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전형필과 청자상감운학문매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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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전형필과 청자상감운학문매병
  • 강서양천신문사
  • 승인 2022.10.12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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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상감운학문매병, 13세기, 국보 제68호 출처=간송미술문화재단 홈페이지
청자상감운학문매병, 13세기, 국보 제68호 출처=간송미술문화재단 홈페이지

 

우리가 중학교나 고등학교 다닐 때 국사 교과서에서 고려청자의 진수라 보고 배운 것이 국보 제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이다. 이 고려청자가 세상에 나오고 지금까지 우리 곁에 있는 데는 사연이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인 1935년 일본인 마에다는 도굴된 고려청자 하나를 6,000원에 매입하게 된다. 그 시절 경성 시내에 여덟 칸짜리 기와집이 1,000원 하던 시절이니 기와집 6채 값을 지불하고 매입한 것이다.

도자기에 새겨진 학은 69마리였지만 매병을 빙빙 돌리면 천 마리 학이 나는 것처럼 보여 이 고려청자를 ‘천학매병’이라 명명하고 조선의 고관대작과 일본의 거부들에게 사진을 보내며 소문을 내기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곳은 조선총독부였다. 

그때 막 경복궁 안에 박물관을 지었기 때문에 최고의 골동품으로 박물관의 위신을 세워보고자 1만 원을 제시했으나 마에다는 거절했다.

도굴품인 줄 알면서도 거금을 주겠다는 조선총독부의 제안을 거절하기란 일본인인 마에다도 쉽지 않았다. 조선총독부가 무슨 꼬투리를 잡을지 모를 일이었지만, 마에다는 천하제일의 명품인 천학매병을 통해 한몫 잡을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기 때문에 기회를 살폈다. 

간송은 이미 24살에 조선 거부 40명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고, 그 유산으로 가치 있는 서책 등을 수집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천학매병에 대한 소식을 들었고 무척이나 보고 싶어했다.

드디어 마에다를 만나고 천학매병을 마주했다. 간송은 속으로 감탄했다. 고려 상감 청자의 백미였다. 

마에다는 30살 남짓의 젊은 조선 청년이 고가의 명작을 구입하겠다고 하니 한편으로 가소롭게 여기며 기와집 20채 값인 거금 2만 원을 부르고는 간송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간송은 일체의 주저함 없이 한 푼도 깎지 않고 2만 원이 든 돈 가방을 내어놓았다. 마에다는 그러한 젊은 조선 청년의 패기와 배짱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거래가 이루어진 이틀 후 골동품상인 마에다의 장인 아마이케가 일본에서 사위의 집으로 오게 되었다. 둘은 그의 단골인 오사카의 거상 무라카미가 천학매병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얘기를 나누게 되지만, 이미 간송에게 판매한 뒤였다.

이 소식을 들은 무라카미가 천학매병을 한 번이라도 볼 수 있게 해달라며 조선으로 건너왔고 간송의 집에서 천학매병을 보게 되었는데 그 자태가 너무 아름다워 감탄을 연발했다. 

너무 욕심이 난 무라카미는 간송이 구입한 가격의 2배인 4만 원을 제안했고, 간송은 웃으며 “어떻게 2만 원에 산 천학매병을 4만 원을 받겠느냐”며 2만 원에 매도하겠다고 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이 천학매병보다 더 좋은 고려청자를 소개해주고 가격은 원하는 대로 치르겠다고 했다. 무라카미는 이 조선 청년의 위상에 크게 웃으며 “제가 졌습니다. 저의 결례를 용서하십시오”라며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들은 선조들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지켜져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아마도 한 점 한 점마다 이러한 사연들이 있을 것이다. 

어느 휴일 가족들과 우리 주변 가까이에 있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방문하여 그러한 선조들의 마음과 정성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김 진 호 원장 서울강서문화원
김 진 호 원장 서울강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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