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흐름 보여주는 일터. 우리사회 변화의 모습 생생하다
성동구는 일하는 사람들의 땅이었다. 성문밖 사람들의 터는 논과 밭이요, 공장과 가게였다. 너른 배추밭이 있던 성수동은 아직도 준공업지역이다. 지금 핫한 성수동의 여러 장소들은 이전엔 창고였거나 공장이었다.
이 일터는 지붕이 높고 중간 기둥이 없어 넓었고, 생산과 유통의 기지가 되었다.
마장동 축산물시장 같은 곳엔 우시장과 도축장이 있었다.
왕십리와 행당, 금호 등지에 산재했던 수제화와 인쇄, 철공소와 정비소 등은 도심형 기업들이었다.
성동 사람들이 이 안에서 돈을 벌고, 우정과 친교를 쌓아갔다. 일터는 성동의 삶의 현장이었다.
사진1은 성수동의 통장님 댁이다. 부지런한 통장님 집은 동시에 그 분의 일터였다. 당시엔 사무소 현판도 달아주었다. 그 집은 세탁소인 동시에 복덕방 그리고 필름집(당시엔 필름을 산 곳서 현상과 인화도 맡았다)이다.
사진2는 1930년대의 사진이니 당시의 주력산업이 무엇이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성수동에도 큰 농원들이 여럿 있었다는데, 왕십리에도 제일농원이 있었다. 당시 농원은 요즘처럼 꽃을 중심으로 파는 게 아니라 농장을 대상으로 채소와 농작물 그리고 나무 등을 길러 팔았다.
사진3의 뒤편으로 굴뚝과 철조망 그리고 망루로 쓰일 법한 건물이 보인다. 두 명의 젊은 부부가 다정하게 포즈를 취했는데, 그들은 농부요, 그들은 대대로 농부 가문이다. 중랑천을 옆에 둔 이곳 송정동은 농사짓기에 좋은 땅이었을 것이다. 사진을 제공한 김채선 님은 3대가 함께 농사를 지었다는데, 이 땅이 그들의 일터였다.
사진4 산업시찰단은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고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된 것을 보여준다. 당시엔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세우고, 온 나라 국민들은 “잘 살아보자!”는 구호와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를 부르며 일터로 갔다. 동궁다실은 한양대 정문 앞에 있던 '당시의 카페'였다.
사진5는 아버지 일터로 구경 간 남매가 과자봉지를 득한 뒤 찍혔다. 드럼통과 레코드1900 자동차로 미루어 이곳은 자동차 관련 업소였을 터.
레코드1900은 새나라자동차와 신진자동차 그리고 새한자동차 등 우리나라 자동차 역사의 한 장면을 장식한다.
사진6의 여성은 즐거운 식사시간을 맞았다. 점심시간은 직장인들의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그녀가 다니는 회사 오리엔트는 성수동에 있던 큰 공장. 2~3천 명의 직원들이 있었고, 생일을 맞는 직원들을 위해 생일잔치상도 차려주었다.
사진7은 여름인 모양이다. 바퀴가 달린 저 무대는 사진사가 끌고다니는 영업장일 것이다. 사진을 찍은 주인공 옆으로 고무신을 신고, '란닝구' 차림을 한 동료들이 붙었다. 객들이 더 신이 난 모습. 뒤편으로 온통 슬레이트 지붕과 브로꾸(블록) 담장이다.
사진8은 겨울이다. 흙바닥에 군불을 지펴 손을 녹이는 중이다. 마실 나온 동네주민과 나누는 대화는 즐겁다. 많은 연탄을 들여놓으면 긴 겨울 준비가 끝난다.
사진9는 동마장 파출소에 견학을 온 주변 마장동 유아원 아동들 모습이다. 당시 정권은 '정의사회구현'을 내세워 삼청교육대를 만들고 '사회악 척결'을 진행했다. 아이들을 초청해 기꺼이 파출소 안을 보여준 저 파출소장님이야말로 '아이들의 영웅'이다.
사진10의 종로고전의상실은 디자이너의 주문을 받을 만큼 실력이 있고 신뢰가 큰 곳이었다. 깨끼며 비로도며 두루마기, 무용복에 한복까지 두루 맡았던 이 '엄마의 일터'는 '아이들이 자라면서 접혔'다.
코로나 19가 2년여간 지속되면서 이제 '집의 일터화' '집과의 일체화'가 더 심화되고 있다.
일터는 단순히 직장이요 돈벌이의 장소만일 수는 없다. 자아를 실현하는 성소요, 우정을 나누는 친교터요, 이웃들의 교육장이기도 하다. 일터를 어떤 곳으로 만드느냐 하는 것이 우리 삶의 질을 결정적으로 좌우할 것이다.
원동업 성수동쓰다 편집장<iskarma@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