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암자 옹기종기, 옥수동의 아름다운 미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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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암자 옹기종기, 옥수동의 아름다운 미타사
  • 성동신문
  • 승인 2021.09.29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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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원의 엉뚱 발랄 성동 이야기> (32)미타사(彌陀寺)
미타사 건물과 주변의 아파트들. ⓒ서성원
미타사 건물과 주변의 아파트들. ⓒ서성원

○ 소재지: 서울 성동구 옥수동 미타사

◆ 허세 부리지 않고 다가오는 매력 만점 미타사

언제였더라. 미타사를 찾아갔었다. 성동구에 이사를 오고 나서 한참 뒤였다. 시내에 절이 있다는 게 신기했고 겨울이었다. 도심에 있는 절이라고 해도 겨울은 겨울이었다. 눈 내리면 설경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절을 구경했었다. 
그리고 이번 여름, 미타사를 다시 찾았다. 성수동에서 13번 마을버스를 탔다. 마을버스는 옥수역이 종점이다. 13번 마을버스가 사라진다는 말을 들었다. 아쉽다. 계속 운행하면 좋겠다.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절 중에 가장 인상적인 곳은 운주사다. 파격이었다. 그리고 선암사가 있다. 순천이던가. 가정집 같은 건물들이 인상적이었다.
미타사도 약간은 선암사 같은 분위기다. 일반적인 절은 웅장한 대웅전이 있고 그 앞에 마당이 있다. 마당 양쪽에 돌을 깎아서 탑을 세운다. 그리고 요소요소에 반듯한 건물들이 자리를 잡는다. 미타사는 전혀 아니다. 중심이 되는 큰 건물이 없고 널찍한 마당도 없다. 
천불전은 덩치가 큰 편이지만 다른 절에 비하면 아니다. 산골짜기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양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작은 건물들이 하나의 암자라는 것. 암자가 무려 8개나 된다. 그 암자들이 자기 편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암자에서 암자로 가는 길은 산동네 골목길처럼 구불구불하다. 그래서 친근하다. 암자를 돌아보려면 어쩔 수 없이 숨바꼭질이 놀이가 된다.

◆두뭇개 나룻터 주모와 미타사 노스님

조선 시대쯤 되겠다. 두뭇개 나루터 주막에 새 주모가 왔다. 몇 년쯤 지나자 주모를 찾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 
미모가 빼어나서? 그렇지 않았다. 주모는 들창코에다 곰보였다. 술꾼들이 붐비는 까닭은 외상술이었다. 외상으로 마시고 술값을 계속 미룬다. 그러면 주모는 그걸 까먹었다. 주모는 장부를 적을 줄 모르는 까막눈이었던 것이다. 부지런히 일했지만 주모의 살림살이는 늘 거기서 거기였다. 
어느 해부턴가 주모가 술상을 내놓으면서 뭔가 입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염불 비슷했다. 동네 가까이 미타사(彌陀寺)가 있었지만 주모는 절에 다니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한강처럼 흘러갔다. 주모에게 기이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두모포에 큰 배가 닿으면 주막에 술꾼이 꽤 많아지는데, 이때 주모는 눈을 감고 앉아 중얼거렸다. 그러면 부엌에 둔 술상이 손님 앞에 놓였다. 매번 그런 건 아니지만 말이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믿지 않는 이가 많았다. 그걸 확인하려고 찾아오는 사람까지 생겼다. 소문은 미타사 노스님 귀에도 들어갔다. 노스님이 한걸음에 달려왔다. 주모의 손을 마주 잡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장하십니다. 해내셨습니다. 제가 알려준 염불, 계속하십시오. 뜻을 이룰 겁니다.”
주모가 중얼거리는 것은 염불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게 어떤 염불인지 궁금했다. 
그리고 며칠 후, 술꾼들이 밀려들었다. 주모가 주문처럼 염불을 외었다. 중얼중얼.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일까.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주모가 외는 염불이 엉터리라는 것을. 그래서 더 큰 기적을 이루라고 주모에게 바른 염불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 미타사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888년(진성여왕 2)대원(大願)이 창건하였으며, 1115년(예종 10)에 봉적(奉寂)과 만보(萬寶) 두 비구니가 지금의 금호동 골짜기에서 종남산(終南山)으로 절을 옮겨 극락전을 창건하였다.
1824년(순조 4)대원(大願)이 무량수전을 짓다가 3년 만에 입적하자, 그의 상좌 환신(幻信)이 뒤를 이어 1827년에 완공하였다. 1862년(철종 13)인허(印虛)가 화주가 되어 조대비(趙大妃)의 하사금과 조진관(趙鎭寬)의 부지 기부로 극락전을 다시 짓고 요사를 수리하였다.
1873년(고종 10) 비구니 성흔(性欣)이 불전과 요사를 고쳤으며, 1928년에는 선담(仙曇)이 7층 석탑을 세웠다. 1933년에는 주지 돈형과 화주 이경화(李京華), 전경각 등이 산신각을 중수하였고, 1938년에는 화주 안성훈(安性勳) 등이 무량수전을 중수하였다.
부속 암자로는 대승암과 칠성암, 금보암·금수암·정수암·용운암·관음암·토굴암 등 8개가 있다. 사세가 번성할 당시에는 모두 9동 66칸의 건물이 있었다.
유물로는 1883년(고종 20)에 조성된 칠성탱화를 비롯하여 1887년에 학허(鶴虛)가 그린 아미타후불탱화와 현왕탱화, 감로왕탱화·신중탱화·지장탱화, 1900년(광무 4)에 보암(寶庵)이 그린 신중탱화와 아미타후불탱화가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미타사 금보암 금동관음보살좌상(彌陀寺 金寶庵 金銅觀音菩薩坐像). 조선시대의 금동불.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17호. 높이 35cm. (사진 출처-불교신문)
미타사 금보암 금동관음보살좌상(彌陀寺 金寶庵 金銅觀音菩薩坐像). 조선시대의 금동불.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17호. 높이 35cm. (사진 출처-불교신문)

금동관음보살좌상은 크기가 작다. 35cm니까. 하지만 감동은 결코 작지 않다. 왜 그럴까. 불상을 바라보면 뭔가 편안해진다. 까닭은 불상의 자세에 있다. 

불상은 윤왕좌를 취하고 있다. 왼쪽 다리를 접어 안쪽으로 당기고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이러한 자세를 윤왕좌(輪王坐, Rajalilasana)라고 한다.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에 유행했던 형태다. 윤왕자 보살좌는 우리나라에 흔하지 않은 불상이다. 전남 《강진 고성사 청동보살좌상》(보물 1841호), 전남 《해남 대흥사 금동관음보살좌상》(보물 1547호), 호암미술관 소장 금동관음보살좌상, 북한 금강산 내강리출토 금동관음보살좌상, 국립중앙박물관의 금동관음보살좌상만 남아있다. 미타사 금보암 금동관음보살좌상은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제작 시기는 조선 전기로 추정한다.

이 외에도 미타사에는 미등록 문화재가 있다고 한다. 관련 기관에 감정을 의뢰해서 문화재로 등록하면 일반인에게 공개할 것이라고 한다.

부추꽃이다. 화단에 부추를 심었는데 이처럼 꽃이 피었다. 무량수전 앞이었다. 얼마나 소박한 절인지 알고도 남는다.  ⓒ서성원
부추꽃이다. 화단에 부추를 심었는데 이처럼 꽃이 피었다. 무량수전 앞이었다. 얼마나 소박한 절인지 알고도 남는다.  ⓒ서성원
소원은 이뤄졌을까. ⓒ서성원
소원은 이뤄졌을까. ⓒ서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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