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고지신, 사라진 것들 기억하고 새로운 삶 여는 자양 삼아야
<제11회 이제는 없는>
1940년대 옥수동 토박이들을 찍은 사진입니다. 뒤편은 달맞이봉입니다. 서울에서도 논과 밭이 있어서 볏짚가리가 높이 오르고, 그 아래 땅을 파고 김장무를 깊이 파묻던 그 풍경들은 이제 우리 곁에 없습니다. 하지만 뒤편 건물은 야학당입니다. 사람들은 예나 이제나 모여서 무엇인가를 하고, 서로 대화를 하며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겠죠. 이제는 우리 곁에 없는 풍경들, 건물과 물건들을 살펴봅니다. 우리가 어떤 길로 가고 있고, 무엇을 잃지 않아야할지 생각해 봅니다. 사진①
사진2의 뚝섬유원지는 여전히 우리들에게 좋은 휴식처요 공원입니다. 당시에 이곳은 서울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서울의 휴가지-강수욕지-였습니다. 옛사진들의 사람들을 볼 때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이제는 사람들도 달라졌(없어지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생기는 것도 있)습니다.
당시의 아저씨들에게는 없는 뱃살이 이제는 많은 우리들이 갖고 있지요. '조금 덜 먹고, 조금 더 움직이는 삶'이 몸에 좋은 줄 알지만, 편리한 시설들과 풍요한 물산 속에서 우리는 '그렇게 살기' 어렵습니다.집에서 치루는 장례도 이제는 우리 곁엔 없습니다.
사진3은 꽃재교회 장로 박인석 님의 운구. 왕십리 감리교회 성가대 가운을 입고 운구를 합니다. 앞에는 도랑물 흐르는 개천이고, 철조망이 있습니다. 안테나도 뒤편 집에 보이는데, 이젠 사진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죠. 죽음이 가까운 시절엔 '삶이란 게 끝이 있다는 것'을 더 선명하였겠습니다.
사진4의 풍경은 철길에도 사람이 다니던 시대의 모습입니다. 성동엔 당시 기동차길, 전찻길, 이렇게 중앙선 경원선과 연결된 철로도 일상의 삶 안에 있었습니다. 위험도 늘 가까이 있었겠지만, 당시엔 모든 것의 속도도 조금 더 느렸었죠. 너무나 빨라져버린 우리 시대에서, 우리는 어디로 그렇게 빨리 달리고 있는지요.
사진5는 마장동에 있는 동명초등학교의 졸업식입니다. 눈에 띄는 연통은 난로에 연결돼 있습니다. 당번들은 아침에 조개탄을 퍼 배당받아 왔을까요? 아직 도시락을 싸오던 시절이라 저 난로와 받침대에는 숱하게 양은 도시락이 올랐겠습니다. 브라운관 텔레비전도 이젠 볼 수 없는 물건입니다. 이젠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교육의 현장에서 우리가 전하고 나눠야 할 것-지혜와 사랑과 우정-은 변하지 않아야겠죠.
사진6은 목재소입니다. 성수동 대보빌라 앞이라는데, 어쩌면 강원도 정선 영월에서 내려온 뗏목을 해체한 나무일 수도 있겠습니다. 정선의 팔뚝 장딴지 굵은 사내들이 벌목하고, 솜씨 좋은 뗏목꾼이 엮어 한강물을 타고온 저 나무들은 때로 집이 되고, 때로 다리가 되고, 때로 장작이 되어 우리 곁을 지켜왔겠습니다. 지금은 전세계적에서 무엇이고 종횡무진 수출되고 수입하는 세상이죠.
사진7은 금호동3가 1344번지 일대입니다. 지금은 금호산 아래 금호터널이, 금호동 두산아파트가 마천루를 이룬 곳이죠. 가운데 난 길을 따라 차량이 다니고, 그 사이사잇길로 집으로 들고나는 골목이 있던 이곳은 드라마 <서울의 달>을 찍었던 곳이고, 부산 출신 건축가 승효상이 감천마을을 '산토리니'에 견주면서 언급한 곳이기도 하죠. 시인 함민복은 '금호동의 봄'으로 이 마을 금호동을 영원히 기억할 아름다운 공간으로 남겼습니다.
사진8은 827년에 세워졌다는 안정사(만약 철거되지 않았다면)니, 올해로 993년의 나이를 맞았겠습니다. 신라시대 모습이 그대로 남지는 않았겠지만, 그 절은 그 절이라서 천년의 절이었을 것입니다. 왕십리2동 금호베스트빌 뒤쪽 무학봉에 있던 이 절은 성동구 사람들의 일상에 깊게 파고들었던 전통의 보고였습니다. 철거가 아쉽고 아쉽죠. 철거 중 대웅전 암벽에 새겨진 조선시대 민불 마애불상이 아직 남아있다니, 기회가 되면 찾아가 보시길.
사진9를 찍은 송홍연 님은 이곳 뚝섬경마장에서 36년여를 근무하였다는 분입니다. 사진이 작품처럼 멋진 구도를 갖는 건, 그분이 거기 오래 머물고 가까이 계셨던 분이기 때문일 겁니다. 1989년까지 성수동에 존재했던 이 경마장은 2005년 서울숲이 되면서 성동구를 일신하는 계기가 되죠.
사진10에서 보이는 아파트에 새겨진 동그라미는 서울시의 옛로고입니다. 1970년, 급증하는 인구에 대비해 서울시가 지었던 시민아파트는 당시에 산동네에 주로 지어졌습니다. 응봉동에도 마포 창전동서 무너진 와우아파트 건설시기와 비슷한 때, 아파트가 섰습니다. 짓는 비용 만큼을 들여 아파트는 대개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해체되지요.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 이들은 비극을 반복합니다. 우리가 아파트에 대해, 재개발에 대해 반성해볼 이유입니다. 이미 없어진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