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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老泉) 김흥국지난 시간은 치우천황의 최고 유산이 치우부적과 용대기라고 했다.부적은 평화를 수호하는 벽사신으로 다양하게 쓰이면서 귀면이나 도깨비로 오해받기도 했지만 용대기는 농악놀이에 편승해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오늘은 전래놀이 속에 치우천황을 상징하는 확실한 놀이문화를 한 가지 더 말해보자.지난시간 농악놀이에 영기(令旗)라는 깃발이 등장한다고 했다. 영기는 군대의 전령깃발로 일반 풍물놀이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놀이의 출발이 전쟁에서 시작했기에 장군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꼭 필요했던 역할이다.그 옛날 마이크나 무전기가 없던 전쟁터에서 영기를 꽂은 전령은 예하부대를 무시로 다니며 장군의 명령과 군사작전을 전달했던 것이다.적과 대치 상태에서 군령을 전달할 때 말에서 내려 인사하고 어쩌고 격식을 갖출 시간이 없기에 깃발로 간단히 인사를 했다. 이러한 깃발인사법은 부대와 부대끼리 만났을 때도 하장은 상장에게 군례로 말위에서 자신의 깃발을 상장깃발보다 더 많이 숙이는 것으로 예의를 갖추었던 것이다.이러한 전통 군례가 오늘날 민속놀이로 이어져 기(旗)끼리 절을 하는 놀이가 생긴 것이다. 대부분 마한지방으로 무주군 무풍의 기절놀이가 있고, 기가 서로 접촉한다고 해서 전주에서는 기접놀이라 했으며, 용대기끼리 접촉을 하기에 용기놀이라 부르기도 한다.또 장수군은 깃발끼리 절하는 놀이로 깃절놀이가 되었으며 풍물이 접목된 놀이 형식으로 2018년 장수군의 향토문화유산(무형) 제1호로 등록되었다.그리고 익산기세배(旗歲拜)놀이는 깃발의 각도를 차등으로 예를 올리는 방법으로 1936년 일제 강점기 때 강제 해산되었다가 현재는 익산기세배보존회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일명 ‘농기세배(農旗歲拜)’라고도 한다. 2000년 11월 24일 전북도무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었다.     이상의 놀이들은 대부분 전라도 곡창지역을 중심으로 존속하지만 이외에도 전국에 다수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놀이의 흥을 돋우기 위해 농기세배, 농기뺏기, 기싸움, 기치놀이 제천에서는 기뺏기 등, 마을대항경기로 발전하여 역동적이고 격렬한 몸싸움으로 순수원형이 변형된 느낌이지만 그 중심에 용대기가 있다는 사실에 만족해야한다.현재의 농악놀이에 “농자천하지대본”이란 깃발과 함께 용이 그려진 대기가 등장하지만, 기세배놀이나 기절놀이 등에는 반듯이 용대기가 연희의 중심에 있다.이것은 고조선 이전부터 치우천황의 상징으로 이어져 왔다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전통의 흔적은 용대기나 두레기 등을 신성시하여 마을 가장 높은 곳에 세우고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예를 올렸던 것이다.그럼 과연 용대기가 치우천황의 신물이 맞는가? 아님 필자가 스스로 주장하는 근거 없는 주장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용대기와 함께하는 둑기를 통해서 밝혀보자.

뉴스 | 성광일보 | 2022-03-08 13:56

송란교극(極)과 극은 통한다. 강한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라는 말도 있고, 적의 적은 내 편이라는 말도 있다.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도 그 시간이 길어지면 고통으로 변한다.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다. 누워있으면 얼마간은 편할지 몰라도 하루를 넘길 수는 없을 것이다. 이리저리 뒤척일 수밖에 없다. 영극통(寧極痛)이라 말하면 억지 주장이 되는가?샐리가 머피를 만나면 어떤 현상이 생길까? 서로 끌어당길까 아니면 서로 밀어낼까?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서 말하는 상생상극(相生相剋)은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물이 말라버린 좁은 도랑에서 찬 겨울을 이겨내고 쑤~욱 올라오는 봄 쑥이 ‘밝음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즐거운 일이 있으면 슬픈 일도 생기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샐리의 법칙(Sally's law)은 계속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일만 일어남을 의미하는 것이고, 머피의 법칙(Murphy's law)은 일이 좀처럼 풀리지 않고 오히려 갈수록 꼬이고 되는 일이 없을 때 하는 말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머피의 법칙처럼 자기가 바라는 것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고, 우연히 나쁜 방향으로만 일이 전개되어 거듭 낭패를 당하는 때도 있다. 반대로 샐리의 법칙처럼 일이 우연히도 자기가 바라는 바대로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계속해서 기분 좋은 일만 생기는 것도, 계속해서 슬픈 일만 생기는 것도 아닐 것이다. 매일 만나는 친구나 이웃도 좋을 때가 있고 나쁠 때도 있다. 매끼 마다 똑같은 음식을 먹을 수 없듯이 매일 반복되는 일상도 항상 좋거나 항상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좋은 일 나쁜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을 어떤 자세로 대하는가에 따라 그것에 대해 느끼는 시간과 강도가 달라질 것이다.자석은 무언 가를 끌어당긴다. 하지만 양극(陽極)은 양극을 밀어내고 음극(陰極)은 음극을 밀어낸다. 양극과 음극이 만나야 서로 끌어당긴다. 어쩌면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는 것 같다.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끌어당기는 어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가치가 비슷한 사람, 성향이 비슷한 사람, DNA가 비슷한 사람, 그들과는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그들만의 모임을 만드는 경우가 있다. 이는 자석이 서로 다른 극에서 끌어당기는 것과 같은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자석이라 할지라도 밀어내는 경우가 있다. 즉 가치 있는 긍정적인 에너지만 선택적으로 끌어당기고 부정적인 에너지는 끌어당기지 않는다. 감탄고토(甘呑苦吐,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는 것)와 같은 이치일 것이다.음양(陰陽)을 논할 때, 햇빛이 드는 밝은 곳은 양, 그림자가 지는 어두운 곳은 음이라 말한다. 오행설은 만물의 생성소멸(生成消滅)을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가 상생(相生)·상극(相剋)하는 관계를 맺으며 변전(變轉)하는 것을 설명하는 말이다. 상생(相生)은 오행의 운행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을 낳고 도와주는 것이며, 상극(相剋)은 서로 억제(抑制)하고 저지(沮止)를 한다는 뜻이다. 즉, 상생은 상보(相補) 관계라 할 수 있으며 상극은 상투(相鬪) 관계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木은 火를 낳지만, 土와는 다툼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이런 순서대로 돌고 돌아 서로가 상생상극의 관계에 놓이게 된다. 어찌 보면 내 편 네 편이 아닌 우리 편이 되어 한데 어우러져 돌아가는 인생살이와 같아 보인다.상생 관계의 이웃을 만나면 좋은 일이 많을 것이나 상극 관계의 이웃을 만나면 좋지 않은 일이 더 많이 생길 것이다. 그렇다고 좋은 사람만을 골라서 만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좋은 사람만 고른다 해도 그중에서도 좋고 나쁨이 또 생긴다. 내 주변에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많으면 좋은 일이 많이 생기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도와주려는 마음을 더 크게 키우면 될 일이다. 좋은 이웃이 많으면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인생이 될 것이다. 선한 생각을 많이 쌓다 보면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 선한 이웃이 될 수 있을 것이다.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이룬다. 머릿속으로 그리는 상상들이 현실이 되기도 한다. 반복적인 ‘생각의 힘’은 그 자체로 에너지의 파장을 일으켜서 실체가 되어 나타날 수도 있다. 나만의 꿈을 하루하루 그린 것이 모여서 지금의 나를 만드는 것이다. 상생 상보 할 수 있는 이웃을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생각하면 그런 이웃이 내 곁으로 다가올 것이다.우리가 하는 생각과 말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실체가 없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계속해서 긍정 에너지를 쌓다 보면 반드시 그 에너지는 실체가 되어 나타나게 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꿈꾸는 것을 멈추지 않고 계속 생각하다 보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샐리의 법칙이 머피의 법칙을 압도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선한 에너지를 충전시켜보자.

뉴스 | 성광일보 | 2022-03-04 10:54

[수필] 제2의 고향김선녀- 2018년 광진문학 수필부문 신인상-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광진문협  사무차장이른 새벽 목포항에 있다. 배표를 사고 항구 근처 밥집을 찾아들었다. 어젯밤 막차를 타고 내려왔다. 열차에서 자다 깨다 하며  내려온 탓에 온몸이 뻐근했다. 서울살이에 익숙한 나는 바다 비린내에 속이 울렁거렸다. 귀밑에 붙인 파스도 제 기능을 못하는 것 같았다. 국밥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 남편과 달리 나는 밥술을 뜨지 못했다.산등선이 울타리 같은 산골 마을에서 나고 자란 내게 바다는 미지의 세계 같은 환상이 있었다. 처음 남편을 만나던 시절, 남해 홍도, 흑산도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듣도 보도 못한 섬마을이 고향이라고 했을 때부터 호감이 생긴 것은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정말 그래서였을까. 남편이 들려주는 섬마을 이야기를 동화처럼 듣다가 그 동화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어린 나이에 덜컥 시집을 갔다.열차에서 내리면서부터 남편은 코를 킁킁거렸다. 밤새 들떴던 마음이 지쳐가는 나와는 달리 생기가 도는 남편에게 목포는 고향집 마당같은 곳인 모양이었다. 역 광장을 벗어나 익숙한 길을 걸으며 남편은 평소와 달리 말이 많아졌다.우리는 다시 항구 여객터미널로 돌아왔다. 아까보다는 사람들이 제법 많아졌다. 그래도 배가 뜨려면 아직도 멀었다. 우리는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궁리하다가 가까운 재래시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팔딱거리는 고기들이 시장 바닥을 질펀하게  만들었다. 비린내에 사색이  되어가는 나와 달리 신이 난 남편 뒤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결국에는 토하고 말았다. 백지장이 된 얼굴을 보고 남편은 급히 약국을 찾았다.배에 오르자 남편은 멀미로 고생한다며 선실로 들어가 억지로라도 눈을 붙여 보라 권하고, 나는 뱃머리 갑판으로 올라가 타이타닉호 연인들의 낭만을 재현해 보고 싶어 했다. 마지못해 갑판에 오른 남편은 백지장인 나를 살피고, 약 효과가 나타난 것인지 견딜 만했다. 여객선을 타본 적이 별로 없는 내가 아주 먼 바다 섬까지 가는 것이다. 남편은 자기 때문에 출세한 거라며 우쭐거렸다. 낭만도 파도로 인한 멀미를 달래지 못했다. 결국엔 선실로 돌아와 나는 잠이 들었고, 남편이 다 왔다고 깨워 눈을 떠 보니 멀리 선착장이 보였다.나는 가라앉지 않은 속을 감추며 마중 나온 시아버지께 최대한 밝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농번기라 들에서 일하다 말고 경운기를 몰고 나오 셨을 아버님, 경운기 뒤에 아들과 며느리를 태우고 마을로 향하던 아버님은 꼭 슈퍼마켓에 들렀다. “뭐 사다 줄까? 서울 아가!”하고는 대답도 듣기 전에 가게로 들어가셨다. 잠시 뒤 한 손에는 소보루빵, 다른 한 손에는 콜라병이 들려 있었다.섬에 익숙지 않은 나는 전에도 섬에 있는 동안 끼니를 제대로 먹지 못했다. 온갖 생선 반찬뿐인 밥상에 내 반찬으로 푸성귀를 올렸지만, 그것에서도 비린내가 나서 먹는 둥 마는 둥하다 수저를 놓곤 했다. 시어른들 눈치챌까 싶어 뒤란으로 가서 끄억끄억 속앓이를 하는 나의 사정을 알고 계셨다.우물가에서 김칫거리를 손질하던 어머니도 경운기 소리에 돌담 너머 올라오는 우리를 바라보고  계셨다. 육남매가 태어나고 자란 마당은 어느 작은 분교 운동장 같았다. 시장하겠다며 밥상 위엔 온갖 생선 요리로 가득했다. 나는 겨우 가라앉은 속이 다시 울렁거리기 시작했다.그때 “서울 아가는 나온나!”하고 시아버지가 부르셨다. 빵봉지와 콜라를 건네며 여기서 이것 먹고 있으라 하시고는 방으로 들어가셨다. 난 툇마루에 걸터앉아 담장 너머 먼 곳을 바라보았다.여객선을 타고 섬마을 시댁에 오기 전, 나는 바다에 대한 낭만이 있었다. 앞마당에 서면 저 멀리 바다가 보이는 집,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드넓은 들판이었고, 아주 멀리 높지 않은 산등선이 희미할 뿐이었다.식사가 끝나자 시아버지는 우리를 앞세우고 집 뒤 잔등길로 들어섰다. 낚시를 좋아하는 아들과 섬 생활에 익숙지 않은 며느리에게 낚시의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다. 한동안 쓰지 않던 낚시 도구를 꺼내 손질해 두고, 어머니가 싸 주신 초장과 회칼을 챙겨 들었다. 과일도 두어 개 넣어 주셨다. 우리 부부는 내려오면서부터 농사일을 거들 생각이었는데 아버지의 제안에 못 이기는 척 바다낚시에 나섰다. 나는 어머니를 도와 밭일을 하겠다며 호밋자루를 들었다. 남편이 다가와 호미를 빼앗아 툇마루 끝에 놓고 내 손을 잡아끌었다.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잔등 오솔길을 걷는 동안 남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아버지는 저만치 앞서가시고 우리는 따라가기 바빴다. 산등선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 그 넓은 바다 위에 큰 점, 여객선이 물살을 가르며 달리고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검은 바위 절벽을 시아버지는 익숙하게 내려가시며 연방 “서울 아가, 조심해라”하고 외치셨다.그리고 “아가, 이거 꼭 잡고 있어. 고기가 물면 손에 진동이 느껴질거야”하고 내 손에 낚싯대 하나를 쥐어 주셨다. 남편은 빈 낚싯대를 던졌다가 끌어올리며 몇 번이고 시연을 해 보였다.한참이 지났다. 시아버지는 두 마리나 잡으셨는데 우리 낚싯대는 감감했다. 우리는 낚싯대를 내려놓고 아버지가 손짓하는 넓적한 바위로 모였다. 벌써 두 사람은 도다리와 장어회를 초장에 찍어 먹었다. 나는 과일을 깎았다. 나를 쳐다보던 시아버지는 “서울 아가는 이 맛을 몰라서 참 안 됐다”하시며 다시 한 번 입맛을 다셨다.반나절 바다의 바람이 몸에 배었는지 비린내로 울렁이던 속앓이도 잊었다. 어둠이 내려서야 마당에 들어섰다. 낚시 장비를 정리하고 우물가에서  씻기 시작할 때 시어머니는 어둠을  등에 달고 돌아오셨다.급히 저녁상을 차리는 어머니 일손을 거들며 말을 건넸다.다음 날 새벽 밭에 나가 고춧대를 세우는 시아버지를  도와드렸다.이웃 어른들이 “서울 아가가 예쁘구먼”하는 말에 대답 없이 웃으시는 얼굴에 행복이 가득했다.사나흘을 보내고 다시 경운기를 타고 선착장으로 나오던 날, 어머니도 말없이 경운기에 올라타셨다. 며느리 손에 소보루빵과 우유를 들려주시는 어머니 얼굴엔 서운함이 가득했다.시부모님과 며느리로 엮인 그 세월이 고스란히 추억으로 떠오른다. 바다, 그 알 수 없는 깊이와 넓이만큼 깊고 넓은 두 분의 품이 정말 그립기만 하다. 그 세월이 너무나도 선명한데, 벌써 삼십 년 전 일이라니!바다에 서면 습관처럼 목이 메어 온다. 평생 뱃사람으로 살아오신 시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이야기와 시어머니의 고단함. 그리고 서울 아가와 함께한 추억들이 갈무리되어 노을이 된다. 내 황혼에 노을로 내려 외롭지 않은데, 아주 가끔 그리움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뉴스 | 성광일보 | 2022-02-24 11:15

김삼기19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 맞짱문화가 꽤 성행했었다. 원래 맞짱은 일대일로 맞서 싸우는 것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 소위 맞짱까기나 맞짱뛰기라는 말로 더 많이 알려졌는데, 이는 건달 조직 간에 큰 싸움이 벌어질 때, 양 조직의 두목이 일대일로 결투를 벌이는 것을 의미했다. 맞짱은 조직의 부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싸움이 시작되고, 싸움이 진행되는 동안 부하들은 자기 조직의 두목을 도와 줄 수 없고, 만약에 자기 조직의 두목이 지게 되더라도 집단으로 패싸움을 하지 않고, 깨끗이 승복해야 하는 페어플레이 원칙이 지켜졌다.당시 학생들 사이에서도 맞짱이 유행했는데, 이해당사자 두 명이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결투를 벌여 승패를 가렸다.맞짱의 장점은 속도가 빠르고, 단번에 해결되고, 뒤끝 없이 깔끔하게 끝나고, 승복이 확실하다는 것이다.그래서 맞짱에서 승리라도 하면 적당히 이기는 것이 아니라, 100:0으로 완벽하게 이기는 것이 되어, 그야말로 승자는 영웅이 되었다. 그 후로 맞짱은 토론에도 등장했는데, 보수와 진보 논객이, 노와 사 대표가 맞짱토론을 벌이면서 극한 대치 상태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곤 했다.맞짱토론은 Bottom-up 조직이 아닌 Top-down 조직에서 나오는 형태로, 조직의 대표가 맞짱토론에서 결정한 사항에 대해서는 조직 전체가 그대로 따라야 하기 때문에, 맞짱토론을 하는 자는 그 조직에서 막강한 힘을 가진 대표이어야 했다.국내외 중대한 정치현안에 대해 여야가 의견이 대립될 때,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만나서 의견을 조율하는 영수회담 역시 맞짱토론이라 할 수 있다.그런데 요즘은 건달 사회에서도 맞짱이 없어졌고, 정치에서도 맞짱토론이 없어졌고, 우리 사회 어느 곳에서도 맞짱문화를 찾아보기 힘들어졌다.한국의 조직문화가 권위적인 Top-down 방식 보다는 의견수렴을 중요시하는 Bottom-up 방식으로 최근 수십 년 동안 전개되면서 맞장문화도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그래서 조직이나 정당의 대표인데도 조직의 운명을 놓고 상대와 맞짱토론을 통해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어제(20일) 국민의당 안철수 대선후보가 "지난 일주일 기다리고 지켜보았다. 더 이상의 무의미한 과정과 시간을 정리하겠다"며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와의 단일화 결렬을 선언했다.이번 대선의 막판 최대 변수로 거론됐던 야권 단일화가 일단 결렬되면서 당장 오늘(21일) 열리는 대선후보 3번째 TV 토론에서부터 새 국면이 전개될 것으로 예상된다.안철수 대선후보는 윤석열 대선후보의 메시지는 들리지 않고, 윤석열 대선후보의 뜻이라며 국민의힘의 이런저런 사람들이 끼어들어 단일화 제안의 진정성을 폄하하고 왜곡시킨 게 단일화 결렬 선언의 원인이라고 말했다. 왜, 안철수 대선후보와 윤석열 대선후보는 정권교체라는 동일의 카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단일화를 놓고 맞짱토론을 하지 못했을까?아마도 두 대선후보가 Top-down 시대의 김대중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처럼 강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대선국면에서 의리나 원칙도 사라지고, 정당이나 선대위도 대표에게 조건 없이 맞짱토론에 임하라고 권한을 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맞짱토론으로 담판을 지을 때는 그래도 정치 지도자의 행동 하나하나가 책임감 있게 보였고, 그래서 우리 국민들도 밎짱토론에 의한 그 결과를 대하면서 속이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그러나 지금은 우리 정치판에 영수회담도 없고, 맞짱토론도 없이, 가짜뉴스나 네거티브 공략만 난무하고 있으니, 우리 국민들이 정치를 바라보면서 짜증만 내고 있는 것이다.우리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이 야당 총재시절 위기 때마다 대통령과 맞짱토론을 벌여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었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우리에게 지금 맞짱토론에 승부를 걸만한 큰 정치인도 없고, 그런 정치문화도 없다는게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정치도 시스템에 의해 움직여야 하지만, 그래도 대통령선거 같은 큰 판에서는 맞짱토론 같이 단번에 해결되는 스릴을 맛보고 싶은 게, 우리 국민의 마음이 아닐까?[단상] 정치 이야기는 글의 소재일 뿐, 정치적인 의도는 전혀 없으니, 맞짱에 대한 글로만 이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뉴스 | 성광일보 | 2022-02-22 18:29

김신열첫 직장이란 개인의 맘을 설레게 하는 곳일 뿐더러, 맘의 안식처이고. 행동 등 능력 발휘처다.취업 시즌을 맞아, 직장을 구하기가 참 어렵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막 졸업한 젊은이나, 경험 등 경력을 나름대로 쌓은 중장년, 그리고 퇴직자들에게나 공통된 듯 하다. 많은 직장, 직종이 있다지만, 내게 맞는 직장, 나를 요구하는 직장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닥친 현실이다. 그렇다 보니, 개인적으로 전공 학부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고, 실습도 겸비하는 등 사회 경험도 두루 쌓지만, 개인 능력 유무 내지 회사 요구 사항의 간격으로 취업준비생 누구나가 어려움을 겪곤 한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영광과 실패의 쓴잔을 누구에게나 한 두번 쯤은 경험한다. 우리가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아가는 사회임을 스스로 인식하는 그런 자리이기도 또한 하다.어렵게 직장에 들어가면 여러 가지 서류가 요구된다. 근로계약서 및 신체검사결과(이하 신체검사서 칭함)가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신체검사서 유효기간 차이가 기관마다 적용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병원 발행 유효기간은 1년으로 되어 있지만, 요구하는 기관은 3개월 이내로 안내하고 있다. 이렇다보니, 3개월 넘어 다른 직장을 가더라도 1년 유효한 신체검사서 임에도, 이를 사용 못하고 병원에서 다시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유효기간 1년이 아닌, 3개월로 그 수명을 단축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취업을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한 첫 직장의 관문이 제출 서류로 다시 한번 난관에 맞부닥친 셈이다. 그 대안을 제시하자면, 신체검사서 유효기간 1년에 맞추어 채용기관마다 적용하면 모두 해결되는 간단한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직원의 건강이 중요하여, 기관마다 내부규정을 각기 정하여 시행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기관마다 다른(1년, 3개월) 적용으로 인하여 혼란을 야기하고, 부담을 전가시키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 본다.

뉴스 | 성광일보 | 2022-02-22 18:27

함영관행복이란 누구나 갖고 싶어 하고 추구하고 있다. 행복은 그 개념이 생각함에 따라 변화가 많다. 그래서 행복은 자로 잴 수도 없고 저울로 달을 수도 없다. 오로지 스스로 느끼는 마음의 자로 알게 된다. 하지만 그 느낌도 때와 장소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한다.특히 내가 갖고 싶은 것은 아주 작은 행복이다. 큰 행복 같은 것은 감히 생각지도 못한다. 아주 작은 행복도 그 뜻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그 뜻에 욕심이 생기지 않으면 부족함이 있어도 행복을 갖게 될 것이다. 행복의 정의는 복된 좋은 운수로 심신의 욕구가 충족되어 조금도 부족감이 없는 상태라고 한다.어느 대통령의 글속에서 읽은 내용이다. 불세출의 영웅 나폴레옹도 “내게는 불가능이 없다”고 외쳐대고 유럽을 재패한 황제였지만 그는“내가 정말로 내 생애에 행복했던 날은 6일밖에 없었다.”라고 고백했다고 한다.그렇다면 그는 불행한 영웅이란 말인가? 그는 너무나 큰 행복을 이루려고 했기에 행복했던 날보다 불행했다고 한 날이 많았으리라.나폴레옹은 행복의 지수를 너무 크게 이루려고 했기에 그는 늘 불만족했다. 결국 불행하게도 외딴섬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를 가서 그 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그러나 헬렌 켈러는 태어난 지 19개월 만에 심한 열병으로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자가 되었다. 이처럼 삼중고(三重苦)의 신체장애자도 단지 촉각 후각 상상력으로 세상을 살아간 그에게 가정교사인 설리번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과연 그가 미국의 작가, 교육자, 사회주의 운동가로서 성공할 수 있었을까?비록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했던 헬렌 켈러였지만 그녀는 스스로 만약 자신이 단 사흘이라도 볼 수 있다면 어떤 것을 보고 느낄 것인지 미리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헬렌 켈러 사흘만 볼 수 있다면 수필 중에서 -“만약 내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유일한 소망하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죽기 직전에 꼭 사흘 동안만 눈을 뜨고 보는 것이다.첫째 날은 나를 이만큼 가르쳐주고 교육을 시켜준 나의 선생 설리번을 찾아가 지금까지 그의 특징과 얼굴모습을 내 손 끝으로 만져서 알던 그의 인자한 얼굴 그리고 아리따운 몸매 등을 몇 시간이고 물끄러미 보면서 그의 모습을 나의 마음속 깊이 간직해 두겠다.그리고 친구들을 찾아가고 그 다음엔 들로 산으로 산보를 가겠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아름다운 나뭇잎사귀들, 들에 피어있는 예쁜 꽃들과 풀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석양에 빛나는 아름다운 노을을 보고 싶다.둘째 날은 이른 새벽에 먼동이 트는 웅장한 장면, 아침에는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박물관, 오후에는 미술관 그리고 저녁에는 보석 같은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하루를 지내고.마지막 날에는 일찍 큰길가에 나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들, 아침에는 오페라하우스, 오후엔 영화관에서 영화를 감상하고 싶다. 그러다 어느덧 저녁이 되면 나는 건물의 숲을 이루고 있는 도시 한복판으로 나와서 네온사인이 반짝거리는 거리, 쇼윈도에 진열돼 있는 아름다운 상품들을 보면서 집에 돌아와 내가 눈을 감아야 할 마지막 순간에 나는 이 3일 동안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하여 준 나의 하느님께 감사한다고 기도를 드리고 영원히 암흑의 세계로 돌아가겠다.”라고 했다.그러한 불행의 삼중고를 가진 장애인이면서도 내 생애에 행복하지 않은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그녀는 오히려 나는 나의 역경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한다. 왜냐하면 나는 역경 때문에 나 자신, 나의 일, 그리고 하느님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주어진 여건에서 묵묵히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헬렌 켈러의 글은 당시 경제 대공항의 후유증에 허덕이던 미국인들을 잔잔히 위로했다. 그래서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이 글을 ‘20세기 최고의 수필’로 꼽았다.그렇다면 나는 작은 행복을 어디에서 찾을까?특별 메뉴를 만들어 식탁에 모여앉아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에서 자식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즐기는 시간이 행복하다.높지 않은 산을 힘들게 올라가 정상에 도달했을 때의 성취감이 작은 행복으로 이어진다. 또한 우연한 기회에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려고 먼저 계획했던 일들을 완수했을 때. 비가 오는 여름날에 창밖을 내다보고 커피한잔을 마시며 좋아하는 음악이라도 듣노라면 이 또한 작은 행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아무리 작은 행복이라도 우리에게 오는 행복은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것은 없다. 또한 온다고 할지라도 그 행복을 가슴속으로 받아 주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행복은 쫓아가면 달아난다. 내가 현재 일에 만족하면 행복해진다.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사는 사람은 항상 행복하다. 우리에게 오는 행복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기대하고 노력한 것이 목표지점을 이룩했을 때 작은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뉴스 | 성광일보 | 2022-02-22 17:30

이옥자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웃음이 좋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하지만 몸과 마음이 편해져야 웃음이 나온다. 지구상에서 웃을 수 있는 동물은 오직 사람뿐이다. 동물은 기뻐도 웃을 줄 모른다. 사람들은 홀로 있을 때보다 보다 누군가와 함께 모여서 더 잘 웃는다.웃는 문으로는 만복이 들어온다는 “소문만복래” 라는 말이 있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뜻이다. 웃으면 내 기분도 좋아지고 주위 사람도 즐겁고 건강해진다. 웃음은 타인과의 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잘 웃는 사람이 대인관계도 더 좋아 친구가 많이 생긴다. 말할 때도 미소 짓는 것이 보기 좋고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한다. 그래서 ’웃는 얼굴에 침 뱉지 못한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중학교 2학년 때다. 수업이 끝난 후 종례를 해달라고 담임 선생님을 만나려고 미소를 지으며 교무실에 들어갔다. 이 선생님이 “아니, 옥자는 뭐가 그리 좋아서 항상 웃고 다녀?” 하셨다. 최 선생님은 “웃는 거 흉이 아닙니다. 미소는 마음의 문을 열리게 해요. 나는 너의 웃는 얼굴이 보기 좋다.”라고 하시는 담임 선생님이 고마웠다. 고등학교 2학년 점심시간이 끝나기 직전 막간을 이용하여 교단에 올라가서 만담을 했다. 친구들을 한 바탕 웃었다. 지금도 생각을 하면 웃음이 난다.대학교 3학년 때, 오후에 이문동 청진학원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그날이 마침 공개수업을 했다. 학부형 중에 미소를 지었다. 며칠 후에 편지 한 통이 배달되었다. 오빠는 편지를 읽어 보지도 않고, 내가 연애를 한다고 꾸중을 했다. 그때는 중매로 결혼을 시대였다. 그 젊은 청년은 나를 처음 보는 순간 미소 짓는 내 모습에 반해서 편지를 썼다고 고백했다. 나의 성격이 쾌활하여 평소에 잘 웃는다. 그래서 이런 오해까지 받은 적이 있다. 물론 때와 장소를 가려서 웃어야 그 웃음으로 명약이 된다. 사람들을 잘 웃기고 나도 잘 웃기 때문에 나의 블로그에 별명도 “웃음보따리”라고 지었다.1969년대 코미디 쇼인 ‘웃으면 복이 와요.’ 는 문화방송에서 제작한 코미디 프로그램이다. 온 가족이 모여앉아 웃었던 기억이 난다.연구를 통하여 웃음이 인체에 유익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서울대 가정의학과를 중심으로 웃음진료가 시작되었고, 원자력 병원에서도 환자와 보호자들을 대상으로 정기적인 웃음교실을 열고 있다. 웃음은 부교감신경이 항진되어 소화기능이 향상된다. 많이 웃으면 행복감을 느끼는 엔도르핀이 늘어나 면역력 증진에 도움을 준다. 우울증 감소. 암, 뇌졸중, 아토피 등을 이겨낸다고 한다.이처럼 웃음은 정신건강뿐만 아니라 신체건강에도 영향을 준다. 현대의학으로 밝히는 웃음의 효과를 체험한 사람들이 점차 늘고 있다.나는 매월 동창들과 공기 좋고 경치 좋은 곳을 찾는다. 내가 사진을 찍을 때 입 꼬리를 올려 웃는 표정을 “김치.”라고 하면, “치즈.”라고 대답하는 순간 셔터를 누른다. 모두 한바탕 웃는다. 우리들의 추억을 만들기 위해 찍은 사진을 슬라이드로 편집해 친구들에게 보내면 모두 즐거워한다. 웃음은 유통기간이 없는 최고의 상비약이다. 거울 앞에서 입 꼬리를 올리며 웃는 연습을 해본다. 그런데 요즈음 코로나 19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힘들어한다. 웃음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다.우리 부부는 일찍 일어나 코로나 19가 빨리 종식되도록 주님께 기도드린 후 집 앞에 있는 대현 산에 오른다. 울창한 나무 밑에서 마스크를 쓰고 여러 명이 거리두기로 드문드문 서서 스트레칭을 한다. 운동할 때도 유모가 풍부한 회원이 ‘살~랑. 살~랑’ 구호를 하여 회원들을 웃긴다. 모두가 한바탕 웃는다.쇼펜하우어는 웃음을 “어떤 관념과 관념이 불균형일 때, 예를 들어 정장차림의 신사가 바나나를 밟고 넘어질 때 나타난다.” 고 했다. 윌리엄 제임스는 “사람은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라고 했다. 우리도 건강을 위하여 근심걱정을 잠시 잊고 박장대소합시다. 하. 하. 하. 하.

뉴스 | 성광일보 | 2022-02-22 17:28

노천(老泉) 김흥국지난 시간 치우천황은 벽사부적의 원조로 귀면와나 도깨비 등으로 디자인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음을 밝혔다. 그리고 치우상징인 깃발은 현재 농악놀이에서 용대기 두레기 등으로 존속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오늘은 그 사례를 살펴보자.일제 강점기 때, 왜인들은 이 나라를 영원한 그들의 식민국가로 만들기 위해 우리 민족 정기와 얼을 훼손하는 방법으로 고유놀이와 문화의식 등을 미신이란 이름으로 말살했기 때문에 많은 전통놀이들이 사라졌다.결과, 용대기를 비롯한 다양한 놀이문화들이 영원히 사라질 뻔하였지만, 1960~70년대 나라의 식량이 자급자족이 어려운 시절, 식량생산을 북돋기 위해 농악이란 이름으로 전통놀이를 되살렸다. 그 당시 지역의 뜻있는 분들에 의해 기억되고 회상되어 간신히 명맥이 재현되었으나 연희의 원본을 정확하게 구성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남아있다.하지만 용대기 같은 전래된 유물들은 장구한 세월동안 달빛에 숨겨져 있었지만 때가 되어 햇볕에 드러나 농악과 함께 그 명분이 새로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그래서 농악놀이에 “농자천하지대본”이란 농기(農旗)가 생겨나고 지역마다 전래된 깃발들이 연희에 동반하게 된 것이다.그래서 용대기는 대기(大旗), 용기, 용당기(龍幢旗), 용신기(龍神旗), 용둣기, 용독기, 소룡기, 농상기, 두레기, 덕석기, 서낭기 등으로 지역마다 다양한 이름으로 재현하고 있으며 이 속에는 영기(令旗)도 함께한다.영기는 장군깃발 옆에서 군령을 받드는 전령깃발로 농악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그 이유는 다음에 설명하자.그리고 대기는 옛 부터 마을 가장 높은 곳에 달고 이 앞을 지나 갈 때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말이나 가마에 내려 예를 올리고 지나갔다. 이는 최고의 신성함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지만 치우천황에 대한 경배가 전래되어 온 것이다. 그래서 대기는 만들 수 있을 만큼 크게 제작되었다.그림은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4호로 홍성군 주교마을에서 정월대보름 등 마을 행사에 사용되었던 농기(農旗)로 홍주성 역사관에 기증된 것이다. 내용은 “광서(光緖) 17년 임진년 7월”에 제작했으며, 이는 1891년 고종 때이며 약 130년 전의 문화재다. 청룡이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희롱하는 위엄을 뽐내고 있다.오른쪽 강정리 신풍마을 용대기는 농업박물관의 농기문화재자료 제43호이다.글 내용은 農者天下之大本也(농자천하지대본야)란 큰 글씨와 아래 “三日一雨~~ ”으로 이어진 묵서의 내용은 삼일에 하루씩 비오고, 낮은 맑고 밤에만 비 내려주시고, 구름과 안개를 뿜는 용의 변화막측한 능력으로 풍년들게 해 달라는 내용이다.이 역시 치우천황에게 치우부적에 빌 듯 농사 잘되게 용대기에 빌었던 것이다.그리고 왼쪽 아래 기증자와 제작 연월일과 주소가 있으며 특이한 내용은 맨 아래 끝부분에 광주에 거주하는 난곡이란 호를 가진 사람이 그렸다고 낙관처럼 서명되어 있다. 추측컨대 당시 용대기는 아무나 쉽게 그릴수가 없어 이렇게 전국에 뽑혀 다니면서 그리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그림의 용대기는 5m×4m란 기록이 있지만 필자가 알고 있는 아주 큰 용대기는 담장을 뒤덮을 만큼 큰 것과 어떤 용대기는 지붕에서 땅까지 펼쳐진 크기의 사진도 보았다.그림 상 치수가 없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충 사람의 2배×3배가 넘을 것 같은 크기였다. 그래서 대기라 불리 운 것이다.

뉴스 | 성광일보 | 2022-02-21 16:24

송란교내가 조금 아는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친구야 00 친구 잘 알지?’. ‘응 그래, 잘 아는 친군데 무슨 일이야?’. 이렇게 시작한 전화가 나를 제외한 다른 두 친구 사이에 큰 사단이 났었다. 전화를 걸어온 친구는 나를 그만큼 신뢰를 했는데, 내가 잘 안다고 말한 친구는 나를 그저 안면이나 있고 속여먹기 딱 좋은 먹잇감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결국 나를 믿고 전화를 한 친구는 내가 잘 안다고 했던 친구와 어떤 일을 도모하다 큰 낭패를 보았다고 했다. 나한테는 직접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는데 다른 친구들 입을 통해 그 불만의 소리가 내 귀에 들어왔다. 마음이 참 씁쓸했다. 내가 나를 고르고 너를 골랐는데 누구에게 실망하고 누구에게 화를 낼 수 있단 말인가?얼마 전 서울 근교 가평에 있는 연인산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정상에서 하산하다 길을 잘못 들어 상당히 먼 거리를 되돌아와야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예전에도 늘 다니던 길인데, 잣나무도 그때 그 나무인데, 오늘따라 아는 얼굴이 크게 화를 내는 듯, 왠지 낯설다는 느낌이 들었다. 설마 엉뚱한 길은 아니겠지 하면서 엇비슷한 길을 터벅터벅 내려왔다. 목적지는 보일 듯 말 듯, 이 길이 맞는 듯하고 저 길이 아닌 듯한데도 어렴풋한 기억에 의존해서 맞는 길이라 생각되는 길을 선택했었다. 결과는 아닌 듯한 길이 원래 목적했던 그 길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으니 선택의 기로였던 그곳으로 다시 올라가서 올바른 방향으로 내려가라 했다. 다시 오르려니 귀찮은 마음이 앞서고 힘 빠진 다리마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큰길로 내려와서 목적지로 가는 택시를 타려고 했었다. 큰길까지 내려와서 택시를 기다리는데 상당 시간 동안 택시는 한 대도 지나가지 않았다. 머피의 법칙이 이곳까지 따라왔나 보다. 어린 시절 민방공훈련을 하면 지나가는 차들이 모두 정지한 상태로 도로변에 서 있었는데 갑자기 그 시절이 왜 떠오르는 것일까?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택시를 무시하고 목적지를 향해 무작정 걸었다. 산길이 아닌 아스팔트 길을 꽤나 걸었더니 무릎이 시렸다. 산악대장의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8명이나 되는 친구들도 덩달아 고생했었다. 리더의 선택과 판단은 그만큼 막중하다는 것과 어중간한 기억을 밑천 삼아 길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는 큰 교훈을 깨달은 날이었다.인지자실야,이기소장자(人之自失也,以其所長者, 사람들이 실수하는 것은 그가 가장 잘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선유자사어심지,선사자사어중야(善游者死於深池,善射者死於中野, 수영을 잘하는 사람은 깊은 물에 빠져 죽고, 활을 잘 쏘는 사람은 들판에서 죽는다)라는 말이 생각났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고 짐승은 앞만 보고 달리다 덫에 걸린다.’라고 누가 스치듯 한마디 하고 지나갔다.무언가를 배우고자 하는 완전 초보자는 가르침을 주시는 선생님이 무척 대단해 보인다. 그러다 조금 아는 듯할 때 그 선생님에 대한 존경은 타지 않고 세워둔 자전거 앞바퀴의 타이어에 바람이 빠지듯 그렇게 사라진다. 마치 본인이 다 아는 것처럼 뽐내려 한다. 특히 잘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는 마치 자신이 모두 다 아는 것처럼 떠벌린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그 분야에서 전문가 수준에 도달하면 선생님에 대한 존경이 다시 살아난다. 한겨울 잘 견뎌낸 인동초 꽃잎이 봄 햇살에 피어오르듯 존경하게 되는 것이다.아는 듯한 길, 가다 말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게 만든다. 어렴풋이 아는 길을 얼렁뚱땅 무모하게 가다 보면 길을 잃는다. 좌고우면(左顧右眄)하게 되고 어정쩡 주춤거리게 된다. 그러니 잘 모르는 길은 아예 가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고 출발하면 된다. 세상 이치를 잘 아는 사람과 아는 척하는 사람과 잘 모르는 사람도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 이와 비슷할 것이다. 내가 잘 아는 친구나 잘 모르는 친구가 아닌, 잘 아는 듯한 친구가 나를 속인다. 알만한 사람이 왜 그랬을까? 내가 확실히 안다고 생각하여 나의 곳간 열쇠까지 모두 내준 것은 아닌가?잘 알아야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지위지지,부지위부지,위지지야(知之謂知之,不知謂不知,謂知之也)

뉴스 | 성광일보 | 2022-02-18 11:19

김흥국그동안 치우천황의 상징인 용문양에 대해 연재를 했다.오늘날, 용은 중화족에게는 한나라 이후 왕권의 상징으로 차용됐지만 지금은 자신들이 마치 용의 후손이나 되는 듯이 온갖 축제를 열고 행사를 한다.본래 근본이 약하면 떠들썩하고 화들짝하는 법이다.용의 근본은 동이족에서 출발했다. 7600년 전 중국이 말하는 “중화제일 龍"이나 “천하제일 龍"으로 부르는 곳은 동이족의 근거지인 홍산문명의 발상지에서다. 중국은 없는 용문화를 살리기 위해 온갖 놀이와 행사로 떠들썩하고 있지만 우리는 있는 용문화도 제대로 못 살리고, 근본마저 서서히 잊어버리고 있는 실정이다.이러한 문화의 미래를 위해서 약 4700년 전, 치우천황의 행적을 찾아서 현재 민속문화에 존재하고 있는 용의 근본에 대해 규명하고 다양한 유물을 통해 용의 출처를 파헤치는 작업 중이다.그 결과 우리의 민속놀이에 사용 중인 용대기는 치우천황이 황제 헌원과 싸울 때 깃발이요 도깨비나 귀면와 등은 치우상징인 용에서 출발한 치우부적으로 규명해 보았다.그리고 우리민족의 삼대명절은 추석과 설날과 단오절이다. 단오절이 삼대명절에 속한 것은 이 날이 치우천황의 탄신일이며 치우부적인 적령부로 일 년의 액땜을 하는 소중한 날이기 때문이다.단오절은 치우의 붉은 기운이 하늘에서 서리듯 양의 기운이 하늘에서 뻗쳐 서서히 땅을 데우기 시작하는 시점이다.봄의 기운이 마감하고 여름의 시발점으로 더위로 인한 온갖 질병과 전염병이 창궐하는 때이기에 우리민족은 치우부적인 적령부로 일 년의 액땜을 하는 날로 잡은 것이다.참고로 중국은 단오절 의식이 없으며 액땜 부적도 없다. 그들은 치우핏줄이 아니기에 자격이 없는 것이다. 다만 5가 겹치는 날이기에 중오절(重五節)이나 천중절(天中節)이란 명칭으로 물에 빠져 죽은 초나라 충신 굴원을 기리며, 용선경합이라는 뱃놀이로 대신한다. 그들에는 뚜렷한 용문화가 없기 때문에 작은 불씨라도 살리고 싶은 행사이다.하지만 치우는 우리의 얼과 정신 속에 깊이 잠재되어 수천 년을 승리의 신으로 DNA에 유전되어 왔다. 그래서 오랜 세월 다양한 벽사부로 궁궐이나, 기와지붕, 대문, 청동솥 등등의 외부와 연결되는 장소에 부정을 막아주는 문양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은 이를 도깨비라 명명하고 귀면와란 이름으로 격하하였으며, 우리의 강단사학자들은 검증 없이 교과서에 그대로 실었기에 우리는 치우상징을 도깨비나 귀신으로 잘못 오해하고 있으며 그 결과 붉은악마라는 명칭이 탄생한 것이다.지난 연재를 통해서 우리는 치우상징의 벽사부적이 도깨비나 귀면와로 오도된 과정과 이유를 규명해 보았다.이제 우리의 전통놀이를 통해서 치우깃발을 검증해 보자.일제는 조선 강점기를 통해서 우리의 정신과 얼을 빼놓기 위해 온갖 문화적 악행을 저질렀으며, 우리를 얼빠진 민족으로 만들어 영원한 식민국으로 부려먹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강압적 사상은 잠시잠깐 머물렀고, 수천 년을 이어온 전통의 미래는 자손의 숨결 속에 맥박으로 뛰어서 오늘까지 이어온 것이다.치우깃발도 우리 전통문화의 맥박과 함께 용대기나 용당기 등으로 전래되어 있다.출발은 수천 년 전에 군대놀이에서 농군(農軍)이라는 형태로 시작했지만 세월이 흘러 “농자천하지대본”이란 명칭과 함께 지금은 농악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출발이 군대놀이였기에 연희자도 상급자와 하급자의 서열을 가진다. 상쇠나 꼭두쇠가 대장으로 천둥소리인 꽹과리장단으로 무리를 유도하고, 심장고동소리에 맞춘 북소리를 공격신호로, 징소리는 바람소리로 후퇴신호를 삼았다.그리고 농악은 길군악으로 시작한다. 이는 전시에 출정하는 행군과 같은 것이다. 진풀이로 원진, 태극진, 십자진, 오방진, 을자진 등의 보법은 전시용어 그대로이다.그리고 농악대가 쓰는 벙거지나 고깔은 군모를 대신 한 것이며 그 중심에는 치우천황의 상징인 용대기를 높이 올려 연희를 한다.이는 왕실에서도 예외는 아니었기에 정조대왕의 화성행궁그림에도 이러한 내용이 그려져 있다. 임금을 상징하는 용기(龍旗)와 둑기(纛旗)가 항상 앞장을 섰으며, 평소에는 수어 관청에서 이를 관리했고, 해마다 봄, 가을 치우사당에서 둑신제(纛神祭)를 지낸 기록이 있다.

뉴스 | 성광일보 | 2022-02-14 13:32

버스정류장 앞 약국, 자동 유리문이 열렸다. 그 틈새로'서걱' 소리를 내며 누렇게 빛바랜 플라타너스 잎 하나가 들어왔다. 바람이 가로수를 흔들다가 바닥을 휩쓸며 지나가고 있다.종로5가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980년대로  돌아간  듯  거리의 사람들도 상점도 길가에 늘어놓은 옷가지조차도 과거의 한 시점에서 정지되어 있다. 시장은 쇠락한 노신사처럼 한때의 화려했던 상념들을 내려놓았다. 골목 안 간판은 덕지덕지 검버섯으로 얼룩져 있고, 새로 단장한 상점들은 야한 화장을 덧칠한 여자들처럼 군데군데 속내가 드러나며 어색했다. 바람도 불협화음을 내며 지나가는 거리가 을씨년스러웠다.몇 년이 지나도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은 거리. 언젠가 나도 시간을 거부하며 옹고집처럼 버틴 이곳에서 퇴색된 추억만을 붙들다가 서서히 사라지는 건 아닐까! 매일 마주치는 거리 풍경은 언제나 생경했다.아침  아홉 시경이면 출근길로 부산한 다른 곳과는 달리 종로5가는 갓 빗질한 마당 같다. 그 텅 빈 길 위로 일상이 시작된다. 내가 근무하는 약국 옆 가게는 유행이 지난 트로트곡이 하루 종일 시끌벅적한 만물상이다. 이른 아침부터 요란한 트로트곡이 텅 빈 길바닥 위로 쏟아져 나오면 황당한 기분이 들곤 했다. 마치 시골 장터로 출근하는 것같아 잰걸음으로  쫓기듯  지나갔다.  비라도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더 소란스럽고 빨라진 메들리 소리가 약국으로 쏜살같이 뛰어 들어가게 했다.열 시가 넘어 햇살이 퍼지면 종로거리는 기지개를 켜듯 거리가 수런거리기 시작했다. 약국 유리문 밖은 한 편의 영화처럼 기묘한 출연자들로 시시각각 변했다. 백구두에 백색 정장, 노랑 구두에 노랑색 정장은 물론 빨강, 연두색으로 요일마다 화려한 원색으로 변신하는 할아버지가 같은 시간이면 어김없이 지나갔다. 바바리코트에 중절모와 체크스카프로 <카사브랑카>의 험프리 보가트처럼 멋을 낸 노신사, 하얗게 세월 앉은 머리를 반짝이는 비즈핀으로 화려하게 꾸미고 치렁치렁한 치맛단에도 무대의상처럼 비즈를 박은 할머니, 주름진 눈매와 무너진 턱선을 잡아 끌어올리듯 높게 올린 헵번 머리에 진한 입술의 중년여인이 지나갔다.  여인의 아슬아슬한 킬힐이 아침 풍경 속으로 들어왔다 사라졌다. 고정출연자인 그들이 한 시대가 사라져 갈 것을 예고하듯 스쳐 지나갔다.점심때가 다가오면 공기가 살짝 들뜨면서 지하철과 버스가 사람들을 토해냈다. 인생의 정상을 이미 올라갔다 내려온 초로의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이 거리를 메웠다. 거리의 패션은 아침 나름의 격식을 차린 옷차림과는 달리 무채색 등산복에 백팩을 맨 사람들이 주류를 이뤘다.지난 시절들의 흑백사진을 떠올리게 하는, 여전히 세련되지 않은 거리풍경이 몸과 마음을 무장해제시키고 있다. 물건을 사고파는 것도 관망하는 듯, 달뜬 공기를 느긋하게  즐기는  이들로  포만감이  느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오랜 세월로 고칠 수도 찾을 수도 없는 물건들은 뒷골목 사이사이에 빛바랜 추억을 끌어안고 쌓여 있다. 익숙하다 못해 무심해진 것들로 길에 좌판이 깔리고, 용도를 잃고 갈 곳마저 잃어 바닥에 내놓은 물건들, 기웃거리는  백발  희끗한  사람들의  사이로  시간이  내몰렸다.그 틈새로 새벽장 나선 지방 상인들이 커다란 백을 메고 삶의 무게로짓눌린 어깨로 쫓기듯 걸어가는 걸음이 숨찼다.햇살이 아래로 내려앉는 오후가 되면 거리는 다시 새로운 풍경으로 바뀌었다. 크고 낡은 라디오를 든 반백의 검정고무신 남자가 정류장앞에서 독백을 하듯 마이클 잭슨 춤을 추었다. 길 한가운데서는 거친 세월에 초점을 잃어버린 할머니가 한서린 목소리로 가녀린 몸을 떨며 사람들을 향해 외치고 또 외쳤다. 비명 같기도 하고 탄식 같기도 한 소리에 무표정한 군중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무심하게 그녀의 외로움을 밟고 지나갔다. 어느덧 춤추던 남자도 할머니도 군중에 떠밀리듯 사라졌다. 유리문 밖을 바라보던 내게 알 수 없는 슬픔이 한숨처럼스쳐가는 오후였다.어스름이 빌딩 사이로 스며들기 시작하면 시간을 비집고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밤은 골목길 포장마차 언저리에서 기억을 불러내었다.  그리고는  추억을  토해냈다. 그들이  청년이었을  때,  종로를누비며 세상을 향해 외쳤던 수많은 구호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한때 온 거리를 어깨동무하며 항거하던 군중도, 가슴을 뛰게 했던 함성도, 그들의 청춘도 부서지다 못해 닳아 버린 보도블록으로 스며들었다. 가끔은 옛 동지들과 지난 시절을 합창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렇게 종로의 밤이 희끗해진 머리카락 사이로 깊어 갔다.“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뿐이냐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저기 우산 속으로 사라져 가는구나 입술 굳게 다물고 그렇게 흘러가는구나…”종로5가, 엄밀히 말하자면 종로5가에서 신설동까지의 길은 이렇게지나간 것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회고의 거리다. 낡은 사진 속 풍경처럼 시간이 머물고 그 사이로 헛헛하고 회한이 뒤섞인 공기가 떠다녔다. 어느덧 시작보다는 돌아보는 시간이 긴 사람들을 바라보니 편안해지고  쫓기지 않는 여유로움이 생각을  느리게 했다. 이 거리에서는시간도 길을 잃고 방황했다.나는 언제부터인가 이 거리가 편해지기 시작했다. 마음이 복잡하거나 생각이 정리되지 않을 때 마치 추억의 영화 세트장 같은 거리에서나도 종종 관객 A, 관객 B가 되어 걸었다. 그러면 내가 붙들고 놓지못했던 것들의 허상이 보여 마음이 가라앉고 막연하게 움켜쥔 집착이 분해되며 몸이 가벼워졌다. 숨가쁘게 쫓아갔던 사랑도 명예도 하다못해 상실감 같은 감정들조차 의미가 희석되어 갔다. 인생의 승자도 패자도, 가진 자도 못 가진 자도 경계선이 없어지고 서로 닮아가고 있다. 나도 점점 물들어가고 있는 것일까.지난 세월의 궤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이 이상한 거리에서는 결핍도 부끄럽지 않았다. 모두가 탁발승이 된 듯 텅 빈 마음을 내어놓으면 이것저것 담겨져 허기를 면했다. 지나간 시대가 귀퉁이에 모여앉아 수다를 떨었다. 그 곁을 또 다른 시대가 얼룩진 옷자락을 날리며 지나간다. 주인공도 구경꾼도 머물지 않으나 오랜 잔상으로 남겨지는 거리.나도 가끔씩 구경꾼이 되어 그들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면 고정 출연자인 할아버지는 어김없이 보라색 양복에 보라색 구두를 신고 보라색 코트를 걸치고 이 거리를 걸어갈 것이다. 그러면 또 다음 출연자를 기다리며 나는 시계를 보고 있을 것이다. 어제도 그제도 그랬듯이, 익숙한 것들을 그리며.안춘윤안춘윤- 이화여자대학교 미술 대 동양화과, 대학원 미술교육석사 졸업- 개인전 및 아트페어 32회 기타  여러 전시 다수 입상 및 표지그림 선정- 그룹전 및 해외전 540여 회- 현재 광진예술회관, 건대롯데 문화센터 채색화 사군자 강사

뉴스 | 성광일보 | 2022-02-14 1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