 욕먹는 건 당연한 거니까. 나중에 그분들도 인정을 하시겠지 생각하면서.”

그는 평산 신씨다. 고려를 세운 왕건을 대신해 전투에서 죽었던 신숭겸 장군이 평산 신씨의 시조. 신숭겸은 한 사람 왕건을 위해 죽은 게 아니었을 것이다. 새로운 나라에 대한 신념이 있었을 것이다. 나를 죽이여서야 우리가 오래 살 수 있다. 가족을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은 어쩌면 좋은 마을을 만드는 데서 시작할 수 있다. 

왕건은 신승겸의 잘려진 목 대신 황금두상을 더해 그를 묻었다. 무덤은 황해도와 강원도 그리고 충청에 나눠 조성됐고, 각 터에는 3개의 묘들이 섰다. 그는 죽어 아홉 무덤과 하사된 땅들과 그를 여전히 흠모하는 후손들로 남았다. 신윤식 대표가 집안의 울타리로, 믿을 만한 동네가게로 그리고 마을서 친구로 대장으로 삼을 이웃이 된 것처럼.
성수 커즈펫 : 전화: 02)463-7638 주소: 서울 성동구 성수2가1동 335-72[성동구 성수이로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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