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대화와 소통이 쉽지 않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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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대화와 소통이 쉽지 않은 이유
  • 광진투데이
  • 승인 2017.06.20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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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석 교수 / 건국대 융합인재학부
김 석 교수 / 건국대 융합인재학부

새 대통령이 취임한지 한 달이 지났다. 격랑처럼 불타올랐던 촛불민심에 힘입어 대통령이 된 만큼 문재인 대통령은 여러 면에서 개혁적 행보를 보이면서 전임 정권과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대통령과 지난 대통령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취임사에서 천명한 것처럼 국민은 물론 야당과도 열린 자세로 소통하려는 모습이다. 당선직후 먼저 야당을 찾아가 국정운영의 동반자 역할을 부탁하거나 기자들에게도 직접 브리핑도 하고, 질의응답을 주고받으며 참모들과 원탁에서 머리를 맞대는 모습에 국민들이 박수를 보내고 있다. 박대통령의 권위적이고 폐쇄적인 모습이 비정상의 일상화를 가져오면서 많은 사람이 등을 돌렸기에 대선에서 문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은 사람들조차 새로운 리더십에 기대를 갖기 시작했으며 국정지지도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최초 관문인 인사청문회를 거치면서 벌써 야당과 대립과 충돌이 재연되고 있으며, 훈훈하게 시작된 협치 기조가 흔들리고 있다. 야당과 의견차이가 심해지고 갈등이 커지는 것은 야당이 처한 정치적 상황이나 청와대의 실책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대화를 어긋나게 만드는 심리적 장벽이 인간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장벽은 다름 아닌 자아(ego)다.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은 자아의 본성이 기만적이며 낯 설기 조차하다고 말했다. 자아는 최초 구성과정에서 거울에 비쳐진 신체 이미지를 통해 만들어지고 자신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대하는 본성을 갖는다. 침팬지는 인간 아이보다 더 빠르게 자신의 거울 이미지를 알아채지만 별 감흥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는 최초로 자신의 이미지를 알아 볼 때 엄청난 환희를 느끼며 이때부터 자신의 신체 이미지에 집착한다. 그러면서 한갓 이미지일 뿐인 자아에 매달리는데 정신분석은 이를 나르시시즘(narcissism)으로 지칭한다. 

성장하면서 나르시시즘은 자아정체성을 굳건하게 다져주는 접착제 역할을 하지만 매사를 내 관점에서 해석하고 치우치는 편향이나 선입견, 지나치게 자신을 과장하는 망상적 심리의 원인이 된다. 자아는 크고 작고의 차이는 있지만 나르시시즘의 지배를 받는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경계를 게을리 하면 자아의 맹목성과 편향성이 우리 판단을 어지럽히고 타인과 맺는 관계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우리가 타인과 대화할 때 오해가 벌어지는 것은 나의 자아와 타인의 자아의 상상적 관계 때문이다. 언어는 화자와 청자의 관계를 전제하는데 서로의 말을 해석할 때부터 상상적 관계가 끼어들기 때문에 늘 귀머거리 대화를 하게 된다. 

예전에 유행한 '사오정 시리즈'가 있는데 자아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사오정이 여자 친구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신나게 드라이브를 한다.
여자친구: 오빠 더 신나게 달려. 기분 좋게.
사오정 : 그래, 나도 너 사랑해~~~
또 다른 농담이다.
아들: 아, 오늘 슈렉하는 날이다(학교에서 뮤지컬 슈렉을 한다).
아버지 : 아, 진짜 오늘 쓰레기 날이네(슈렉 발음을 쓰레기로 들음).
그런데 비가 와서 쓰레기를 어쩌지?
아들 : 비와도 괜찮아요. 슈렉은 실내에서 하니까요(쓰레기를 계속 슈렉으로 들음).
황당해 보이는 유머지만 진지해야 할 상황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목격한다. 얼마 전에 사드배치를 둘러싸고 국방부와 청와대의 논쟁이 있었다. 청와대 브리핑에 따르면 청와대 안보실장이 국방장관과 오찬을 함께하며“사드 4기가 추가로 배치되었다면서요”라고 묻자, 국방장관이 “그런 게 있었습니까"라고 반문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나중에 이 말 해석과 의도를 둘러싸고 여당과 야당의 갑론을박이 벌어지자 대화 당사자인 장관은 이것이 맥락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생긴 일이라고 합리화 했다. 과연 그럴까?

이 논쟁에는 의도적인 누락이나 왜곡이 존재하지만 당파적 입장에 치우치는 사람들이 그 해석에서 각각 달라지는 게 또 다른 귀머거리 대화의 면을 잘 보여준다. 상대의 말을 내가 이해한 바로 이해하고, 더 나아가 상대의 의중까지 내 식으로 짐작하다보면 대화가 계속 헛돌거나 왜곡되는 경우가 많다. 친한 사람끼리 말다툼을 할 때 점점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것도 자세히 분석해보면 상대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말만하기 때문이다. 일상적 대화 뿐 아니라 더 고차적인 학문적 대화나 토론에서도 귀머거리 대화를 반복하는 경우가 많으며 공부를 많이 한 학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결국 자아의 자기중심성이나 본성 때문에 인간은 구조적으로 서로에 대해 오해를 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 여당과 야당이 똑같은 사안을 두고 사사건건 부딪치는 것은 정략적 이해도 있지만 자신의 입장에서만 사태를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조건 대화를 많이 하기 보다는 자아의 자기중심성을 인정하면서 공통점을 찾아야 공감이 가능하다. 귀머거리 대화가 반복되다 보면 아예 상대를 인정하지 않게 되고 결국 극한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러므로 소통이 잘 되기 위해서는 늘 경계하며 특히 정치인들은 자신보다 국민의 입장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말을 너무 믿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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