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책임과 실천: 귤화위지(橘化爲枳)와 정치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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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책임과 실천: 귤화위지(橘化爲枳)와 정치 환경
  • 서울로컬뉴스
  • 승인 2017.07.20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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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항석<캠브리지대 연구학자, 전 대통령자문위원>

『안자춘추(晏子春秋)』에 출처를 두고 있는 이 말은 ‘귤(橘)이 변해서 탱자(枳)가 된다’라는 것으로 자라나는 환경이 다르면 같은 것이라도 그 속성이 변화한다는 뜻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일이다. 제(齊)나라의 대부(大夫)이며 재상(名宰相)이었던 안영(晏嬰 ?-B.C.500)은 안평중(晏平仲) 혹은 안자(晏子)이라고 불리었다. 단신(短身)의 왜소(矮小)한 체구(體軀)이지만 검소하고 군주에게 기탄없이 간언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당시 남쪽의 초(楚)나라 영왕(靈王 ?-B.C.529)은 제나라를 떠보려는 속셈으로 안자(晏子)를 초나라로 초청하였다. 영왕(靈王)은 단신(短身)의 안자(晏子)를 보고는 웃음을 참지 않은 채 인신공격을 하였다. 그를 비꼬면서 물었다.

“제나라에는 그렇게도 사람이 없소? 어찌해서 당신과 같은 사람이 사신으로 오게 되었소?”

이에 안자는 태연했다.

“제나라에서는 사신을 보낼 때 상대국의 상황에 맞게 하는 관례를 정하고 있습니다. 저는 작은 나라에 맞게 뽑혀 오게 된 것입니다.”

사서에 ‘여섯 자(尺)가 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한 자(22.5cm)를 감안하면 매우 작은 것을 짐작하게 한다. 이에 심기가 불편한 영왕은 제나라를 아예 뭉게 버릴 심사로 다른 것을 일렀다. 제나라 출신으로 도둑질을 하여 포승(捕繩)에 묶인 죄인(罪人)을 불러 세웠다. 그리고는 또 비아냥거렸다.

“제나라 사람들은 원래 도둑질을 잘 합니까?”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안자는 초연(超然)하게 일러준다.

“장강 남쪽에 있던 귤(橘)을 강북(江北)에 옮겨다 심으면 탱자가 되는데, 그것은 환경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이 제나라에서 있을 때는 도둑질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그가 초나라에 살면서 도둑질은 한 것을 보면 역시 초나라의 풍토(風土)의 질이 좋지 않는가 봅니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격이다. 말하자면 의지 못지않게 환경 역시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솔찬하게 결정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거기에는 돈도 한 몫하는 모양이다. 2017년 7월 19일 문재인 정부는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高位公職者非理搜査處, 공수처)를 신설한다고 하였다. 어떤 고위 공직가가 포승줄에 묶일지 모르겠다. 정말 귤이 탱자로 변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쩌면 고위 공직자의 실천의지 못지않게 비리와 부조리에 휩쓸리지 않게 하는 환경과 시스템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신설될 공수처는 지난 전 정부에서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특정의 국가 대사를 국민이 다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몇몇이 속닥거리듯 하는 것이 문제이었다. 그렇다면 돌아보자. 그것으로 우리 사회가 가지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정치의 책임과 실천은 투명성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지난 대통령제 시스템의 문제 그리고 지난 4년에 곪아서 터져버린 것에 대한 교훈이 아닐까!

전임 정부의 4년이 주는 교훈 중의 하나는 ‘안쓰럽다고 대통령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더욱이 국가최고의사결정자는 사회적 약속에 따라 실행되는 제도에 의존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국가제도는 누가 하든 예측 가능해야 하고 누구나 알 수 있는 투명성의 환경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르자면 제도적 측면에서 정치 시스템의 문제를 재점검하여 인물론적 관점이 아니라 제도론적 관점에서 문제해결과 그 선택의 각도를 좁혀야 할 것이다.

잠시 시스템의 각도에서 돌이켜 보자. 달포하고 한 달 전에 대한민국은 헌정사상 두 번째 대통령의 하야를 목도하게 된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전 대통령의 하야이후 56년만의 일이다. 말하자면 잘못된 선택에 대한 대가를 경험하는 것으로 국민들의 희생과 맞바꾼 불행한 일이다. 내외적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간단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복잡할 것도 없었다.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면 내려오면 되었기 때문이다. 국민의 뜻과 이반되는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그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따로 있다. 왜 그리고 어떻게 한국의 대통령 정치구조가 이렇게 심각하게 곪아버린 것인가? 작금의 한국의 정치 환경을 이대로 둘 것인가? 이승만 정부이후 줄곧 어느 정부도 반민주, 무능, 부정과 부패 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박근혜 정부는 이전부터 있어 왔던 잘못된 관행과 그 결함이 있는 한국 정치구조의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첨언하면, 올바른 역사인식과 책임 있는 국가제도로서 임하고, 제왕적 정치적 사고가 있을 수 없으며, 최고의사결정의 권한을 사적으로 사용하게 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다면 박근혜 정부에게 ‘무능과 부패 그리고 하야’라는 불명예(?)가 따라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야의 모양새가 어떠하든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는 아니 되었던 일이다.

돌아보면 말끔히 치우고 했어야 할 일들을 우리 모두가 하지 않은 탓이다. 당연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지 않았고 그러한 분위기를 통제했던 까닭이다. ‘상처가 난 부위를 치유하지 않으면 덧 날 수밖에 없다. 이치는 간단하다. 약 바르면 된다. 때론 메스가 필요할 수 있다. 이로 인한 수고와 고통이 뒤따르겠지만 해야 할 일이다. 만약 또 미봉책으로 미루게 된다면 누적되어 온 것에 대한 대가를 더 크게 치르게 되는 날이 반드시 오게 된다.

물론 어떠한 대안을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위기적 국가상황이 다시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못한다. 같은 나무의 귤이라고 하더라도 다 식용으로 쓰이지는 않을 수 있기 탓이다. 어느 시기이건 간에 절대대다수가 만족할 수 있는 사회구조가 있을지도 의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당위적인 측면에서 대다수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끊임없이 조율해야 한다. 시대는 변하고 정치는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포괄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현시점에서 절실해 보이는 관념의 어휘는 ‘책임과 실천 그리고 정치구조의 재정비’이다.

반복되거니와 이제는 한국정치에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왜 절실하게 요청되는지’를 다음과 같은 것들을 통해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공직에 있는 그 어느 누구도 맡은 바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정치에 부화가 걸린 것은 단지 특정에만 국한한다고 믿는 국민들은 거의 없다. 가정해보자. 만약 우리들 중 누구라도 ‘최고 권력을 등에 업은 최순실과 같았다’ 하면 어떠했을까? 언급의 필요성도 없지만, 설령 최순실이 대통령의 지인으로서 올바르게 대통령을 보좌(?) 혹은 도움을 주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적(私的)이라면 역시 문제가 된다. 하찮은 공권력도 있을 수 없지만 대단한 권력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사회에 스며있는 전근대적 정치적 인식을 본디 민주적인 것으로 원상회복시켜야 한다.

둘째, 지난날 한국정치에서 지겨울 만큼 들었던 것은 ‘누구나 참여하여 알 수 있으며, 법과 제도에 따라 실천하고, 책임을 도맡으며, 정책의 우선순위는 국민의 뜻에 따라 실천하는 정치’이다. 반복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러한 사회적 요구가 접목되지 못했다는 것을 암시하며 당위적 요청이라는 것을 명시한다. ‘잘 하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는 정치적 구호는 ‘뜬 구름 잡는 소리’이었기 때문이다. 이제껏 ‘저렇게 말하면 잘 하려 한다는 것이겠지’ 라고 알아들어 버렸다. 요상하게 뜻이 통했고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는 이에 대해 되묻는 것을 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다. 대답 없는 메아리처럼 구체적이지도 않고 투명하지 않다. 이제라도 이를 본래의 자리로 돌려야 한다.

셋째, 정치가 생업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흐르지 않고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듯 참신하고 창의적인 사고가 정치에 흘러들어야 한다. 그래야 정치도 발전한다. 수년 동안 해야 할 일이라면 국민들에게 물어서 할 것이고 또한 걸출하고 참신한 이들이 해마다 쏟아지고 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빠르게 사회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이들을 정치가(街)에 보내야 한다. 예컨대 다선의 이들에게 존경을 표하는 국민들은 그리 많지도 않지만, 선거법에 따라 선거비용을 법의 테두리 안에서 써서 당선되었다고 믿는 국민과 유권자가 얼마나 있을까? 이를 헤아린다면 우리는 ‘꿀먹은 벙어리’가 된다. 아닌 줄 알면서 묵인한 것이다. 그렇다면 ‘돈을 버는 일’이 아닌 정치행위가 오래 늘어졌다면 그 비용은 어디서 그리고 어떻게 충당되었을까? ‘그 동안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에 초점을 두어 평가되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정치가 직업이 되지 않게 또 다른 부화가 걸릴 정치시스템을 교체해야 하는 것도 여기에 있다.

넷째, 제제의 수위이다. ‘견딜만하게 처벌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친일 매국행위의 단죄도 없었고, 권력 참탈(僭奪)을 위해 국민들에게 겨누고 쏘아도 버젓이 활보하며 다니게 두고 있는 것이 우리사회의 단면이다. 사정이 이러니 회유와 압력에 의해 몇 푼 거두어들인 것이 매국과 국민학살에 비유될 만큼은 아니라고 간주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게다가 그렇게 축적한 돈을 대물림하여 두고두고 ‘금수저의 상속자(?)’들을 키워내고 있다. 상처나 보이는 곳만 곪은 줄 알았겠지만 뼈까지 삭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정으로 거두어들인 나쁜 것이 다음세대에 전해져서는 아니 되게 해야 한다. 대안적 시각에서 ‘우리사회만큼 자식 사랑이 유난스러운 나라도 없다’는 것을 원용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국가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많은 피해와 폐단을 주게 된다면 자식과 손자 때까지 공직에 이르는 것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는 ‘그 자식과 손자’가 윗대의 부정한 돈과 권력의 영향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그들이 스스로 공개할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이를 적용하는 것은 예외로 두는 것을 포함할 수 있다.

귤이 변하여 탱자가 되고, 그 동안 검경(檢警)을 믿지 못해 공수처가 신설되고, 믿었던 대통령과 그 일부의 사람들이 죄인이 되었다. 이제 이를 막아야 한다. 초나라의 죄인이 제나라에서 선인(善人)이 되는 것은 의문이나 인물론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제도적 환경을 변화시켜서 예측가능하고 투명하게 해야 한다. 매듭을 짓자면 이렇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주변에 장사치에서 정치꾼에 이르기까지 이권을 찾아 들쑤시는 이들은 있기 마련이다. 과연 이러한 일이 특정층에서만은 발생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번 비선 실세의 국정농락은 ‘어느 정도 하다 말겠지’ 하는 안일함에서 기인한다. 책임과 실천이 취약한 정치구조의 불투명성, 이것이 이번 파장의 핵이다. 이것이 한국사회를 훼손하고 한국의 정치구조를 왜곡하게 하였으며 뜻있는 정치인들과 올바른 붓을 꺾이게 했던 것이다. 이제라도 대외적으로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는 공직의 공인에 대한 책임과 실천을 위한 논의는 ‘귤이 탱자가 되지 않도록 단호해야 할 것이다.’ 니이체(Friedrich W. Nietzsche 1844-1900)가 말했듯 결단코 바라지 않았으나, 이미 들어와 버린 카오스라면 이제 빛나는 별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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