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라는 공간에 갇힌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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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라는 공간에 갇힌 교육
  • 김정민 기자
  • 승인 2022.12.26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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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철
(사)세계문인협회 부이사장, 광화문사랑방시낭송회 회장, 서울교원문학회 자문위원(사)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월간 문학세계 편집주간시집 : 고향생각 한 잎, 꼭 끼는 삶의 껍질, 나를 앉힐 공간 하나, 지워지지 않는 흠집 외사고공화국, 참사공화국, 언제까지 지속되나 !!

교육은 사회생활에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 및 바람직한 인성과 체력을 갖도록 가르치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활동이라고 사전은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공교육은 공적인 재원(財源)에 의하여 유지되고 운영되는 교육 기관으로써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유치원 따위가 있다면 사교육은 학부모의 교육에 대한 열의로 과외나 학원 수강 따위에 의지하여 자녀의 성적을 올리려는 강한 바람을 이른다.

한때는 자녀교육에 관한한 학교에 맡기고 그 잘잘못은 가리지 않았다. 아이가 종아리를 맞고 오면 잘못을 해서 맞은 거라며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무조건 믿었다. 아이도 억울하다며 투덜거리다가도 이네 승복하고 아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일제강점기나 6.25한국전쟁을 통하여 국가경제는 세계 최극빈국이었던 당시 부모님들의 웬만한 학력은 중고등학교 정도였다.

집에서는 일반예절이나 인성에 관심을 갖고 타일렀다면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학습활동에 대해서는 믿고 맡겨야 했다. 그야말로 선생님들의 교권은 절대적이었다. 지각이나 결석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중고등학교를 시험을 치르고 입학을 했던 까닭에 학교교육과는 관계없이 부모의 교육열에 힘입어 과외라는 사교육 명목의 형태로 학업성적을 향상시키느라 비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후 더 많은 사람들이 원하게 되자 학원이라는 학교대행 장소가 생겨나기 시작한 이곳에서는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반복하는 복습을 위주로 지도하였다. 점차 성행되면서 누가 가르치느냐에 따라 학원비가 차등이 생겼다.

현직교사들은 과외나 학원 강사를 금지하고 단속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학원 강사들은 인기직장으로 부각되었다. 수업료를 많이 받는 대신 복습 위주에서 미리 교과서를 배우는 선행학습으로 전환되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배운 것을 학교에서 다시 배우는 것에 대하여 다수의 아이들은 흥미는 물론 관심을 두지 않고 선생님들의 수업에 집중을 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학교 보다는 학원을 더 소중하게 여기기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예전엔 학교는 맞으면서도 다니는 교육기관이었는가 하면 요즘은 학교에서 맞으면 난리가 나고 학원은 맞으면서도 다니는 소중한 교육기관이 되었다.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지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고 말았다. 왜 공교육은 사교육한테 밀려나야만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감독청은 공교육을 지켜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럼에도 응분의 조치는 어떤 효력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저 자성의 독려만 반복할 따름이었다.

공교육은 교육의 중심에서 밀려나면서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여기 또 다른 요소가 된 것은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면서 국가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학부모님들의 학력이 상향되었다. 학교에 맡겼던 교육에 대하여 선생님들에 대한 믿음에 의문을 품고 이의제기나 간섭하기에 이르렀고 감독기관에서는 인권에 대한 규제로 인하여 회초리나 훈계는 금지사항으로 단속하자 엄격했던 체제는 와르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교육의 본분을 잃어버린 선생님들은 관심을 갖기 보다는 무관심 쪽에 두는 편이 훨씬 수월하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게 되었다. 관심을 갖다 보면 폭력이나 폭언이라면서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 바로 고발하는 상황에 내몰리게 된 것이다. 심지어는 경찰에 신고를 하여 백차가 학교로 출동하는 사태에 이르기도 했다. 상황을 설명하여 이해를 시켜도 신고 된 사건에 대하여 어쩔 수 없노라며 담당 선생님은 응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수업시간에 엎드려 자고 있는 학생을 깨우거나 주의를 주면 신경질을 부리면서 피곤해서 잔다는데 왜 간섭을 하느냐고 대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비상대책회의를 장시간 했지만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도대체 학교교육이란 무엇인가? 거기에는 학습활동과 생활지도가 있다. 여러 명을 지도하는 데는 질서가 있어야 한다. 질서를 지키지 않은 경우나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잘못을 지적해주고 바로 잡지 않으면 납득이 가도록 타일러야 한다. 예전만큼 믿음을 갖지 못해 여러 번 반복해야 한다.

꼭 채벌을 하지 않아도 설득을 할 수 있다. 설득은 상대편이 이쪽 편의 뜻을 따르도록 깨우쳐 말함이다. 깨우친다는 것은 깨달아 알아차리게 만드는 결과를 말한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문제가 있다. 너무 서둘러서 빨리 해결 해야겠다는 성급함에 있다. 몇 마디 시도하고 나서 상대방이 들은 척도 않고 엉뚱한 반응을 보이면 화가 나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여 흥분하는 버릇이 있다. 깨우치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참고 기다리면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요령이 필요하다. 이론으로는 알고 있어도 실제로는 해본 적이 없다. 그야말로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긴다는 개념이 떠돌 만큼 판치고 있다. 어디에서든 통하는 상식처럼 퍼져있다.

가정에서도 어린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면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공부타령에 취하고 만다. 집안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에 전혀 참여를 시키지 않고 있다. 공부할 시간을 빼앗는다는 이유에서다. 사람으로서 해야 할 도리를 체험할 기회는 뒷전으로 밀려있다. 부모들은 나중에 커서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때를 놓치면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성장한 자녀들은 자신만의 고정관념으로 부모의 가르침에 마음을 열지 않는다. 오히려 거추장스럽고 불편해할 뿐 들으려하지 않는다. 자녀를 공부라는 공간에 가둬두고 모두가 해결되는 걸로 착각하고 있다. 필요성을 인식하여 스스로 노력하는 진정한 공부를 시켜야 할 것이다.

더군다나 스마트폰에 빠져 잊어버린 자녀들의 사회성은 언제나 회복할 것인가? 과학이나 문명의 발달에 올바르게 적응시키는 대안이 시급하게 요구되는 시점이다. 교육을 위해서는 공교육을 바로세우지 않고는 불가능한 공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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