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재지: 서울 성동구 성수동 뚝섬나루
성수동의 진짜 이름은 '뚝섬'입니다. 이것을 기록할 때는 한자로 '독도((纛島)'라고 적었습니다. 뚝섬은 강원도와 경상도로 오가는 사람들이 드나들었습니다. 그곳이 뚝섬나루입니다. 뚝섬나루 옛 모습을 알아보려 합니다.
◆ 영동대교가 생겨나기 전까지 하루 500명이 이용하던 뚝섬나루
뚝섬나루를 취재하면서 조금은 놀라웠다. 영동대교가 건설되기 전까지 나룻배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인데 나는 그랬다. 그렇다면 영동대교가 언제 만들어졌는가. 1970년 8월 13일 착공해서 73년 11월 8일에 준공한다. 그러니까 그전까지는 나룻배로 한강을 건너다녔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로 이용했을까. 1964년 신문 기사를 보자. 뚝섬나루와 청숫골나루 사이에 일일 평균 5백 명 정도가 이용했다고 한다. 운영 시간은 새벽 4시부터 밤 11시까지. 이른 시간부터 밤늦게까지 운영했다.
나룻배는 어느 정도 크기였을까. 폭 5m, 길이 12m의 목선(木船)이다. 뗏목처럼 생겼다는 얘기도 있다. 여기엔 사람만 타는 게 아니다. 가축과 자동차까지 실었다.
나룻배에는 채소가 많이 실렸다. 청담리, 대치 마을 같은 곳에서 재배한 채소였다. 채소가 뚝섬나루로 나와야 하는 까닭이 있었다. 강남의 채소를 싣고 뚝섬으로 나와야 동대문 시장으로 갈 수 있었다. 뚝섬에는 동대문으로 가는 궤도차(기동차)가 있어서 동대문시장에 가려면 나룻배를 이용하는 게 나았기 때문이다. 채소를 파는 아낙네들이 많이 이용했다. 도선료는 4원이며 도강(渡江)하는데 10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에 70년대가 되면 배삯은 어른 20원, 학생은 10원이 된다. 오토바이는 10원추가 해서 받았다. 이 무렵 뚝섬에서 태어나 자란 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개인이 배를 운행해서 돈을 번 사람이 있었다.
1969년 말에 한남대교가 개통했는데 시내버스 노선이 없어서 주변 시민들은 겨울철에는 얼어붙은 강을 걸어서 건넜다고 한다. 해동이 되면 나룻배를 타야 했다고 한다. 서울에서 유일하게 남아있었던 나룻배.
◆ 조선 시대에 뚝섬나루는 세곡선이 드나들던 곳
조선 시대에도 세금은 내야 했다. 세금을 곡식으로 내기도 했다. 이것은 '세곡'이라 했다. 경상도나 강원도에서 받은 세곡을 한양으로 운송할 때 뚝섬나루가 역할을 했다고 한다. 뚝섬나루터에 세곡선(稅穀船)이 드나드는 선착장을 두었던 것이다.
조선 시대 후기로 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강원도에서 뗏목이 내려와 목재를 뚝섬에 하역하게 된다. 조정에서는 세금을 걷기 위해 뚝섬나루에 관리를 파견했다고 한다.
현재 강남구에는 봉은사가 있다. 불교 33대 사찰 중 하나라고 한다. 조선 시대에도 봉은사에서 불공을 드리려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도성의 부녀자들이다. 이들은 역시 뚝섬나루를 거쳐서 청숫골나루로 건너갔다. 첨담나루라고도 한다.
조선 시대에 청숫골 일대에서 잡은 물고기를 청숫골나루에서 뚝섬나루를 거쳐서 강북으로 수송되어 도성 안으로 공급했다고 한다. 게와 붕어는 조정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뚝섬나루에는 나라에서 운영하는 배는 없어서 개인이 운영하는 배만 있었다. 그래서 배를 이용하려면 당연히 배삯(통행료)를 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