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것을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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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것을 귀하다
  • 송란교 기자
  • 승인 2023.03.24 10: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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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란교/논설위원
송란교/논설위원

흔한 말이 귀해졌다. 사용하던 물건들이 여기저기 넘치면 무시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관심 밖의 일이 되어 어느새 보이지 않게 된다. 지천으로 널려 있으면 필요할 때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소중하게 보관하거나 관리하지 않는다. 항상 가까이에 있는 친한 사람을 무시하고 가족을 마구 대하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아무렇게나 지껄여도 다 받아주니까 존경과 배려의 말보다 툭 툭 던지는 무시하는 말이 먼저 나온다. 내심 편한 말이라 생각하고 늘상 해왔던 대로 그냥 생각 없이 내지르고 만다. 언제나 내 편이니까 하는 이기적인 믿음이 가슴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어렸을 때 자주 들었던 그 흔한 사투리, 이제는 먼 기억 속에 묻혀 찾을 길 없다. 사용해서 닳아진 것이 아니라 내팽개쳐서 버려진 것은 아닐까. 정겨운 말들이 봄기운 올라타고서 스멀스멀 솟아 나왔으면 좋겠다. 구수한 말들, 그런 말을 해본 기억이 없으니 귀도 혀도 자연스럽지 못하다. 근육도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한다. 용불용설이다. 혀가 굳고 생각이 굳어 이제는 그 발음조차 어렵게 되었다. 영문도 모르고 영문과를 다녔다는 말에 웃음꽃이 필 것인가?.

축약, 합성, 외래어를 뒤섞은 생뚱맞은 말이 세상을 지배하려 하니 누렇게 타버린 장판 아랫목에 발 담그고 했던 말들이 우리말 사전에서조차 사라질까 안타까운 마음이다. 환갑이라는 단어도 칠순이라는 단어도 귀하게 들었었는데 이제는 흔하다 못해 잘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 10년을 공들여야 소통이 자연스럽다는 어느 지인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세 번째 스무 살’.

‘일상의 무료함에서 탈출하고자 일탈의 상쾌함을 꿈꾸고 있는 나’, ‘나이 들어감이 무엇이고 그 느낌은 어떠한지 궁금해하는 나’, ‘세 번째 스무 살’에 이르러 겨우 철들고 있는 나를 되돌아 본다. 건널목 푸른 신호등의 남아 있는 삼각형의 개수가 줄어들수록, 핸드폰 배터리에 남아 있는 기둥 표시가 낮아질수록 눈도 발걸음도 다급해진다. 세월의 가속도가 마음을 그렇게 바쁘게 하는 모양이다.

어느 모임에서나 본인의 나이를 쉽게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사람들의 마음이 그러하기에 지금도 다른 사람의 나이를 물을 때 ‘몇 학년 몇 반’이라고 묻는 경우가 더 자연스럽다. 저는 간혹 지하철 몇 호선 몇 번 출구를 이용해서 제 나이를 말하곤 했었다. 이 방법은 난이도가 꽤나 높은 편이다. 저는 00호선의 숫자는 하나 낮추고 출구 번호에 열을 보탰었다. 환갑을 바라보면서도 ‘4호선 19번 출구’라 외쳤었다. 그러다 보니 없는 출구를 찾느라 고생하는 친구도 생겨났다. 웃을 일 없는 삶 속에서 한바탕 웃고 나니 기분이 개운했다. 그래서 짓궂은 친구들은 저를 보고 난잡하기 그지없는 놈이라 말하곤 했었다.

세월의 흔적이 쌓여가도 마음만은 청춘이라 애써 말을 한다. 생각에 젊음의 피가 흐르면 세월도 조금은 비껴가리라. 젊은 세대와 자주 소통하고 공감하면 나이 들어가는 말에 주름질 시간도 없으렷다. 말을 앞세우고 가는 것이 인생이라 하였던가?. ‘한 번 청춘은 영원한 청춘이다’. 꿈도 생각도 더 청춘답게 이끌어 보자. 오래된 것에서 새로움을 꺼내 보자.

사람과 로봇이 서로 교감하는 말들이 늘어난다. 점점 기계적 언어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비대면의 시대가 급하게 다가오면서 인정(人情)도 그만큼 빠르게 마르고 있다. 이것이 설마 봄 가뭄이 서둘러 찾아오는 이유는 아니겠지요. 온라인을 통한 비대면의 양적 확대가 손을 맞잡은 따뜻한 마음을 질적으로 빈곤에 허덕거리게 하고 있다.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시간보다 컴퓨터 모니터나 핸드폰의 액정을 통해 만나는 시간이 더 길어지고 있다. 그래서 믿음의 중요성은 사라지고 빠른 손놀림이 친구를 사귀는 첫 번째 관건이 되는 것은 아닐까?

입이 아닌 손으로 말을 하는 시대다. 언어(言語)의 기본은 나의 마음속 알갱이를 입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밖으로 드러낸 것인데 이제는 소리를 동반하는 말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입이 바싹바싹 마르고 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 이제는 그 소리마저 국보급 명창이 부르는 노래가 되어간다. 그렇게도 흔했던 그리움조차 약에 쓰려 뒤져보니 모두 말라버렸다.

꽃등 타고 오는 봄 향기에 취해 핸드폰만 쳐다보며 길을 걷는다. 그러다 노란 개나리꽃을 등에 업고 있는 가지에 이마를 강타당했다. 피가 나올 듯 말 듯 긁힌 자국이 선명하다. 개나리꽃도 나올 듯 말 듯 서로 견주고 있다. 담장 넘어오는 낭창낭창한 줄기, 언제부터 뭇별들이 건너는 오작교를 짓고 있었는가? 그대는 정녕 밤을 기다리는가 봄을 기다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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