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동업이 만난사람] 10년 서울 청년 이상국의 귀거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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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동업이 만난사람] 10년 서울 청년 이상국의 귀거래사
  • 원동업 기자
  • 승인 2022.02.14 12: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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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열심, 사람에 진심! 10년 서울살이는 지역 삶 위한 좋은 준비
“농촌테마파크 어때요? 고향에서 문화기획자로 다시 시작할 터!”

청년 이상국은 이번 주에 다시 강원도 주문진 향호리의 주민이 된다. 지난 2012년 봄쯤 서울로 이촌향도해온 지 딱 10년만이다. 2012년 당시 그는 스물일곱. 군대도 다녀오고 대학을 졸업하던 해였다. 서울서는 처음 자리를 잡았던 곳이 성수동이었다. 디자인과 일러스트를 하는 누나가 당시 성수동 일러스트학원에서 1년 정규코스(꼭두는 수료후 연구년제와 공동작업실 체제도 운영했다. 해서 많은 예비 작가들이 성수동을 기반으로 주거와 작품활동을 했었다)를 밟고 있었다. 경일초등학교 근처서 집을 얻었다가, 뚝섬역 6번출구 가까운 다세대주택으로도 옮겼다가 옥수-금호동 경계의 산동네로도 이사했으니, 10년쯤 그는 서울시민, 성동주민으로 살았다.
서울서 그는 주로 문화와 예술이 깃드는 공간에서 일했다. 시민들과 함께 하는 프로젝트도 여럿 했다. 그때마다 그는 책이거나 잡지거나를 만들고, 꾸준히 활동과 사고의 흔적을 인터넷 공간에도 남겼다. 그의 10년 서울 성동의 생활을 공유한다. 성동엔 그를 기억하는 이들도 제법 될 것이니…. 

테마파크서 웃던 가족들, 특별한 경험을 일상으로 만들고 싶었던 청년 

- 서울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재작년 7월 여름에 아버지가 쓰러졌다. 뇌출혈로 알았지만, 최종 진단은 뇌종양의 일종인 뇌수막종이었다. 큰 수술을 하고 서울의 국립재활원에서 집중재활도 했다. 현재는 강릉에서 재활의 과정을 밟고 있다. 아버지를 설득하여 서울의 재활병원으로 이끈 사람이 나였다. 재활병원 입원하여 1년을 함께했다. 아버지는 아직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 곧 전입신고도 고향에 할 생각이다.

- 고향은 어떤 곳인가? 
“고향이 강원도 강릉이다. 강릉에서도 북쪽 끝의 주문진에서 살았다. 동해 바다와 산이 접해있고, 동해안에는 바다와 연결된 자연 호수인 석호가 많았다. 내 고향 향호리도 그런 곳이다. 부모님은 그곳 농부였다. 지금도 여전하고.

- 고향 떠나 홀홀단신 서울로 올라오지 않았나. 직업과 직장, 연애와 결혼 그리고 주거와 독립 같은 큰 과제는 청년의 과제였고. 어떻게 생활했을까 궁금하다. 먼저 일에 대해서. 
  “서울에서의 첫 일터가 서울어린이대공원이었다.”

- 대공원이 있는 광진구가 본래는 성동구였다. 거리가 가까워서?
“그런 요인도 있겠지만 일하고 싶은 곳이었다. 문화기획자로서 사는 것, 테마파크에서 다시 일하고 싶었다. 군 제대후 알바를 했던 곳이 에버랜드(예전엔 용인자연농원이었다)였다. 에버랜드 엔터테인먼트팀에서 공연 가이드로 일했는데, 관객들을 위한 이벤트를 만들고 또래들과 함께 일하면서 큰 즐거움과 보람을 느꼈다.”

-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 있다면? 
“직원들을 캐스트라 부르는데 분기별로 자유이용권이 나왔다. 부모님과 외할머니, 외삼촌 등 가족들을 초대해 함께 했었다. 공연도 보고 퍼레이드를 함께 했던 기억이 추억으로 남았다. 현실은 그저 일상의 경험이지만, 이곳에서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그게 정말 즐거운 추억이 된다면, 우리의 일상에 새로운 경험이 만들어지는 것이지 않나? 본질적 가치에선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농촌 테마파크 같은 걸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였다.”

- 졸업후 첫 직장인 어린이대공원 일은 어땠나?
“캐릭터월드라고 복합문화공간이었는데, 키즈 테마파크였다. 공간을 임대받아 운영하고 있었는데, 내가 1년3개월쯤 됐을 때, 경영상 문제로 폐쇄를 맞았다. 다른 부서로 이동할 것인가? 일을 관둘 것인가 결정해야 했다. 전자라면 안정적일 순 있을 테지만, 하고자 하는 일이 아니니까, 후자를 택했다. 다음으로 옮겨간 곳은 캐릭터 상품을 개발하는 회사였다. 캐릭터 라이선싱 사업을 했다. 나는 캐릭터를 테마파크로 조성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으나, 주어진 업무는 기대와 달랐다. 오래 근무하지 못하고 다시 떠났다.”

일에 열심, 사람에 진심! 직장도 마을도 삶의 스승들

2011년 서울시 보궐선거로 당선된 박원순 시장의 슬로건은 '시민이 시장입니다'였다. 그는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마을만들기 사업에 정책의 방점을 찍었다. 북카페나 마을예술창작소 같은 문화예술공간을 지원하고, 대안에너지나 미디어, 마을공동체나 사회적경제 지원을 위한 센터를 짓고, 자발적인 시민 주민 활동을 지원하는 활동이 서울의 마을 곳곳에서 펼쳐졌다. 내가 이상국 씨를 만난 것도 마을에서였다. 그는 성수1가2동의 마을계획단에서도 활동했고, 마을공동체 사업을 하면서 소식지 편집을 맡기도 했다. '청년'은 드물고 귀한 존재였다. 

- 시민영역을 제3섹터라고 한다면, 3섹터서도 여러 활동을 한 것으로 안다. 
“사회적경제 영역의 청년활동가로 시작했다. 서울시 사회적경제지원센터에서 발행하는 사회적경제 뉴스레터의 에디터로 기사 작성, 인터뷰, 편집 등의 기술을 배웠다. 이후 서울시 시민기자로 문화 공간을 찾아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했다. 당시 청년위원회라는 곳에서 정책조사단으로 청년 정책을 조사하는 활동을 지속한 것도 그때 시작됐다. 그때 만났던 친구들이 지금까지 관계를 맺고 있다.”

- 다가치놀자 성수동에서라는 프로젝트도 수행한 게 기억난다. 숲에 가고 마을도서관을 찾고, 주민들 포럼도 만들고. 아마 많은 분들은 지역활동가로 상국씨를 기억할 거다. 대학에서도 일한 이야기도 궁금하다.
“2년 동안 청강문화산업대학교에서도 일했다. 당시 청강은 성수동에 교육실험장격인 청강랩[카페성수]을 열고 다양한 문화예술 강좌도 하고 여러 교육 실험을 했다. 셀프쿠킹클래스, 웹툰워크숍, 과학 북클럽, 하우스콘서트 같은 것이었다. 나는 주1~2일은 카페서, 3~4일은 이천에 있는 대학으로 출근했다.”

- 대학이라는 큰 조직은 무엇이 특히 달랐나?
“도시의 커뮤니티 내에서 조직이 시스템과 체계로 움직인다는 것은 약속과 합의가 중요하다. 큰 조직에는 내부 구성원들끼리 보이지 않는 약속과 합의가 존재했다. 청강에서는 조직 문화를 좋은 방향으로 개선 시켜 나가기 위해 내부적으로 자연스럽게 만들어가는 분위기가 있었다.”

- 조금더 설명해 준다면?
“새로운 문화를 탐방하고 함께 모여 배우려 했다. 사람책이라고 있지 않나. 내부 구성원들끼리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서로 배우고 성장하려는 문화가 확실히 있었던 것 같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경청하는 기술 그런 것들은 사실 사람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건데, 청강에 있을 때는 여러 영역 작가나 교수님들과 협업을 하는 일도 많았고 프로그램에 참여한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배우는 게 되게 많았다. 일하면서 가장 많이 성장한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청년 문화기획자 이상국 씨가 포스팅했던 지난 기사들. 고향 마을의 감자를 팔면서 '감자 오래 보관하는 세가지 방법'은 많은 이들이 읽고 댓글도 달았다. 가는 이제 지역에 내려가 그동안 경험하고 배웠던 것을 실천할 계획이다.

아버지 간병 떠맡아, 고향서 아버지와 함께 일어서는 꿈꿔

상국 씨는 청강 이후 실업급여를 받았다. 그동안 공부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구직활동도 했다. 청소년 진로 관련 교육회사 재취업. 야근이 많고 퇴사자도 많은 곳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쓰러졌다. 

- 직장이 안정적이고, 놓을 수 없는 곳이었다면, 결과가 달랐을까? 그러니까 아버지 간병을 맡지 않았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무엇을 느꼈나?
“사실 내가 병원에서 아버지를 간병하면서 일을 아예 안 한 건 아니다. 친구들과 프로젝트를 계속했었다. 청년으로 내가 아버지 간병을 하면서 일을 할 수 있었던 거는 어떻게 보면 당시 내가 엔(n)잡러였기 때문이었다. 청년으로 일할 수 있는 직업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고 여러 프로젝트를 맡았었으니까. 아버지가 쓰러지시고 내가 간병을 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젝트를 같이 완수 해야 될 책임 같은 게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내가 그 일을 해서 조금 더 성장하지 않았나 싶다. 그럼에도 간병 돌봄 문제는 사실 개인에게 책임을 모두 전가하는 거는 정말 너무 어려운 일이긴 하다. 사회적인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상국의 서울 10년은 문화기획자로서 성장하는 도시에서의 과정[사진 위]이었다. 이제부터의  삶은 고향 향호리와 아버지와 함께인 삶일 것이다. 그가 꿈꾸는 농촌테마파크의 현실을 기대한다.

- 이제 서울 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내려간다.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일단, 리프레쉬?(웃음) 그동안 프로젝트나 일을 마칠 때마다 여행을 했었다. 그런 여행도 좀 하고 싶다. 앞으로 할 일? 강점 가진 걸로 해야겠지. 글 쓰고 편집하는 일을 해왔으니까. 디지털 온라인 공간과 지역을 연결하는 일을 하고 싶다. 나는 국제통상을 공부했고, 그중 유통에 관심이 컸다. 고향의 농산물, 유휴공간이나, 빈 하우스 같은 것도 눈에 들어오고 있다.”
- 이곳 서울로서는 아쉬운 일이지만, 지역의 입장에서 보자면 상국씨의 '귀향'이 크게 귀한 일이겠다. 지역을 새로운 눈으로 보고, 풀어갈 수 있는 경험을 가진 사람이니까.
“아버지를 돌보면서 눈에 안보이던 사회적 문턱들을 많이 경험했다. 그걸 돌파하는 일이 어떤 게 있을 수 있을까? 생각이 많다. 아버지는 편마비 환자로 왼쪽 신체가 불편하시다. 신체활동의 제약은 크지만, 그렇다고 바깥 사회활동을 못하는 건 아니다. 여전히 강릉이나 지역에 대한 이야기도 굉장히 많이 알고 재미나게 이야기하는 분이다. 그걸 마을라디오 같은 형식으로 풀면 어떨까? 아버지는 답답함을 해소하고, 근처 어르신들과 교류도 할 수 있는 통로가 될 테니까. 얼마 전 TV 프로 한국인의 밥상에서 봤던 <풍정라디오> 이야기 같은….”

하동, 목포, 전주, 순천 그리고 강릉의 공통점은?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정석 교수가 한달살이를 했던 지역이다. 지역의 고민과 희망을 안고 고군분투하는 지연민들과의 깊고 오랜 만남에서 정석 교수가 얻은 결론은 두 가지. 하나는 '소다연강미(小多連强美)', 작더라도 그 수가 많아지고 서로 이어지면 강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 지역엔 희망이 있다. '일백탈수'도 그의 주장이다. '일 년에 백만 명 탈수도권해야 대한민국이 산다는 것. 여기 희망의 씨앗 하나가 이제 막 지역으로 뿌리를 내리러 갔노라 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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