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정(華陽亭) 고(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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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정(華陽亭) 고(考)
  • 광진투데이
  • 승인 2017.09.12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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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정 수/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 정 수/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광진구에는 화양동(華陽洞)이 있다. 동명의 유래를 보면 화양정(華陽亭)에서 비롯되었다거나 영월로 귀양가는 노산군 즉 단종이 화양정에서 부인 송씨와 이별하면서 회행하기를 기원해 회행리라 부른데서 회행동이라고도 했다 한다.

일설에는 병자호란 때 청에 끌려갔다 돌아온 환향녀(還鄕女)가 모여 살던 곳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는 단지 환향의 발음이 화양과 비슷한데 따른 것으로서 실제 이는 홍제천이 있는 홍은동(弘恩洞) 이야기로 밝혀졌다.

어쨌든 동명 유래에 반영되었듯이 화양정은 광진구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화양정에 대해 다시 돌아보고자 한다.

옛날에는 동대문을 지나 살곶이다리로 중랑천을 건너 화양정에 올라서면 용마산과 아차산, 한강이 휘감고 있는 현 광진구가 한 눈에 들어왔다 한다.

조선 초에는 현 광진의 누정으로 정종과 태종, 세종이 함께 노닐던 낙천정과 함께 화양정이 손꼽혔다. 적어도 세종부터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는 그러했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한양 도성 동쪽 풍광을 논할 때 이 같은 광경을 눈여겨보고 압구정부(狎鷗亭賦)를 지으면서 '낙천정은 드높아 용마루가 화려하고(樂天崇兮畵棟) 화양정은 우뚝하니 높다란 정자로다(華陽屹兮危亭)'라는 구절을 넣었다.

화양정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화양정기(華陽亭記)에 보인다. 그 기문(記文)으로는 유사눌(柳思訥, 1375~1440)이 남긴 것이 있다.

내용을 보면 화양정이 언제 어떠한 배경에서 조성되었는가에 대해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세종 14년 임자년(1432)에 세종이 최윤덕과 정연 등에게 명해 낙천정 북쪽 언덕에 정자를 짓게 하였음이 보이며, 실무 책임자였던 조순생이 이를 유사눌에게 말하자 유사눌이 정자의 이름을 정하였다고 한다. 그 내용은 『서경』 주서(周書) 중의 말을 화산 남쪽에 돌려보낸다는 뜻을 취하여 '화양(華陽)'이라 이름하였다고 밝혔다.

여기서 화산은 삼각산을 뜻하였다. 한양 도성의 진산인 삼각산의 동쪽이라는 위치와 함께 태조 대에 이미 아차산 남쪽 일대는 목장으로 조성되고 있었다. 10리에 달하는 평평한 들에는 뭇 산이 둘러싸고 내와 못이 있었다. 현 건국대학교 내에 일감호는 이러한 못을 배경으로 탄생하였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사눌은 '태조께서 하늘에 응하고 사람에 순하여, 집을 미루어 나라를 삼았으며, 열성조께서 서로 계승하여 무(武)를 쉬고 문을 닦으며, 말을 목장으로 돌려보내고 소를 놓아먹이니, 그때에 맞게 한 것이다.'라는 배경을 들 수 있었던 것이다.

양성지(梁誠之, 1415~1482) 역시도 화양정과 관련한 시를 지었는데, 화양정에서 바라보는 춘삼월의 아차산과 목장의 풍광이 묘사되어 있다. “한가한 말이 가는 대로 홍진(紅塵) 밖에 나오니, 저 멀리 들판에 풍경이 새롭네. 하늘에 닿은 먼 산은 푸른 것이 그린 눈썹 같고, 비 온 뒤 방초(芳草)는 푸르름이 이부자리 같네. 꾀꼬리 오르락내리락 아침 햇볕에 울고, 소와 말 부산하게 사방(四垠)으로 흩어지네. 호탕한 봄바람에 3월도 저무니, 술 가지고 나가서 좋은 경치 구경하세.”라 하였다.

이렇게 보면 화양정은 낙천정과 살곶이목장, 아차산 등과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광진구 역사의 한 축을 차지한다 하겠다. 서거정이 얘기 했듯 화양정은 우뚝하니 높이 솟아 멀리서 보이고 올라서는 주변 광경을 시원하게 볼 수 있었던 곳이었다. 실제 이후 화양정 등에서는 어떠한 일들이 벌어졌는가에 대해 보자.

화양정은 기록을 보면 동남쪽으로 길을 떠나는 이들과의 이별의 장소이자 유람의 장소로 손꼽혔고, 또 올라오는 이들을 맞이하는 만남의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말을 방목하여 기우는 목장을 살펴보고 더불어 군사훈련을 사열하는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예컨대 단종은 직접 살곶이목장에 나아가 당시 도통사였던 세조에게 군사훈련을 지휘하게 하고 열병을 행하였다.

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1406~1464)가 온양에서 돌아오자 세조는 종친과 함께 화양정에서 맞이하였다.

조선 출신 명나라 환관으로 사신이 되어 왔던 윤봉(尹鳳)이 화양정에 가자 세조는 여러 물품을 내려 위로하였다.

노산군이 영월로 유배갈 때는 세조의 명을 받은 환관이 노산군을 전송하였다. 이후 세조는 중궁 및 세자와 더불어 화양정에 거둥해 크게 군사들에 대한 사열을 행하기도 하였다.

성종은 동교(東郊)에서 농사 상황을 살펴보는 의식을 행하면서 화양정에 잠시 머물러 쉬었다.
연산군은 특히 화양정에 자주 행차하였다. 그 내용을 확인하면 군사들로 하여금 학익진을 쳐 짐승을 사냥하고 화양정에 올라서는 시를 지어 올리게 한 내용이 있다.

또 연산군은 수많은 기생들을 거느리고 화양정에 자리잡고는 말들의 교접 광경을 연출케 하는 기행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이는 화양정의 품격을 떨어뜨린 것이었고, 결국 이때 반정으로 물러나기에 이르렀다.

중종도 화양정에 올라 바라보았는가는 확인되지 않으나 살곶이목장에 거둥해 진법을 훈련하고 사냥 등을 행하였다.

영조의 화양정 행차는 확인되지 않지만 살곶이 목장 즉 마장의 규모와 화양정의 뜻하는 바에 대해 신하에게 질문하였다. 이에 대해 병조판서가 화양정은 왕실 말 등을 관리하는 사복시의 정자이며 그 앞에 말을 방목한다라 대답한 내용이 확인된다.

정조는 남한산성으로 가는 길에 관왕묘에서 예를 행하고 화양정을 거쳐 광진주정소를 통과해 선창소에서 용주(龍舟)를 타고 행행한 바가 있다.

화양정은 이를 중심으로 설치되었던 목장 등을 관할한 사복시에 의해 관리되었다. 때문에 중종 때 작성된 <용재집>에는 '사복시계회도'라는 시가 전하며, 당연히 그 내용 중에는 '장엄히 우뚝 선 화양정'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그리고 실제 화양정의 모습은 그림으로도 확인되는데, 1678년 사복시 제조로 있던 허목이 그린 '진헌마정색도(국립중앙도서관 소장)'에 화양정이 보인다.

현재는 아파트와 각종 빌딩 등에 갇혀 화양정과 그 주변 옛 풍광을 느낄 수 없다. 하지만 세종처럼, 중종처럼 화양정에 올라 탁 트인 살곶이벌과 아차산, 그리고 한강을 바라보면서 호연지기를 갖는 모습을 눈감고 그려본다면 선인들이 왜 정자 이름을 '화양(華陽)'이라 했을까가 느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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