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로 배우는 겸양지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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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로 배우는 겸양지덕
  • 강서양천신문사
  • 승인 2022.07.12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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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문화원 김진호 원장
강서문화원 김진호 원장

 

세종시절 집현전 학사로 훈민정음 창제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정인지(1396~1478년)는 식년문과에 1414년 장원급제한 천재이다. 수학이나 역학, 기술에도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고 특히 풍수지리학에 조예가 깊어 세종 때 풍수학 제조(정2품)를 역임할 정도로 조선 최고의 권위자였다.

어느 날 세조가 주관하는 원로들의 위로잔치에 정인지가 초대 받아 가게 되고 대신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세조와 풍수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때 정인지는 풍수에 대한 이론을 장황하게 늘어놓다가,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풍수의 심오한 것까지 들어가면 전하께서는 아마 잘 모르실 것입니다”라고 세조를 무시하는 발언을 하였다.

세조는 친히 세종이나 소헌왕후 문종 등의 장례를 주관하고 길지를 찾는데 동참하였으므로 스스로 풍수의 전문가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격분한 세조는 그대가 뭐가 그리 잘나서 남을 깔보느냐고 질책하고 연회장을 파하였다. 이후 사헌부 사간원에서 탄핵 상소가 올라왔지만 세조는 취중 실수라는 이유로 용서하였다.

이렇듯 임금 앞에서도 풍수의 이론을 자랑하던 정인지는 본인과 아버지의 묘를 어떻게 썼을까?

먼저 정인지의 아버지 정흥인의 묘는 그들의 고향인 충남 부여군 능산리에 썼다. 큰 뱀이 먹이인 개구리를 쫓는 형국 ‘장사축와형(長蛇逐蛙形)’의 땅이다.

뱀이 먹이인 개구리를 찾아다니지 않게 묘의 입구에 와영담(蛙泳潭), 즉 개구리가 헤엄친다는 연못을 만들어 풍부한 먹잇감을 확보할 수 있게 조성하였다.

그 덕인가 정인지는 박종우, 윤사로, 윤사윤과 함께 당대 조선 4대 부자의 반열에 올랐다. 이 가운데 정인지만 한미한 가문의 출신이었다.

그럼 정인지 본인의 묘는 어디에 썼을까? 정인지가 충청도 관찰사 시절에 우연히 지나던 길에서 발견한 충북 괴산군 와령리에 자리 잡았다. 보통은 고향, 조상의 묘가 있는 선산 등에 쓰기 마련인데 정인지는 완전한 객지에 자신의 묘자리를 잡았다.

그 묘자리는 먹이를 찾아 산에서 늙은 쥐가 내려오는 형국인 ‘노서하전형(老鼠下田形)’의 땅인데 앞산이 고양이산, 즉 묘산(猫山)이다.

고양이 앞의 쥐라니 보통은 쓰지 않는 묘자리인데 조선 풍수의 최고 권위자라는 정인지는 그런 자리에 자신의 묘를 썼다. 그러면서 스스로 가난하게 태어나 부자로 산 것이 흠이라면 흠이라고 자성하면서 후손들에게 세 가지 훈계를 남겼다고 한다.

그 중 하나가 “태평 시절이든 난세이든 늘 근신하라”이다. 

아마도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시대를 거쳐 오면서 계유정난을 통해 남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하고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축적한 자신에 대한 반성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명예가 높아지면 부를 축적하고 싶어지고 그러면서 남에게 고통을 주는 삶에 대한 경종과도 같은 풍수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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