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지도자 이승만 대통령 재조명되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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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지도자 이승만 대통령 재조명되어야 !
  • 김정민 기자
  • 승인 2023.04.13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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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자치신문 칼럼니스트, 장애인신문 논설위원 이병호
서울자치신문 칼럼니스트, 장애인신문 논설위원  이병호
서울자치신문 칼럼니스트, 장애인신문 논설위원  이병호

박진 외교부 장관은 지난 3월 26일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선구적인 역사적 업적과 위상은 재조명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 장관은 이날 서울 종로구 이화장에서 이승만 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린 이승만 전 대통령 탄생 148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기념사를 통해 "우리 미래를 짊어질 청년 세대들이 이 대통령의 독립정신과 건국정신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박진 외교부장관은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제10대 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12대 회장은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맏고 있다. 박진 장관은 "청년 이승만이 20세기 초 우리가 국권을 빼앗겼던 시절 미국에 혈혈단신으로 건너가 조국 독립을 꿈꾸며 학창시절을 보낸 하버드·프린스턴대에선 올해 한미동맹 70주년을 기념하는 각종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박진 장관은 또 윤석열 대통령이 4월 26일 미국 국빈방문을 예정하고 있음을 들어 "백악관에서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을 만나 한미동맹의 발자취와 역사적 성과를 돌아보고 새로운 70년을 열어가기 위한 미래 발전 비전을 심도 있게 논의할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박 장관은 한일관계에 대해선 "반목과 갈등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서로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민식 국가보훈처장관도 이날 기념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이제 바로서야 한다"며 "자유 대한민국의 초석을 마련했다는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공칠과삼'(攻七過三·공을 세운 게 7개이고 잘못한 게 3개임)이 아니라 '공팔과이'(功八過二)로도 부족하다"고 말했다. 이날 기념식엔 박 장관과 박 처장, 황교안 기념사업회장과 회원, 독립유공자 유족 등 수많은 보훈단체 회원들이 참석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며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관통한 인물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그가 살아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도 양극단으로 팽팽하게 나뉘어져 있다. 이승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은 그의 임시정부 활동과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건국에 기여한 점, 농지 개혁과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로 경제 개발을 이룩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했다는 점, 반공주의적 지도자라는 점 등을 꼽는다. 반면 그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은 그가 권력을 위해 분단정부 수립을 주도했고, 친일 세력을 청산하지 못했으며, 한국 사회에 반공주의의 씨를 뿌리 내리고, 독재 정치로 민주주의 발전을 막았으며, 종속적인 한미 관계를 가져왔다는 점을 비판한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33년에 걸친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1945년 10월 16일에 귀국했다. 그 후 독립촉성중앙협의회 회장, 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장,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민족통일총본부 총재 등을 맡으면서 미・소 합의의 신탁통치안 반대, 좌우합작 반대,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거부, 김구・김규식 등의 남북협상 거부 등 반탁・반공노선을 견지하였다. 이런 가운데 남한 단독정부 수립 불가피론을 주창하고 이의 실현을 위해 1946년 12월부터 워싱턴을 방문하여 로비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3월에 발표된 트루만 독트린(Truman Doctrine)은 반공・단정노선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다. 그 후 유엔UN 총회의 결의에 따라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되고 제헌국회가 구성되자 초대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이어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제정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여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세 차례에 걸쳐 대통령에 선출되지만, 부정선거에서 촉발된 4・19혁명이 일어나자 1960년 4월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하와이로 떠났다. 이곳에서 서거 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52년 3월 21일 당시 대통령 이승만이 미국 트루먼 대통령에게 쓴 편지에서 “만일 미국이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 주지 않으면 한국인들은 싸우다 죽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마침내 1953년 10월 1일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쟁취한 뒤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 “이제 우리 후손들이 앞으로 대대에 걸쳐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수많은 혜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강대국 사이의 지정학적인 오천년 역사의 우리나라는 5년에 한번씩 외침을 받아왔다. 하지만 세계 최강 절대 패권국 미국과의 한미동맹이 안보를 튼튼히 해줌으로써 70년 동안 외침 없이 우리는 경제 발전에 매진해 오늘의 번영을 누리게 됐다. 북한 김일성부터 김정은까지 미군 철수를 주장했던 것도 기를 쓰고 종전선언을 추진했던 것도 미군 철수를 노려서였다. 독재자, 친일파, 부정부패 정권으로 그동안 모든 것이 폄훼됐던 건국지도자 이승만 대통령을 이제 재평가할 때가 됐다. 올해가 한미 상호방위조약 70주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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