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치욕의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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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치욕의 석탑
  • 성광일보
  • 승인 2024.07.24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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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백 중
수필가. 성동문인협회 이사.
전직 교사
윤백중 수필가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 왕궁터 한복판에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구경했다. 역사의 한을 품은 석탑을 보는 날 하늘도 서러운지 태풍 미탁은 하루 종일 비를 뿌렸다. 비 오는 날을 골라서 관광하기도 쉽지 않은데 운이 좋았는지 비가 오는 날 탑의 여러 장치와 물 흐름을 자세히 볼 수 있어서 안성맞춤이었다. 

5층으로 된 석탑을 바로 앞에서 몇 바퀴 돌면서 여러 가지를 관찰했다. 바로 앞에서 보니 육중하게 보였다. 부여가 남긴 유일한 지상 석탑이란 기록이 있다. 탑 가까이서 보니 맨 아리 세 개로 된 지대석이 있고 그 위에 조금 작은 지석이 있다. 위에는 중석이 5개 있는데 양옆에 있는 돌을 우주석, 양옆에 붙은 돌을 면석, 중앙에 있는 돌을 탱주라 부른다고 설명했다. 위쪽에 따로 두른 것이 갑석이다. 위에서부터는 탑의 몸체로 사리를 봉안하는 탑신부塔神部다. 여기에는 한 면에 4개의 석판이 있다. 양쪽에 우주를 만들고 사이에 면석이라는 석판을 끼웠다. 이곳이 사리를 봉안하는 곳으로 예배의 중심이 되는 곳이라고 한다.

탑신 2층부터 아래쪽 옥개 받침을 두 층으로 했고 탑 위로 올라갈수록 작아진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지붕 받침 아래에는 사각형의 석재를 놓고 윗면을 비스듬하게 다듬어서 간략하게 만들었다. 넓은 옥개석은 위로 갈수록 좁아진다. 탑의 가장 위에 놓이는 상륜부相輪部는 가장 좁으며 여러 개의 구성 요소로 노반석등의 장식을 했다. 몸돌에 비해 지붕돌은 폭이 넓고 작은 자재를 사용하여 외견상은 목조탑과 유사하다. 비올 때 물이 몸통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방지하는 장치도 되어 있어 몸채의 손상도 막아준다. 안정감 있는 체감률로 격이 높은 석탑으로 생각했다. 

가로 1미터 세로 2미터 정도 크기의 면석 4개가 한 면이다. 4각형의 탑이니 석판이 16개가 된다. 이 돌 판을 보았는데 고어 체 한자 글씨가 희미하게 보였다. 자세히 보아도 판독을 할 수 없다. 역사 공부로 이미 알고 있는 대당평백大唐平百 제국비명濟國碑銘을 찾을 수가 있었다. 비 오는 날이라 안 보였으나 구름 없는 날 오후 2시경에 자세히 보면 보인다는 안내원의 설명을 들었다. 최신형 핸드폰으로 여러 장 촬영하여 형태를 보니 글자는 무슨 자인지 알 수 없고 희미한 한자를 볼 수 있었다. 사기의 번역을 보았다며 설명했다. 1층 4면에 2.000여 자에 달하는 비문의 내용을 보았으나 잘 보이지도 않고 내용도 알 수가 없다. 백제 왕조의 지상 5층 석탑으로 유명하기는 하나, 글의 내용을 보면 백제 치욕의 글이라고 한다.

당나라 대장 소정방이 화려했던 백제의 수도 부여를 함락하고 그 전공戰功을 이 탑에 기록해 놓은 것으로 유명해진 탑이다. 소정방은 신라군 5만 명과 당나라 군사 13만 명으로 나당 연합군을 만들어 백제의 수도 부여의 사비성을 함락시켰다. 백제 의자왕을 생포하여 항복 문서를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항복 문서에는 2.000자에 달하는 내용으로 백제 정벌의 당위성을 기록했다. 당 황제의 축전과 장군들의 전승을 기록한 글이다. 함락 후 새로 설치한 5개 도독부와 지방기구 편제 내용도 들어 있다. 서기 1028년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가까이에서 보니 나무 탑같이 정교한데 돌탑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창의적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으며 탑 전체가 대단히 아름답다. 화강암으로 만든 돌탑의 우아한 조형미, 균형과 절제의 미美, 겸손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고도의 균형미를 지니고 있다.     

조형의 미와 비례의 미도 지니고 있다. 삼국시대 석탑 연구의 대단히 귀중한 자료로 생각했다. 몇 바퀴 돌며 보아도 천 년 된 탑으로는 볼 수 없고 중간에 몇 차례 미적 감각을 살리기 위한 건축물로 개축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석탑은 사찰 건축의 기본이 된다.

백제는 불교를 통치 이념으로 세워 국가 중흥의 염원이 담긴 정림사지 5층 석탑을 세워 왕의 권력이 현실 사회를 초월한 신성 권력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한 것 같다. 당시 불교는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데 있어 종교 이상의 막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뒤쪽에 절터가 있고 남쪽에는 두 개의 작은 연못이 있다. 비를 흠뻑 맞으며 현장에서 오랫동안 관찰했다. 나무 탑같이 정교한 석탑은 완숙하고 세련된 미를 볼 수 있었다. 낙수면의 내림 마루와 나무 탑의 기법을 볼 수 있다. 창의적 변화를 추구하고 완벽한 조형미를 완성하여 국보 반열에 올랐다고 생각했다. 예술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탑을 장식한 글의 내용이 소정방의 승전 기록 탑이 되었으니 역사의 한을 남긴 치욕의 탑이다. 조선 왕조 16대 인조대왕의 병자호란 완패 후 삼전도 치욕의 비석과 함께, 현세의 국내외 정세를 역사 속에서의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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