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로의 갈망 : 5.18 민주화운동
상태바
민주주의로의 갈망 : 5.18 민주화운동
  • 김정민 기자
  • 승인 2023.05.09 20: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울지방보훈청 복지과 이인섭
서울지방보훈청 복지과 이인섭 주무관
서울지방보훈청 복지과 이인섭 주무관

민주주의는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하여 정치를 행하는 제도, 또는 그러한 정치를 지향하는 사상을 의미한다. 광복을 맞이하고 혼란에 휩쓸리는 와중에도 우리나라는 국민 중심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런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일부 독재자들이 나타났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여러차례 위기를 맞이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사망하고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우리나라를 휩쓸었다. 민주주의를 애타게 바라던 국민들은 신군부의 집권으로 인해 민주주의가 위험에 처한 것을 걱정하며, 이를 막기 위해 민주화운동을 시작했다. 이러한 활동들은 1980년 5월 초 절정에 이르렀고 전국각지에서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외침이 퍼져나갔다.

광주에서는 5월 초부터 시민의식이 깨어있던 학생들이 주도하여 시국성토대회를 연일 개최하었으며, 도심으로 나아가, 일반시민들과 대규모 집회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민족민주화성회로 불리던 이러한 집회와 시위는 5월 16일까지 계속되었다.

확산되는 시위에 신군부는 군대를 투입하여 집회와 시위 진압을 계획하였고, 17일 공수부대 투입명령을 내렸다. 이에 시위를 해산한 학생들과 시민들은 5월 18일 전남대 정문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전남대에 주둔한 계엄군의 해산 시도에 결국 충돌이 발생하였고 계엄군의 진압을 피해 학생들은 시민들에게 계엄 확대와 계엄군의 만행을 알렸다.

추가로 파병된 군대는 시위대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에게도 진압봉을 휘둘렀고, 무차별 연행하였으며 도심은 전쟁터로 변해갔다. 계속된 계엄군의 추가와 발포까지 이루어져 사상자가 급증하였으며, 시위는 전남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무기를 획득한 시민들은 시민군으로 활약하기 시작했고 5월 21일 시민군은 계엄군을 후퇴시킴으로써 ‘민중자치’를 실현하였으나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다시 점령함으로써 시민군 다수가 도청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최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손자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본인 할아버지의 만행을 대신하여 사죄하고 직접 당시 희생하신 분들의 묘소를 방문하여 묘비를 닦는 등 가슴 깊은 뉘우침을 하였고, 남은 유족들께도 사죄를 청하였다. 이에 많은 유족 및 피해자분들이 그의 사죄를 받아주며 조금이나마 그분들께 위안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민주주의는 어느 나라에서도 쉽게 정착한 곳이 없었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든 일반 시민들의 노력을 통해 이루어졌고 우리나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국내외 정세가 혼란한 시대인 만큼 나라의 근본인 국민의 일원으로서 5.18민주화운동의 의미를 되새겨 모두가 살기 좋은 대한민국이 되기를 희망해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