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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젊은이들이 찾아와서 즐기던 성수동나는 성수동에 살고 있다. 성수동의 변화를 실감한다. 성수동에 대해서 얘기하려 한다. 먼저 성수동의 현재를 살펴보자. 성수동은 서울의 핫플레이스, 힙지다. 금요일 오후부터 일요일까지, 연무장길, 서울숲옆 아틀리에길에는 사람으로 가득하다. 궁궐이 있는 종로, 볼거리가 많은 중구, 번화가로 이름난 강남 같은 데서 볼 법한 사람들을 우리 동네에서 보고 있다.이제는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한다. 연무장길이나 서울숲 아틀리에길에 평일에도 찾아오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 외국인까지 찾아와서 즐기는 성수동으로유명 외국계 패션 팝업스토어는 인기가 많다. 입장하려면 예약을 해야 한다.2019년까지만 해도 성수동을 찾는 사람은 주로 서울의 젊은 층이었다. 코로나로 사람들 모임을 제한하던 시기, 2020년부터 2021년까지 외국인이 간간이 있었다. 그들 역시 젊은이들이었다. 그러다 코로나가 해제된 지난해 2023년, 달라지기 시작했다. 성수동 어느 곳에서든 외국인과 마주치게 되었다. 방송에서도 얘기했지만, 필자의 경우에는 식당에서 그것을 실감했다. 필자가 한 번씩 가는 감자탕집이 있다. 꽤 알려진 곳이다. 아내랑 밥을 먹으러 가곤 했다. 식당에 온 사람들을 보면 두세 명씩 같이 와서 감자탕을 먹는 젊은 여성들을 볼 수 있다. 중국어를 쓰는 이들이 있었다. 언젠가는 이런 일도 있었다. 반 시간 넘게 줄을 섰다가 식당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주말이면 어쩔 수 없이 줄을 서야 감자탕을 맛볼 수 있다. 한쪽 테이블에는 부부 어르신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나중에 계산하는 데 일본어를 하는 것이었다. 아마 그들이 하는 말을 듣지 못했다면 우리 동네 어른으로 알았을 것이다. 이렇게 성수동은 바뀌고 있다. 이제는 동양인뿐만 아니라 서양인, 중동인들까지 찾아온다. - 외국인 관광 트렌드에 적합한 성수동K-뷰티를 체험하는 성수지역 관광객관광 트렌드가 바뀌었다. 코로나 이후로 단체 관광보다 개별 체험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세계적인 추세다. 중국관광연구원이 최근 중국인의 해외여행을 분석했다. 예전에는 인기 관광지를 둘러보고 쇼핑하는 관광이었다. 지금은 현지 생활과 문화, 음식을 즐기는 형태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테마 체험형으로 바뀌었다.한국관광문화연구원 보고서도 분석이 비슷하다. 한국을 방문한 중국인의 개별 관광이 2019년에는 82.5%에서 2023년에는 97.9%로 증가했다. 단체 관광이 없다고 보면 된다. 동반 인원도 5.1명에서 2.1명으로 줄었다.한국광광공사가 중국인 관광객을 분석한 것에 따르면 10명중 6명이 2030 세대다. 특히 여성이 많았다고 한다. BC카드사가 외국인 입국자의 카드 사용 지역을 분석했다. 면세점들이 있는 소공동, 잠실, 장충동에서 매출은 크게 줄어든 반면에 성수동과 여의도는 크게 늘었다고 한다. 2019년에 비해 2024년 2월에는 성수동 매출 건수는 973% 증가했다고 한다.- 성동구는 성수관광안내소를 설치      2023년 11월에는 성동구에서 성수관광안내소를 설치했다. 장소는 성수역 구내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 전문통역사가 매일 2~3명 관광안내소에서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한국어 영어 중국어로 된 성동구 지도까지 마련해 놨다. 금년 1, 2월의 경우, 관광안내소를 이용하는 사람은 하루평균 40명 이상이라고 한다. 겨울인데 이 정도면 적지 않다. 봄이 완연한 4월 이후가 되면 더 늘어날 것이다.어느 나라 관광객이 많을까. 올해에는 일본인 방문자가 많다고 한다. 이어서 중국인이다. 이것은 명동이나 종로도 마찬가지이지 싶다.인터뷰하는 김부수 성동구청 문화체육과 관광팀장김부수 성동구청 문화체육과 관광팀장에게 성수관광안내소를 설치한 목적을 물어봤다.“최근에 서울숲과 어울어진 성수동은 문화 예술 패션 산업 중심지로 부상했습니다. 국내 젊은 층뿐만 아니라 외국인 광광객이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이에 대응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국가적으로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데 이에 부응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체험형 관광으로 적합한 성수동성수동을 찾은 외국인들예전의 관광은 유명 관광지를 둘러보는 형태였다. 이것이 체험 중심으로 바뀌면서 성수동이 관심을 끌고 있다. 방송을 위해 취재하면서 성수동을 둘러보았다. 확실하게 느꼈다. K-뷰티 체험장이 많다는 것을. 그곳에는 방문객들로 넘쳤다. 그리고 성수동에 젊은이들을 불러들이는 것은 팝업스토어다. 여기서도 방문자에게 k-뷰티를 체험을 할 수 있게 한다. 팝업스토어는 예전에는 서울의 일부 지역에 편중해 있었다. 그러다 여의도와 성수동이 팝업스토어 중심 지역으로 부상했다. 팝업스토어를 얘기하자면 지면이 부족하다.어쨌든 성수동이 서울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것에는 까닭이 있었다. 교통이 편리한 지역에 비해서 건물 임대료가 낮았다. 준공업 지역의 공장과 낡은 건물, 초현대적인 도시시설의 혼재, 개성이 있는 카페, 무언가 체험할 수 있는 공간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성수동은 지속 가능한 광광지로 남을 수 있을까 나는 어느 방송에서 이렇게 마무리했었다. “소금빵을 파는 작은 가게에도 인산인해였습니다. 성수동을 방문한 관광객이 다시 찾는 곳으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광지'가 아니라 '여행지'로서 말입니다. 수익만 챙기고 훌쩍 떠나는 대기업이 없었으면 합니다.”지금의 성수동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까지 방문하는 곳이니까. 그렇다면 성수동이 지금 모습은 계속될 수 있을까. 지속 가능한 관광지로 남을 수 있을까. 관광 트렌드는 바뀌게 마련이다. 한때 사람들로 넘쳐났던 경리단길, 가로수길처럼 될 수도 있다. 점포 임대료가 비싼데 찾는 사람이 없으면 그렇게 된다.현재 성수동이 관광지로 부상한 것은 체험형 카페, K-뷰티 체험장, 팝업스토어 등등이다. 이런 것은 성수동이 아니어도 서울 다른 곳에서 생겨날 수 있다. 그러면 성수동을 찾는 이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성수동의 매력을 찾는 스토리 텔링 사업 필요장기적으로 내다보고 성수동만의 매력을 발굴해야 한다. 성수동은 현재에 안주하지 말고 기본으로 돌아가서 점검해봐야 한다. 성수동은 어떤 지역인가. 어떻게 해서 오늘이 되었는가. 현재의 모습은 과거의 축적이다. 현재의 성수동을 돌아보자. 서울숲, 한강, 연무장길, 준공업지역, 뚝섬, 살곶이다리, 붉은벽돌집, 중랑천, 인근에 응봉산이 있다. 이런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성수동만의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사람들의 마음에 남을 만한 스토리가 필요하다. 스토리 텔링을 해야 한다. 이것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면 된다. 물론 매력적인 드라마로 제작해서 OTT채널을 통해서 세계인에게 어필하는 방법도 있다. 그건 쉽지 않다. 그러면 소박하게 시작하면 된다. 성수지역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이 땅에 살았던 사람 이야기를 만들도록 여건을 만들어주면 된다. 성수동이 이렇게 핫플이 되기 전, 예술가들이 이곳에 와서 자리를 잡았다. 그들이 성수동의 매력을 찾아냈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 성수도시지재생 사업을 할 때 그들이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 성수동의 매력을 발굴하던 그들은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성수동이 지속 가능한 관광지로 가려면 본보기가 있으면 좋다. 그곳처럼 따라가면 되니까. 롤모델로 삼을 만한 곳이 있을까. 있다. 홍대 지역이다. 홍대 지역은 그곳만의 문화를 만들었다. 장기적으로 볼 때 홍대 지역처럼 성수동만의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성수동에 와야만 보고, 듣고, 즐길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아내서 발전시켜야 한다.- 지속 가능한 도시를 생각하는 자발적 주민 모임지역의 스토리 텔링 사업 외에 성수동이 지속 가능한 관광지로 남으려면 지역주민 단체가 있어야 한다. 지역주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소통하고 공론화하는 모임이 있어야 한다. 모임을 행정으로 만들 수도 있다. 문제는 자생력이다. 자생력 없는 단체는 지속되기 어렵다. 성수에서 단기간에 수익만 남기고 떠나려는 업체들을 이 주민 모임이 견제해야 한다. ◈서울의 성수동에서 한국의 성수동이 된 과정 돌아보기                              한국관광 100선, 성수동 포함 서울에 9곳이다.              

뉴스 | 서성원 기자 | 2024-04-05 11:30

1990년 상계동 아파트와 판자촌 풍경과 시(詩).태어난 사람은 자연이나 도시에서 살아갑니다. 사람과 자연과 도시, 이 모든 것은 시간 위에 얹혀 있습니다. 시간은 세월입니다. 사람과 자연과 도시는 세월 속에서 풍화됩니다. 낡아서 볼품없이 초라해지거나 겨우 버티기도 하고, 바람 속으로 사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세월에 풍화되지 않는 사람과 자연과 도시가 있습니다. 오늘은 그런 사람과 자연과 도시를 만나보려 합니다. 사진가 임정의, 그분은 세월에 풍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롯이 빛나는 사람입니다.  건축 사진은 후진에게 맡겨두고 지금은 물안개 사진을 합니다. 여전히 현업 사진작가로 봐야 합니다. 그가 사진으로 남겨 놓은 도시, 현재 진행형인 자연 사진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30만, 40만 장인지 작가 자신도 모른다고 합니다. 사진만 바라보고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이보다 생생한 증거는 없습니다. 사진가이면서 시인으로 살아가는 임정의를 만나 볼까요. 요즘에는 보기 어려운 사진 필름 밀착 프린트'뮈에인myein, 내 마음 속의 오목렌즈' 사진전 서울대미술관나는 2023년 새해 벽두에 임정의 님의 전시회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뮈에인 myein , 내 마음 속의 오목렌즈>사진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임정의를 모르는 분이 있을까요.한국 최초로 건축 사진 전문가의 길을 개척했습니다. 그리고 4대 사진가 집안이어서 그렇습니다. 작가의 선대로 한국 리얼리즘 사진 1세대 거장 임석제, 한국전쟁 종군기자 대장 임인식이 있고 작가의 아들 임준영은 건축과 순수예술사진가로 활동하고 있으니, 이들의 사진은 곧 한국 사진 역사입니다.  반가운 소식을 듣고 나는 전시장으로 달려갔습니다. 2023년 1월 13일, 서울대미술관입니다. 세월을 거슬러 오롯이 빛나는 작가의 사진과 마주하니 행복했습니다.전시장에서 옥수동 사진을 설명하는 임정의 사진가Q : <뮈에인, 내 마음 속 오목렌즈> 전시에 참여하게 된 계기“1984년(1990)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건축 사진 특강할 때 양윤재 교수와 '저소득층의 주거지형태 연구'라는 책을 만들었어요. 그것이 기념비적인 책이 되었는데 그 인연으로 서울대 미술관 측에서 연락을 준 게 아닌가 싶어요.”사진전은 임정의, 김정일, 최봉림, 김재경 공동 전시입니다. 1층부터 3층에 걸쳐서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시 공간이 널찍합니다. 임정의 작가가 촬영한 곳은 봉천동, 난곡동, 신림동, 중림동입니다. 그리고 작가가 살았던 금호동, 행당동입니다.Q : 성동구 금호동 행당동 시절“1961년 5·16군사혁명으로 북촌 가회동 집을 정리하고 우리 가족은 이민 가려고 했지만 이민 비자가 나오지 않아서 1963년부터 성동구 금호동 산 64번지에서 살았어요. 1973년부터는 신장(현재 하남시)이라는 곳의 농가에서 꽃과 양계를 하다가 1980년 초 부모님은 미국으로 이민 가고 나는 홀로 남았어요. 현재 남동생과 여동생은 미국에 살고 있지요. 부모님은 1998년 한국으로 모셔와 현재 국립현충원에 계세요.금호동 산 64번지는 금호동 중에서도 맨 산꼭대기에요. 뭘 사려면 금남시장을 가야 하는데, 달동네(산동네)라 무척 힘들었지요. 우리 어머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Q : 동네 사진을 찍게 된 계기“어린 시절 북촌 가회동에 살 때, 아버지가 찍어준 사진들을 봤지요. 우리 가족의 삶을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금호동 산 64번지, 집 앞마당에서 바라본 주변 모습들을 촬영한 것이 계기가 되어 동네를 사진으로 기록하게 되었어요.”전시장에서 금호동 산 64번지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있을 때입니다. 임정의 사진 앞에서 머뭇거리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나이가 들어보였습니다.“아하, 여긴 옥수동 뒷산인데.”1960년대 사진을 보고 바로 아는 게 신기했습니다. 어떻게 아시냐고 내가 물었습니다. 큰아버지가 금호동에 살아서 자주 왔었다고 했습니다. 알고 보니 두 분 중년 신사는 임정의 작가의 고등학교 동기였습니다. 60년 전의 산의 능선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작가는 금호동 사진 관련해서 KTV에서 다큐를 찍은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살던 금호동 산 64번지를 찾아가서 전과 후의 모습을 비교해 보려고 했지만 고층 아파트로 변해 찍을 수도 없었고 동호대교옆 금호동 파노라마 사진도 전에 모습과 비교해 찍어 보려고 했지만 모든 곳이 고층 아파트로 변해 찍을 수가 없었어요.”금호동 산 64번지에서 바라본 한강 너머 압구정(좌), 옥수동 고갯길 방향(우)Q : 동네를 기록한 사진 내용“한국전쟁 이후 경제 개발을 하면서 옛것은 없애버리는 문화가 되었어요. 그래서 기록하는 사진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어요. 특히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을 거치면서 서울은 도시 개발을 했습니다. 내가 건축 사진을 하면서 도시가 탈바꿈하고 불량 주거지가 바뀌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지요.”Q : 동네 사진을 촬영하면서 기억에 남은 일“달동네 모습을 찍으러 가면 삶의 터전인 자신들의 집들을 재개발하는 데 지장이 있을까 봐 싫어하는 분위기가 느껴졌어요. 못사는 동네를 찍어 북으로 보내려는 간첩이라고 신고하는 일이 벌어진 적도 있었구요.”Q : 사진의 역할“기록은 기억보다 강력한 언어입니다. 지난 과거의 모습을 바라보는 사진의 역할은 역사가 되고 이야기를 만들어주는 영상 언어로 누구나 손쉽게 접근할 수 있죠.앞으로는 콘텐츠가 중요할 거예요. 지금까지 만들어 놓은 다큐멘터리들은 미래 세대들에게 크나큰 자산이 될 겁니다.”작가는 돈이 되지 않는 다큐멘터리 사진을 했습니다. 상업사진을 하는 것보다 인내와 끈기가 필요했다고 회고했습니다. Q : 앞으로 계획“내 사진은 아날로그 시대의 필름과 인화지로 만들었는데 시대의 변화를 느끼고 있어요. 경제 개발로 사라지려는 아름다운 우리나라의 모습을 남겨두려고 해요. 아파트 공화국 문화는 자연을 파괴하고 있어요. 자연과 공간의 조화를 만드는 일은 여전히 내 과제지요. 물안개 피는 아침 풍경이라는 주제로 시와 사진을 엮어 사진집을 준비 중이고 2022년 가을 전쟁기념관 전쟁 사진 아카이브를 만들면서 부친의 사진을 중심으로 금년 6월까지 전시하고 있어요.”물안개 피는 아침을 담은 임정의 작가 사진 (출처: https://www.foto.kr/gallery9-1)이번 사진전에 사진과 나란히 시가 있었습니다. 그중에 '달동네 추억3'은 절창입니다. '누구에게나 집으로 가는 길이 있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 집으로 가는 길이 끊겨버렸습니다.' 로맨스 가이 임정의는 시인이기도 합니다. 물안개 피는 아침 시집이 나오면 그가 영원한 청춘으로 살아온 세월을 느껴보려 합니다. 시집, 언제 나옵니까? 임정의… 조부 임석제, 부 임인식으로 사진가 집에서 태어남. 아들 임준영에 이르기까지 4대 사진가 집안. 건축사진가로 국내외 건축도시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 1970년 신문, 방송보도 사진, 1975년 공간 사진부장. 현재 청암사진연구소 운영. 1997년 제2회 광주비엔날레 초대작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사진가 인물 아카이브에 생애사 구술 기록 영구 소장. 《임정의 포토그라피》 《르 포르뷔제를 보다》 《한국의 공간》 <덧붙임>'뮈에인 myein , 내 마음 속의 오목렌즈' 사진전은 2023년 3월 5일까지입니다. 그의 사진과 시를 놓치지 말기 바랍니다.<작가 서성원(itta@naver.com)><뮈에인 내 마음속의 오목렌즈> 사진전 개막식. 

뉴스 | 서성원 기자 | 2023-01-25 19:32

왕십리역 광장에 있는 벽파 이창배 동상.ⓒ서성원성동구민에게 묻습니다. 이창배를 아십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보겠습니다. 성동구에 동상이나 흉상이 몇 개나 있을까요. 동상이 있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내놓아 자랑할만한 인물이겠지요. 그래서 성동구에 있는 동상을 제가 알고 있는 것만 따져보겠습니다.  왕십리역 광장에 3개, 도선동에 김정호, 무학봉근린공원에 무학대사, 한양대 캠퍼스에 김연준 박사 동상이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경기소리축제 리플렛>  위에 표는 2022년 제 11회 경기소리축제와 제30회 '선소리 산타령' 발표회 리플렛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선소리산타령이 언제 만들어져서 오늘까지 전해져 오는지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유동 인구 많은 왕십리역 광장에 있지만, 존재감 없는 이창배 동상성동구에서 사람들 왕래가 최고로 많은 곳이 왕십리역입니다. 이곳에 김소월 시인의 흉상이 있고, 소녀상이 있고, 이창배 동상이 있습니다.필자가 성동신문에 연재를 시작하기 오래 전입니다. 언젠가 왕십리역 광장에 갔을 때, 김소월 시비와 흉상을 살펴봤습니다. 그 옆에 서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해서 둘러봤습니다. '벽파 이창배'라니? 누구지? 그래서 바닥에 적어놓은 그의 생애를 읽고서 전통 음악을 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나에겐 낯선 이름이었습니다. 나만 그럴까요. 왕십리역 광장에 둘러보는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요? 쓱 둘러보는 정도, 딱 그 정도이지 않을까요. '이창배'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동상 가까운 곳, 바닥에 '벽파 이창배의 생애'라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그의 생애를 간단하게 안내해놨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렇습니다.'선생은 50여 년간 성동구에서 우리의 전통 소리와 더불어 사신 자랑스러운 성동인이다.'자랑스러운 분이라면 널리 성동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하는데, 현실을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동상을 세울 정도의 인물이 아니었던 걸까요? 신명 나는 전통 음악, 현재에도 이어지는 '선소리 산타령'의 가치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지난달에 소월아트홀에서 공연이 있었습니다. 2022년 6월 28일입니다. 우리가 몰랐고 관심이 적어서 놓쳤던 것입니다.그렇다면 '선소리 산타령'은 도대체 어떤 노래일까요?서한범 교수가, 우리 전통 소리 중에서 신명 나는 노래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합창곡입니다. 노래 내용은 어떨까요? 자연입니다. 우리의 산과 강을 노래합니다. 내가 들은 노래도 그랬습니다. 한양 도성 문을 나설 때 만나는 산이나 자연 풍광을 노래하더군요. 노래를 서서 부른다고 해서 '선소리', 앉아서 부르면 '좌창'이라고 한다고 하는데, '산타령'은 서서 해야 더 신명난다고 합니다. 우리 전통 음악은 '한'을 담는다고 하지요. 그래서 구성지거나 슬픈 정조가 깃들어 있곤 합니다. 여기서 한발 벗어난 노래가 경기민요입니다. '선소리 산타령'은 경기민요입니다. 어쨌거나 신명 나는 전통 소리를 듣고 싶은 분은 찾아서 들어보기 바랍니다.'선소리 산타령' 명창은 누구일까. 뚝섬패, 왕십리패가 유명했다고 합니다. 모두 성동구입니다. 지금도 행당동 주변엔 전통 소리를 하는 명창분들이 제자를 길러내고 있습니다. 이 땅에 이창배가 있어서 이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뚝섬에는 전통 소리의 맥이 끊겨서 아쉽긴 합니다.이창배에 대해 알고 싶어서 제자 황용주 명창님에게 전화 연락을 드렸습니다. 코로나 후유증으로 긴 얘기를 할 수 없다고 하셔서 다음 기회로 미뤘습니다. 아쉬웠습니다. 쾌차하셔서 '선소리 산타령' 보존회를 오래오래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  벽파 이창배의 생애를 돌아보다 벽파 이창재, 출처 경기소리축제 리플렛 이창배는 1919년 성동구 옥수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최경식(崔景植)으로부터 경기 좌창과 시조, 민요를 배웠고, 이명길(李命吉)로부터 '선소리산타령' 을 배웠다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음악단 단원으로 활동했습니다. 1951년에 국립국악원 국악사로 재직하였습니다. 1968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선소리 산타령>예능보유자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1969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연구원을 설립하였고, 경기민요와 서도민요 보존연구회장을 역임하는 등 <선소리 산타령〉의 보존과 보급을 위해 애썼습니다. (출처 위키백과) △이창배 저술 : 한국가창대계(韓國歌唱大系), 가요집성(歌謠集成), 증보가요집성(增補歌謠集成)   나는 2022년 7월 7일에 왕십리역 광장을 찾았다. 왕십리역과 광장을 바라보는 이창배가 우리에게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서성원왕십리역사 방향에서 바라본 왕십리역 광장.ⓒ서성원공연 발표 사진 자료. (출처 선소리 산타령 30회 발표회 리플렛)2022년 6월 28일 소월아트홀에서 가졌던 '선소리 산타령 발표 공연' 리플렛 중 일부. (출처 선소리 산타령 30회 발표회 리플렛) 

뉴스 | 서성원 기자 | 2022-07-12 17:32

왼쪽:1972년 성수동 항공사진이다. 새촌의 개량 한옥 지역이 남아있다.(오른쪽 원내는 경동초등학교임)               (출처 국토지리정보원)오른쪽: 2020년 카카오맵의 항공사진이다. 옛날에 지었던 개량 한옥은 한 채도 없다. 다만 택지 모습이 남아있다.(오른쪽 원내는 경동초등학교임)          (출처 카카오 맵 위성 사진.○ 소재지: 서울시 성동구 성수1가1동새촌위치3년 전쯤이다. 누가 나에게 물었다.“새촌 알아요?”“아뇨.”알고 보니 새촌은 우리 동네였다. 우리 집에서 길 하나 건너였다. 성동구 성수1가 1동이다. 그 후로, 그곳을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그런데 왜 새촌이라고 부를까? 궁금했다. 의문은 엉뚱한 곳에서 풀렸다. 일제 강점기에 북촌에 개량 한옥 단지를 만들어서 일본인의 북촌 진입을 막으려 했던 분이 있었다. 정세권. 그분이 이곳 뚝섬에도 한옥 단지를 만들었다. 그 동네가 '새촌'이다. 그러니까 정세권이 서울의 뉴타운(새촌)을 개발했는데, 예로부터 유명했던 북촌은 옛 지명 그대로 불렀다. 뚝섬의 뉴타운은 사람들이 '새촌'이라고 불렀다. 정세권(鄭世權, 1888년 4월 10일~1965년 9월 14일)을 만나다2022년 6월 1일 지방선거일이다. 투표를 끝내고 북촌으로 갔다. 일 때문에 들른 적은 있지만 마을을 둘러보는 건 처음이다. 생각지 못했는데, 북촌한옥역사관(서울시 운영)에서 정세권을 만났다. 우리 동네 '새촌'을 알기 위해 만나야 할 사람이었다. 여기서 신순아 담당자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그분은 오히려 새촌이 궁금하다고 했다.정세권은 1888년 경남 고성에서 출생했다. 천재여서 3년 과정 진주사범을 1년 만에 졸업했다. 23살에 고성군 하이면 면장을 했고 그 후, 사퇴하고 상경한다.1920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부동산개발회사 건양사를 설립해서 근대식 대규모 한옥 단지를 개발한다. 도성 안에서는 일본인이 북촌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지금의 북촌이 그때 만들어졌다. 1940년대 이후에는 왕십리, 행당동, 뚝섬 지역의 땅을 집중적으로 매입했다. 뚝섬의 토지 3만 5천여 평은 일제에 빼앗겼다.해방 후에 성동구 왕십리, 행당동에 한옥 단지를 만들어서 정세권은 행당동에 거주한다. 그 후 1962년 귀향하기 전까지 살았다. 정세권은 행당동 사람이었다. 그는 물산장려운동을 주도했고, 조선어학회를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에 가담해서 일제로부터 고문을 당하고 건축허가를 빼앗겼다. 자세한 내용은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김경민 저>를 보면 알 수 있다.  새촌에 언제 집을 지었고 모습은 어땠까.새촌의 한옥 단지는 언제 만들었을까.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찾지 못했다. 남은 방법은 사람을 통해서 증언을 들어야 한다. 정희선(정세권의 손녀), 김경민 교수(저자)에게 이메일을 보냈으나 곧바로 답변을 받지 못했다. 동네에서 새촌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찾아야 했다. 뚝섬에서 오래 살았던 임인수(노인회 성동지회장)님으로부터 많은 얘기를 들었다. 새촌의 집은 20평 정도였고, 반지하도 있었다는 얘기. 물난리 이후에 만든 마을이 새촌이라고 했다. 취재, 사진 촬영하는 중에 새촌스포츠 사장님을 만났다. 가게에는 동네에서 50년 이상 사는 다른 분들이 있었고, 50년대 후반, 대학 시절에 새촌을 자주 왔었다고 했다. 새촌에 기동차 관사가 있었다고 했다. 주변은 모두 밭이었다고. 뚝섬에서 자랐던 김기욱 씨로부터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할지 도움을 받았다. 새촌에서 오륙십 년 이상 살았던 분들로부터 새촌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중에 개량 한옥에 살았던 P씨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집은 ㄷ자나 ㄱ자였다. 마당 맞은편에 장독대가 있고 아래에 지하실은 창고였다. 식수는 펌프였다. 방이 3개, 마루, 부엌이 있었다. 김후덕(85세) 어르신의 증언은 이렇다. 75년에 새촌에 들어왔다. 기와집인데, 30평형대였고, 해방 후에 지었다고 들었다. 20평, 22평, 25평도 있었다. ㄱ자 집인데 방이 두 개고 거실 마루가 있고, 마당이 작았다. 뽐뿌가 있었다. 대략 4, 50가구가 있었다. 개량 한옥에서 25년 정도 살았고 집을 다시 지었다. 둑이 없어서 한강에 나가서 아이들을 수영했고 어른들은 빨래를 했다. 2021년에 집을 팔고 아파트에 거주한다. 김만순(87세) 어르신 증언이다. 새촌에서 한 오십 년 넘게 살았다. 방이 네 개였다. 한옥으로 똑 같이 지어서 '새촌'이라고 했었다. 마루가 있었다. 우리 집은 새로 지었다. 새촌 사진이 많았었는데 다 버렸다. 뽐뿌물도 있었고 수돗물도 있었다. 삼 년 전에 아파트로 이주했다. 어르신들의 기억은 다르면서 비슷했다. 정세권이란 깨어있는 어른이 있어서 뚝섬에 새촌이란 동네가 만들어졌었다. 마을의 역사를 기억하는 분들이 적어지니까 내 마음이 바쁘다. 새촌에 백석 시인이 거주했었는데 다음에 더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정세권(출처 북촌한옥역사관 촬영)김만순(87세) 어르신이다. 새촌에서 오십 년 넘게 사시다가 집 관리가 어려워 최근에 아파트로 옮기셨는데 새촌 노인정에 매일 같이 다니신다. 오른쪽 골목에는 빌딩을 짓는 모습이 살짝 보인다. 

뉴스 | 서성원 기자 | 2022-06-13 17:36

청계천에서 바라본 청계천박물관. 자세히 보면 물가에 새가 앉아있다. 사진 찍는 중에 날아든 건 비둘기다. 위에 살짝 보이는 것은 두물다리, 청계천박물관 뒤편 높은 건물은 서울시도시관리공단. ⓒ서성원 ○소재지: 서울시 성동구 청계천로 530성동구에는 수도박물관, 한양대박물관이 있다. 서울하수도과학관은 박물관 기능은 약하다. 용답동에 국악음반박물관(사설)이 있다고만 들었다. 이렇게 박물관이 적은 성동구에서 청계천박물관은 의미가 남다르다. 오늘은 청계천변에 멋있게 서 있는 청계천박물관을 만나보자.2022년 5월 20일, 청계천박물관 박민아 학예사님과 통화를 할 수 있어서 고마웠다. 박물관으로 가려고 자전거에 앉았는데, 빗방울이 듣는다. 가는 길에 중랑천과 청계천 물길을 보려했었다. 청계천 물길을 따라 달리면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데, 시간을 따로 내야 할까 보다. 4층 1관에서 맨 처음 만나는 전시물. ⓒ서성원 청계천박물관이 존재하는 이유나는 박물관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내 천성과 관계가 있다. 나는 무얼 잘 버리지 못하고 쟁여놓는 편이다.청계천박물관에는 무엇을 쟁여놓았을까. (이 말은 박물관 직원에게는 이만저만 무례한 말이 아닐 터) 알다시피 청계천문화관(박물관의 원래 이름)을 만든 목적은 분명했다. 청계천 복원을 기념하기 위한 것. 2005년에 문을 열었다. 언제부터 박물관으로 바꿔 불렀을까. 2014년에도 문화관으로 불렀는데……. 청계천박물관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면 알겠지만, 그동안 기획전시도 많이 했다. 박물관 역할에 충실했다. 그래서 궁금증이 생겼다. 청계천을 복원한 서울시의 기술력, 경험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느 기관에서 관리하고 있을까. 청계천박물관 홈페이지에는 없는 듯하다. 청계천을 복원할 당시, 하는 게 옳으냐, 아니냐를 놓고 논란이 많았다. 공사는 2003년에 시작해서 2005년에 끝냈다. 복원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서둘러야 했냐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 어쨌든 도시 하천의 복원 경험은 우리의 자산이다. 그 자산이 어디에 있을까? 다른 나라에서 청계천 복원을 배우러 오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또 하나, 청계천 복원 공사할 때 발굴한 문화재는 어디에 보관할까. 학예사를 만났을 때 물어봐야 했는데.  수변도시 성동구와 청계천박물관이 협업(콜라보레이션)한다면우리 동네에는 뚝도정수장이 있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청계천에 물을 공급한다. 청계천을 유지하는데, 뚝섬이 한몫하는 것이다. 물이 흐르지 않는 청계천이라면? 뚝섬이 물을 대어 주어서 서울시민에게 인기가 많은 청계천이 되었다고 억지를 부리고 싶다. 그뿐만 아니다. 성동구 용답동에 있는 중랑물재생센터는 또 어떤가. 중랑물재생센터를 처음에는 청계하수처리장이라고 했다. 조선 시대에 청계천(그때는 이름이 '개천'이다)은 하수도 기능을 했다. 근대에도 비슷했다. 청계천의 정화에 청계하수처리장이 역할을 했을 것 같다. 이런 연유로 해서 수변도시, 물의 도시 성동구와 청계천박물관은 협업했으면 한다. 성동구는 청계천, 중랑천, 한강과 14.2 km를 수변과 접하고 있다는 것을 내세운다. 이제는 말처럼 수변 도시다운 인프라를 갖춰야 한다. '수변 도시'라면서 뭔가 내세울 만한 게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삼표레미콘 자리를 공원화해야 하는 지금이 좋은 기회다.물 흐르듯 관람해야 하는 청계천박물관청계천박물관은 지상 4층 지하 2층이다. 일반적으로 1층부터 관람한다. 청계천박물관을 다르다. 4층에서 시작한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기 때문이다. 4층 1관에 들어서면 대형 영상이 당신을 맞이할 것이다. 영상은 오늘로부터 과거로 돌아간다. 2005년, 90년대, 80년대, 50년대, 30년대, 마지막는 조선 시대로 간다. 자, 전시실로 들어가 보자. 1관 개천시대(開川時代), 2관 청계천(淸溪川), 청계천로(淸溪川路), 3관 청계천 복원 사업, 4관 복원 후 10년.살다보면 가끔씩 '물먹었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이럴 때, 청계천박물관을 찾아보시라. 거기서 물 흐르듯 아래로 흘러내리다 보면 당신은 뭔가를 얻게 될 것이다. 청계천박물관 전시물은 케케묵은 유물을 전시하는 곳이 아니다. 기억을 더듬으면 어릴 적에 살을 부비고 살았을 법한 그런 것들이다. 청계천변에 있었던 판잣집이 그렇고, 청계천변 노점상이 그렇고, 세운 상가의 옛 모습이 그렇다. 그래, 그땐 다들 어렵게 살았지, 라는 생각이 날 것이다. 사는 게 힘겹다면, 청계천박물관을 찾으시구려. 청계천 헌책방과 함양서림기획전시실에서 낮 익은 사진 하나를 발견했다. 함양서림. 청계천을 복원하기 전, 나는 청계천을 자주 들락거렸다. 헌책방이 있어서다. 전업 작가로 살고 싶었던 시절이다. 그때는 전업 작가가 늘어나던 시절이었다. 나는 책 사는 비용을 줄이려고 거길 번질나게 드나들었다. 그중에 우리 고향 분이 있었다. 책방 이름을 보고 알았다. 오늘 기획전시에서 그 서점 간판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청계천 복원 후에 나는 한 번도 헌책방을 찾은 적이 없다. 책방이 줄어들어서 그곳에 갈 맘이 없었고 또 영상시대로 변해 버린 탓이기도 하다. 현재 청계천변에는 16개 서점이 남았다고 한다. 그 사장님들의 뚝심에 경의를 보낸다. 내 휴대폰에서 함양서림 전화번호를 찾아보니까 없다. 그렇다면, 헌책방 갈 일이 있을 때 들러서 주인과 얘기를 나눴나 보다. 사장님 얼굴은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세월이 더 흐르면 내 추억과 기억들도 청계천 물처럼 어디론가 흘러가겠지. 시간 내서 헌책방에나 한번 가봐야겠다.판잣집체험관의 판잣집. 여러 번 갔었지만 안에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서성원. ⓒ서성원청계천 복원에서 남겨진 과제 ⓒ서성원기획전시 중인 사진 중 일부. 전용해 작가의 사진. 청계천변에 아직도 16개의 서점이 영업 중이라고. ⓒ서성원  

뉴스 | 서성원 기자 | 2022-05-24 19:26

안정사 터에 남은 향토유적 2호 위치도○소재지: 서울시 성동구 무학봉길 35 (왕십리 KCC 스위첸아파트 뒤편 암벽)2022년 5월 6일 오전에 안정사 터를 찾아갔다. 안정사 터라기보다 향토유적 2호를 찾아갔었다. 암벽과 암벽에 있는 마애불(磨崖佛)과 명문(銘文) 약사불(藥師佛)을 보기 위해서다. 길을 살짝 잘못 들어서 암벽 뒤편 언덕에 올라갔었다. 애기똥풀꽃이 지천으로 피어있었고, 하얀 아카시아꽃의 달콤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 왔다. 2010년 6월 29일에 암벽을 포함해서 세 가지 문화재를 성동구 향토유적 2호로 지정했다. 1번 마애불, 2번 명문, 3번 약사불의 위치. ⓒ서성원 사라진 안정사를 찾다가 등잔 밑이 어둡다는 걸 깨닫다  안정사(청련사) 얘기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전에부터 들었다. 절이 사라져서 안타깝다는 마음이 느껴지는 그런 말들이었다. 그렇다면 절을 왜 사라졌을까? 종교 시설은 제자리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는 게 일반적이다.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사연이 많다는 얘기다.관련 기사를 찾아봤다. 2009년 경향신문에 안정사와 문화재 기사가 실렸다. '재개발 철거 고찰에 '마애불'…고미술 문화유산 사라질 위기'. 내용은 간단한 편이었다.그러는 중에 한 사람을 떠올렸다. 성동신문사 이원주 대표이다. 왕십리에서 오랫동안 살았고, 옛날의 안정사를 알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안정사에 갔었던 일과 그때 남겨둔 사진이 있으면 혹시 제공해줄 수 있느냐고 알아봤다. 그랬더니 자료가 있다면서 PDF 파일을 보내왔다. 2007년 6월 1일부터 2011년 5월 11일까지 성동신문에 실린 여러 건의 기사였다. (이때는 성동신문이 인터넷으로 기사를 제공하지 않아서 검색해도 나오지 않았다.) 허허 참,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등잔 밑이 어두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눈으로 쉽게 알아볼 정도의 어둠이다. 나는 그런 면에서 아직도 너무 부족하다. 어쨌거나 안정사가 서울 외곽으로 옮겨가게 된 배경과 과정의 기록을 남긴 것은 성동신문 이원주 대표의 업적(?)이다. 성동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성동구를 떠나야 했던 안정사를 생각해본다.2007년 8월 31일자 성동신문. '아파트 부지 중 일부 건물은 철거중이다'라는 설명이 있다.소유권을 둘러싼 다툼 중에 아파트 건설 부지로 팔린 안정사터 안정사가 누구의 소유로 봐야 하는가. 결과적으로 그런 문제가 있었다. 불교는 여러 종단이 있다. 일반인이 많이 알고 있는 조계종이 있다. 그 외에 태고종이란 종파도 있다. 조계종과 태고종 간의 소유권 분쟁이 있었다. 분쟁은 정치와 관계가 있다. 이승만 정권 시절에 태고종을 불교 종단으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태고종은 법적으로 소유권 행사에 제약이 따랐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태고종이 법적인 지위를 회복했다고 한다. 이런 분쟁이 해결 실마리를 찾기 어려운 상황 중에 건설업 회사가 끼어든다. 그곳을 매입해서 아파트를 지으려 했던 것이다. 토지거래 허가 구역이었는데, 당시 성동구청이 거래를 허가했다. 이를 두고 당시 말이 많았다. 그리고 안정사를 철거하는 과정에 마애불과 약사불이 발견된 것이다. 이에 문화재를 보존해야 한다는 시민단체와 주민들의 요구가 거세게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안정사는 왕십리에서 경기도 장흥으로 떠나가고 말았다. (이 내용은 너무 길어서 다음 기회에 따로 다룰까 합니다.)성동구 주민에게 안정사는 무엇이었을까기록에 의하면 안정사는 신라 흥덕왕 2년(827년)에 창건했다고 한다. 역사가 깊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조선의 수도를 건설하는 과정에 관여한 무학과도 인연이 있다고 한다. 아시다시피 성동구는 태조 이성계, 무학과 인연이 닿아 있다. 일부 얘기는 설화로 전해 내려 오지만 말이다. 이전하기 전, 안정사 경내에 무학과 관련된 내용을 안내하는 설치물이 있었다고 한다. 안정사는 왕십리 나아가 성동구에서 의미가 있는 절이었다.그리고 일제 강점기, 김상옥 의사가 안정사에서 피신한 일이 있다고 한다. 마애불이다. 크기가 참 소박하다. 3번 사진에서 보듯이 작은 편이다. 하지만 크기가 작다고 가치가 적은 것은 아닐 터. 간 신앙과 결합된 형태라는데, 근접 촬영한 사진을 보면 마애불이 참 귀엽고 사랑스럽다. ⓒ서성원성동의 문화 유적, 관심 있는 분이 있다면 같이 답사하고 싶어'서성원의 엉뚱 발랄 성동 이야기'는 어떤 순서로 연재를 하고 있을까. 혹시 궁금한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현장에서 사진을 찍고, 취재하고, 자료를 찾아 저장하기, 이런 과정으로 거쳐서 한편의 글을 쓴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연재 순서를 정해놨다. 준비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고 번거로워서 그렇다. 원래 계획은 안정사 터 향토유적 2호가 아니었다. 그런데 성동구와 성동문화원이 공동으로 성동문화관광해설사 양성 과정을 열었다. 거기에 내가 강의를 맡게 되었다. 문화관광을 해설해야 하는 입장에서 필요한 것이 뭘지, 체크해 봤다. 그래서 안정사터와 향토유적을 선택했다. 이제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얘기다. 연재하면서 좀 외로웠다. 이런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말고, 주민 중에 성동의 문화와 역사, 문화재에 관심 있는 분들이 없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곤 했었다. 이번 경우만 해도 혼자서 안정사가 있었던 곳, 암벽을 찾아 나섰다. 성동의 문화 유적에 관심 있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몇 사람이라도 답사 모임 같은 것을 만들면 좋겠다. 문화관광 해설사분들이라면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뉴스 | 서성원 기자 | 2022-05-12 13:09

도전- 그림 최제희내가 그 사람을 만났을 때, 그는 지극히 평범했어요. 키도 그렇고 심지어 얼굴까지도요. 하는 일도 그랬구요. 보통 사람들이 다닐법한 그렇고 그런 직장에 나갔으니까요. 그래도 남다른 뭔가를 들추어내야 한다면? 뭐가 있을까. 그래요. 하나가 있었어요. 사진. 그는 사진 찍는 걸 좋아했어요. 자기 딴에는 열심이었어요. ‘꿈’ 같은 걸 가진 남자였어요. 월급을 쪼개어서 적금 들죠. 목돈이 되면 하나 장만하고, 이렇게들 살잖아요. 누구나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나는 그 남자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고, 그 남자와 같은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결혼 후, 출근하지 않는 날에는 카메라를 메고 나가더라구요. 돌아와서 사진을 인화했습니다. 대학노트 크기로 인화해서 들여다보기도 하더라구요. 그게 다 돈이었어요. 사진 찍으러 나가면 교통비와 밥값이 들었고, 인화하는데도 돈이었죠. 사진은 돈 나가는 일이었어요. 프로 작가면 그렇지 않댔어요. 그는 작가이긴 한데 거기까진 아니었죠. 가장으로서 양심이 있었는지, 자기 스스로 카메라를 놓더라구요.그런데 이번에는 반대로 날마다, 책상에 납작 엎드려서 낑낑댔습니다. 밖에 나가는 날엔 책 꾸러미를 들고 들어왔어요. 나중엔 헌책방을 돌기도 하더군요. 세월이 갔어요. 그가 쓰는 글이 작은 책에 실리기도 했어요. 푼돈이 들어왔어요. 그래도 그게 어디냐고 할 수도 있죠. 그러는 사이, 공모에 당선되어 책을 한 권 냈어요. 상금도 꽤 두툼했죠. 그러자 그는 서울로 직장을 옮겼고 이사를 했지요. 그가 책을 내는 데 서울이 유리했거든요. 그런데 장르가 자기 성향에 맞지 않는다고 소설로 바꾸더군요. 이젠 푼돈도 들어오지 않았어요. 그러면서 그가 이렇게 말했어요. 출근하려니까 흐름이 끊겨 미치겠어. 직장 그만둬야 할까 봐. 하지만 성과는 미미했죠. 세월이 흘러갔죠. 그는 책과 원고지에 묻혀 살아서 집안에 크고 작은 일은 내 몫이 되었어요. 같이 여행가는 건 고사하고 그 더운 여름날, 피서 한번 가지 못했어요. 그러면서도 기다려보래요, 베스트 셀러 하나 만들어서 지금까지 고생을 보상해 준다는, 그런 것. 세상이 확 바뀌었죠. 영상 시대가 왔어요. 티비 드라마, 재밌죠. 영화는요. 끝내주죠. 따분하게 누가 소설은 읽어요. 인터넷 세상이 되었죠. 유튜브에 영상이 넘쳐나죠.나중에 알았어요. 꼬맹이 시절에 그는, 산골 마을에서는 볼 게 없었대요. 하늘을 지나는 비행기만 보였대요. 비행사가 되고 싶었대요. 산골을 벗어나려면 날개가 필요했죠. 성인이 되어서 그는 도시로 나왔죠. 하지만 몸은 산골과 다름없는 현실에 묶여 있어야 했지요. 그래서이겠죠. 그는 아직도 무지개를 잡으려는 꼬맹이로 살면서 낚싯대를 놓지 못하고 있어요. (9매)최제희 작가♤ 프리랜스 일러스트레이터 ♤재밌는 생각으로 행복과 밝은 에너지를 그리는 일러스트 작가. 연무장길에서 <티티팩토리>를 열고 활동하고 있음. ♤ titijehee@naver.com서울숲 작가○ 글 쓰고 사진 찍는 작가 ○ ‘울숲’은 동네 울타리가 되는 숲, 성수동 사람으로 살면서 TBS FM에서 방송하고 다른 방송 TV 리포터를 하고 있음. ○ in.seoulsup@gmail.com

뉴스 | 서성원 기자 | 2022-04-26 18:22

아기장수 바위가 있는 산에서 시가지를 내려다본 모습. ⓒ서성원 ○ 소재지: 서울시 성동구 한양대학교 정문 입구 오른쪽아기장수 바위 위치도행당1동 한양대 정문 근처에 아기장수 바위가 있다는데언제일까. 성동문화원 홈페이지에 '행당1동 한양대 정문 오른편 숲속'에 아기 장수 바위가 있다고 소개해 놨다. 그곳을 찾아갔다. 숲 바깥에서 보니까 나뭇잎이 무성해서 바위가 보이지 않았다. 나뭇잎이 떨어진 가을날, 다시 가서 볼 수 있었다. 제대로 보려면 숲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숲 바깥, 길에 서서 어렴풋이 보았다. 나무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을 땐 혹시 바위가 사라졌나 싶었다. 요즘의 건설장비로 바위를 없애려면 간단한 일이니까. 바위를 눈으로 확인해서 마음이 놓였다. 나참, 까짓거 바위 그게 뭐라고. 행당1동 아기장수 바위는 언제쯤부터 그렇게 불렀을까. 대를 이어 살아온 동네 어르신에게 여쭤보면 알 수 있을까. 여쭤볼 어르신을 수소문하는 것부터가 나에겐 난관이다. 수레와 사람들이 드나들던 고개마을어쨌거나 옛날 이 동네 모습을 미루어 짐작을 할 수 있다. 이런 것이다. 아기장수 바위가 있는 동네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곳이었다. 수선전도의 지도를 보자. 차현(車峴)이 있다. 차현이 이곳쯤으로 보인다. 차현의 진짜 동네 이름을 뭘까. '수렛재'쯤 될 것 같다. 아니면 '수레너미'로 불렸을 수도 있겠다. (우리말 땅이름을 물어볼 수 있는 사이트는 어디에 있을까. 국립국어원에서는 못 찾았다. 이럴 때, 동네에서 대대로 살았던 분이 필요한데……. 사람을 만나기 어려우니 이기봉의 '슬픈 우리 땅이름'을 사야겠다.) 이곳의 풍경을 이랬다. 수많은 수레가 오갔다. 오가는 수레들로 가득 찬 고개, 그 풍경은 장관이었다. 그래서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이 '수렛재'로 불렀을 것이다. 이것이 동네 이름으로 굳어졌을 수도 있다. 이곳에 왜 수레가 많았을까. 강원도, 충청도에서 세곡이 광나루나 뚝섬나루에 도착한다. 세곡이 도성으로 들어가려면 살곶이다리(전관교, 箭串橋)를 건너서 전관원(箭串院)이 있는 동네, 수렛재를 통과했던 것이다. 이렇게 수렛재는 사람과 짐들이 오가는 그런 동네였다. 갓과 도포를 걸친 사람들이 사는 동네가 아니었다. 내 마음대로 엉뚱하게 상상을 하고 나서, 글쓰기를 끝내려고, '한국 땅이름학회'에 전화를 걸어서 물어봤다. 그랬더니 원래 고개 이름이 '수리재'였다고 한다. 수리는 꼭대기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것이 수렛재로 불렸고 한자로 바꾸니까 차현(車峴)이 되었다고. 그러니까 수선전도를 만들었던 그 시대에는 고개를 그렇게 불렀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나의 상상은 한자로 된 동네 이름이 불러일으킨 참극이다. 비참하다. 우리 땅이름이 참으로 슬프구나.세상을 바꿀 영웅이 나타나기를 바랐던 사람들힘 있는 자들이, 제 배 채우느라 시뻘건 눈으로 날뛰는 시대가 있었다. 백성들은 힘겹다 못해 죽을 지경이었다. 나라에 내야 하는 세금을 감당하기 버겁다. 수레로 짐을 실어나르는 하층민은 농민보다 더 그랬다. 그러자,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생각하게 된다. 바른 세상을 만들어 달라고 여럿이 뭉쳐서 일어선다. 세금을 깎아달라고 말로 해봤지만 먹혀들지 않게 되자, 죽창을 쥐고 관청으로 몰려간다. 이것을 역사에는 민란으로 적어놨다. 민란은 반란이고 혁명이다. 그런 사람들을 '역적'이라 불렸고, 반란에 가담한 사람들의 최후는 처절한 죽음이었다. 민란은 이렇게 실패만 거듭했다. 민란은 피에 젖어서 끝났다. 하지만 백성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풀어지지 않은 응어리는 가슴에 남았다. 그렇게 처절한 시대가 끝나고 겉으로는 평화로운 시절이 왔다. 처진 어깨를 한 수렛재 사람이 바위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바위에 자국이 있지 뭔가. 손자국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발자국 같아 보였다. 바위는 늘 그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있었지만, 마을 사람들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맞네, 맞아. 틀림없구먼. 이렇게 할 수 있는 건, 아기장수 말곤 없지. 그렇고말고.”그 뒤, 마을 사람들은 그 바위를 '아기장수 바위'라고 불렀다. 오늘날 아기장수는 어디에 있을까아기장수가 또 나타날까. 혹시 우리 곁에 지금도 있는 건 아닐까. 누구일까. 혹시 당신, 겨드랑이 간질간질하지 않나요? 날개가 돋아나려는 겁니다. 겨드랑이가 간지럽다면 당신은 운명으로 받아들일 건가요. 당신은 하늘과 땅에서 활동할 능력을 갖췄어요. 그런데 기득권 세력은 어쨌거나 당신에게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 하겠죠. 내 권위에 도전하는 위험인물이라고 생각되면 다양한 힘으로 견제하겠지요. 무너뜨리려 하겠지요.  그렇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 나를 존재하게 한 그 무엇(부모님)에게 죽여달라고 부탁하실 건가요? 어느 쪽인가요? 아기장수 바위 설화 옛날 임금과 벼슬아치들이 백성을 종처럼 부리던 시절에 외진 마을 한 농부의 집안에 아기가 태어났다. 아무리 아기 탯줄을 자르려 해도 되지 않자, 억새풀을 베어다가 자르니, 그제서야 잘라졌다고 한다. 태어난 아기는 겨드랑이에 용(龍)의 비늘이 달려있어 천장을 날아다니는 재주를 부렸다. 그 소문은 마을 사람들에 의해 벼슬아치들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영웅이 태어났다는 소문을 들은 임금님은 힘센 장군을 뽑아 우투리를 잡으려고 했다. 우투리는 그 사실을 알고, 숨어버렸고, 어머니에게 콩을 한 말 구해 와 볶아 달라고 해서 갑옷을 지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콩을 볶다가 톡 튀어나온 한 알을 먹었는데, 왼쪽 겨드랑이 날갯죽지 바로 아래를 못 가렸다. 콩으로 갑옷을 해 입은 우투리가 어머니에게, 내가 싸우다 죽거든 좁쌀 석 되, 콩 석 되, 팥 석 되를 같이 묻어 주고, 100일 동안 아무에게도 가르쳐 주면 안 된다고 하며, 싸우다 콩 한 알 때문에 갑옷에 틈이 생겨 죽고 말았다. 그래서 우투리 말대로 바위 밑에 좁쌀·콩·팥을 묻어 주었다.  그런데 백일에서 하루 모자라는 99일째 되는 날, 백성들 사이에서 우투리가 아직 살아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임금은 화가 나서 군사들을 데리고 가서 우투리 부모님을 죽이려고 하자 바위 밑에 곡식을 묻은 사실을 말해 버리고 말았다. 장수들이 바위를 열려고 아무리 해도 안 되자, 억새풀로 바위를 자르니, 그 속에 소문대로 우투리가 죽지 않고, 콩은 갑옷이 되고, 좁쌀은 군사가 되고, 팥은 말이 되어 군사훈련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위가 열리는 순간, 그 많은 병사들과 우투리가 스르르 눈 녹듯이 녹아서 형체가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출처 성동문화원)   아기장수 바위가 있는 곳을 아래쪽에서 바라본 풍경. ⓒ서성원한양대로 오르는 길은 이렇게 비탈이다. 축대가 필요하다. ⓒ서성원아기장수 바위가 있는 숲의 일부, 고목을 살리기 위해 줄기를 잘랐나 보다. ⓒ서성원 숲 바깥에서 찍은 아기장수 바위. ⓒ서성원 축대를 아기 바위들로 쌓았다. 대학은 아기장수를 길러내야 하는 걸까, 아기장수가 나오지 못하게 막아야 하는 걸까. ⓒ서성원수선전도(首善全圖)중, 현재 성동구 행당동에 해당하는 부분. 

뉴스 | 서성원 기자 | 2022-04-26 18:19

보스의 노골적 취향1 / 최제희그 호텔은 로비가 아름다웠습니다. 널찍하고 천정이 높았지요. 그런 것 말고도, 뭔가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호텔 이름은 밝힐 수 없습니다.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됩니다. 로비 한쪽에 작은 무대가 있었습니다.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음악이 울려 나오는 곳입니다.호텔 주변에 벚꽃이 피어날 땝니다. 저녁 시간, 밤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시간에 좀 이상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얼굴 없는 가수입니다. 얼굴이 없는 게 아니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뒤돌아서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공연 안내 팻말에는 ‘한 사람만의 천사’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그녀의 노래에는 장미꽃 향기가 났습니다.장미꽃보다 붉은 드레스를 하늘하늘 입고서 노래하는 그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은 바라보노라면, 사람을 애타게 만드는 게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를 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연 막바지, 하늘에 닿을 듯 높은 청장에서 그네가 내려옵니다. 그녀는 그곳에 걸터앉아 노래합니다. 그런 뒷모습을 보노라면 그녀는 분명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상의 현실 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천사, 너무나 화사하고 사랑스러워 아찔한 천사였습니다.‘한 사람만의 천사’의 공연으로 호텔을 찾는 사람은 눈에 띄게 늘어났습니다. 그것은 기꺼운 일이지만 한편으로 불안했습니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만의 천사’가 노래하면, 사람들은 눈짓을 주고받으며 엄지를 치켜올렸습니다. 노래가 최고라는 뜻이겠지요. 아닙니다. 장미꽃 노래 향기에 취한 사람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물었던 것입니다.“도대체 누구에요?”정말 궁금했으니까요. 대답하는 사람은 주위를 쓰윽 둘러보면서, 입에 집게손가락을 댄 뒤, 엄지를 치켜올렸습니다. 호텔 정원에 장미가 필 무렵의 일입니다. 아, 큰일 났습니다.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노래까지 잘하는 그녀는 나의 여자 친구였습니다. 그리고 예비 신부였습니다. 그녀가 눈물 흘리면서 나에게 간청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무대에 한 번 서 보고 싶다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좋아. 대신에 얼굴은 공개하지 않기다. 넌 너무 예뻐서 내가 불안하단 말이야.”여자 친구는 정말로 호텔 로비에서 노래 부를 기회를 얻었습니다.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요. 그런데 손님들이 가수가 누구냐고 물으니까, 호텔 직원은 집게로 입을 가린 뒤,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손님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엉뚱하게 알아들었습니다. 아하, 그래요? 군인 출신 최고 권력자의 딸이라고요. 일이 그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일이 만약에 최고 권력자의 귀에 들어간다면? 목이 몇 개라도 살아남기 어려웠습니다. 나는 여자 친구와 함께 해외로 도망갔습니다. 장미꽃 향기가 나는 노래, 아름다운 미모 때문에 신혼집이 아니라 우리는 지옥으로 갈 뻔했었습니다. 지금은 다 지나간 옛일입니다. 벚꽃 계절이 가고 나면 올해에도 장미의 계절이 오겠지요. 그 호텔 가서 아내랑 커피라도 한잔 마시려 합니다. 최제희 작가♤ 프리랜스 일러스트레이터♤재밌는 생각으로 행복과 밝은 에너지를 그리는 일러스트 작가. 연무장길에서 <티티팩토리>를 열고 활동하고 있음.♤ titijehee@naver.com서울숲 작가○ 글 쓰고 사진 찍는 작가○ ‘울숲’은 동네 울타리가 되는 숲, 성수동 사람으로 살면서 TBS FM에서 방송하고 다른 방송 TV 리포터를 하고 있음.○ in.seoulsup@gmail.com

뉴스 | 서성원 기자 | 2022-04-13 21:10

1968년 뚝섬수영장, 뒤편의 숲이 너무 멋지다. 한강변에 저렇게 풍성한 숲이 있었다니 놀랍다.(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소재지: 서울시 광진구 강변북로 139 (자양동)'뚝섬'은 참 이상한 곳이다. 파고 파도 얘기가 끝이 없다. '성동 이야기' 연재를 시작할 때, 삼 회 정도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짐작이었다. 내가 뚝섬유원지를 연재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21년 여름쯤이다. 동네 사람들에게 '뚝섬' 얘기를 여쭤보면 어김없이 뚝섬유원지 얘기가 나왔다. 그때서야 나는 알았다. 뚝섬에서는 뚝섬유원지를 빼놓고는 얘기가 안 된다는 걸. 뚝섬유원지 위치와 시설들(출처 한강사업본부)뚝섬유원지를 그린 한국화를 만나다지난해 6월 초다. 뚝섬애향회 정진섭 님과 정대호 님을 만나, 뚝섬의 550살 회화나무를 취재하던 중이었다. 태진운수 강당에서 한국화를 봤다. 뚝섬유원지를 그린 풍경이었다. 이번에 글을 쓰면서 그림을 자세히 보았다. 늦은 가을, 잎을 떨군 나무들이지만 숲을 이루고 있다. 숲속에 '개미집'이 있는데 마당에 펌프, 강변에 놀이배들이 묶여있다. 지금의 뚝섬유원지의 아주 다른 모습이다. 그림을 언제쯤 그렸을지 알아낼 수 있었다. 강 건너 잠실주경기장과 야구장이 있다. 경기장은 84년에 준공했다. 그런데 뚝섬유원지에서 숲이 사라진 것은 한강종합개발 사업 때문이다. 이 사업은 1986년에 끝냈다. 그렇다면 그림 제작은 84년이나 85년쯤이다. 이번 기회에 최천식(전 구의원) 작가에게 연락해서 당시 뚝섬유원지에 대해 증언을 들었다. 그림 제목을 물었더니 '개미집'으로 불러달라고 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뚝섬유원지는 서울 최고의 유원지였다고. 얘기를 들어보면 유흥을 위한 놀이시설이 있었고 숲, 강물, 백사장 그리고 먹거리까지,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있으니, 놀고먹고 즐기기엔 그만한 곳이 없었다. 채수원 작가의 어린 시절 기억, 한강철교 아래 강물이 오염되어, 수영을 할 수 없게 되자 뚝섬으로 몰렸다고. 뚝섬유원지에서 추억 하나 없다면 서울시민 아니지 서울에 오래 살았던 사람들은 말한다. 수영장이 있어서 좋았다, 어떤 사람들은 드넓은 백사장이 있어서 멋진 곳이었다고 했다. 데이트 하기에 좋았다고. 그러다 뚝섬유원지가 왜 인기가 있었는지 깔끔하게 정리해서 말하는 분을 만났었다. 이번에 기사를 쓰면서 그분과 다시 통화를 했다. '예아네 꽃집'을 운영하는 홍종혁 님이다. 그분은 이런 요지로 말했다. 뚝섬유원지는 나무 그늘이 있어서 다른 한강 유원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교통이 편리했다. 기동차에서 내리면 바로 뚝섬유원지였다는 것. 기동차가 1968년까지 운행했으니 아득한 시절의 얘기이긴 하다.'그때 뚝섬유원지는 20만 평의 넓은 백사장과 4천여 그루의 방풍림이 둘러쳐져 있고, 서울 시내 다른 유원지들과 달리 돈을 받지 않았기에 한때는 연인원 3백 만 명 가량이 찾을 정도로 시민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는데요. 특히나 한강 변에 있어 여름에는 물놀이를, 겨울에는 스케이트와 눈썰매를 즐기려는 인파로 북적였다고 합니다.' (출처, 한강사업본부 블로그)뚝섬유원지는 언제부터 인기가 있었을까?뚝섬을 드나들던 기동차는 일본인이 부설했다. 일제 강점기 때다. 그런데 뚝섬유원지에 대한 얘기를 쓰기 전, 자료를 찾는 중에 좀 특별한 논문 하나를 발견했다.'유원지의 수용과 공간문화적 변화 과정 - 창경원, 월미도, 뚝섬을 중심으로'. 김정은의 2017년 서울대 박사과정 논문이다. 기동차에 대해서는 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일본 회사가 부설한 사설(私設) 철도였다는 것. 그런데 논문에서 놀라운 걸 발견했다. 뚝섬유원지가 생겨난 까닭이다. 이게 기동차를 운영을 위해 만들었단다. [경성궤도는 1933~1934년 뚝섬에 수영장 등의 시설을 해 유원지를 조성하는데, 새로운 시설은 궤도의 운영과 밀접하게 연계된다. 1933년 뚝섬 수영장의 개장을 맞아 동대문역-동뚝섬(동독도리)역까지의 왕복 요금을 할인해주거나 운행 시간을 연장하기도 했다. 1934년 동뚝섬에 수영장, 아동 유희장, 매점 등을 갖춘 유원지를 조성한 뒤에는 유원지역까지 궤도 노선을 확장하고, 궤도차 이용자들에게는 유원지의 입장료를 받지 않기도 했다.'(출처 김정은 논문)]이때 어떤 시설들이 있었을까. 역시 논문에 나와 있었다.['유원지 - 유원지역전(遊園地驛前) 한강 강안 1만여 평의 광활한 땅에 자리한 본사 직영의 유원지에는 청례한 구슬 같은 어린이 수영장, 낚시 못, 분수탑, 각종 운동 기구, 정원, 운동장, 식당 등의 설비가 갖춰져 가족이 함께 놀러가기에 더없는 명랑한 유원지다. 특히 흰 돛단배가 오가는 한강의 전망은 더할 나위 없다. 입장료는 5전. 동대문 및 왕십리부터 유원지까지 왕복 승차권 소지자는 무료 입장.'(출처 김정은 논문)]그러니까 현재 우리가 추억의 장소로 그리워했던 그 뚝섬유원지. 알고 보니 일제의 잔존물이었다. 일본인이 저들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만든 인위적인 시설이었다. 해방 후에도 뚝섬의 유원지 시설은 유지되었고, 그런 시설이 있으니까 서울시민들은 찾았던 것이다. 논문에서 이것까지 밝히고 있다. '유원지(遊園地)'라는 말이 일본에서 들어온 말이라고.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말이 없었다고 한다. 일제가 이 땅에 저질러 놓은 야욕의 문화가 우리에게 깊게 뿌리박혀 있었다. 그러면 뚝섬유원지에서의 추억은 어쩌란 말인가. 그렇지만 이런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기는 알아야 할 것 같다. '뚝섬유원지'와 '뚝섬유원지역'이란 이름에 대하여'뚝섬유원지'는 진짜 이름이 따로 있었다. '뚝섬한강공원'이다. 1992년부터 공식 명칭으로 정했다. 벌써 몇 년 전인가. 그런데도 뚝섬한강공원으로 부르는 이들은 의외로 적다. 젊은 세대들은 다르겠지만 뚝섬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거의 '뚝섬유원지'라고 한다. 우리들만 그럴까. '뚝섬유원지'는 서울시민의 뇌리에 깊게 뿌리 박혀있다. 그래서 또다른 일이 벌어졌다. 지하철 7호선 '뚝섬유원지역'이란 역명이다. 원래는 '자양역'이었다. 개명 청원이 있어 바뀐 것이다. 개명을 요구한 까닭은 알만하다. 오늘도 한강은 흘러간다. 아픈 역사는 흘려보내고 그냥 맘 편하게 사는 게 최고일까. 유원지든, 공원이든 그런 거 따지지 말고.뚝섬유원지, 아니지 뚝섬한강공원은 지금도 멋지다. 그 곳에 김성복의 작품이 있다. ‘바람이 불어도 가야 한다’우리는 바람이 불어도 가야 할 곳으로 가야 한다.최천식 ‘개미집’ (정진섭 소장)진헌마정색도, 1678년 그 무렵 뚝섬 한강변에 목장을 보호하려고 버드나무를 심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이후, 일제 강점기에도 나무를 심었다.1960~70년대 인기 피서지 뚝섬유원지 뱃놀이, 1968, 한치규 제공(출처 연합뉴스)1968년 뚝섬수영장(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뚝섬유원지에 백사장이 얼마나 넓었던가. 1962 여름. (출처 국가기록원)뚝섬유원지의 보트, 1956년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뚝섬유원지에서 기념촬영. (출처 한국문화원연합회)현재 뚝섬유원지, <바람이 불어도 가야한다>, 김성복 작품, ⓒ서성원.현재 뚝섬유원지, 암벽등반장, ⓒ서성원 

뉴스 | 서성원 기자 | 2022-03-23 19:08

전시장에서 최제희 작가. ⓒ서성원일러스트 작가 최제희의 작품은 개성이 뚜렷하다. 작가의 일러스트가 책 같은데, 실려있다면 가려내기가 어렵지 않다. 그럴 정도로 작가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작가 자신은 아니라고 한다. 작가의 자기만족 기준이 높다고 봐야겠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이번 인터뷰도 완곡하게 거절했었다. 하지만 내가 부탁을 했었다. 허락을 받자마자 2022년 3월 8일, 전시회가 열리는 충무로 <수잔나의 앞치마>로 부리나케 찾아갔다. 유자차와 빵을 앞에 두고 꽤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중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Q: 어떻게 카페에서 전시하게 되었을까요?“여기 왔는데, 마음에 들었어요. 여기서 전시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구요, 그런데 지인이 역할을 해줘서, 이뤄지게 되었지요. 제가 카페를 좋아하긴 해요.”작가의 카페 사랑은 성동구에서 지역 활동 할 때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카페를 소재로 한 일러스트를 여러 번 봤다. <수잔나의 커피>는 복합문화 공간이다. 일반 3층 건물을 카페로 리모델링해서 분위기가 달랐다. 방송에서도 소개될 만큼 유명한 곳이라고. Q: 이번 전시에 출품한 작품 중에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고래를 설치식으로 작업한 게 있는데, 남편 손을 빌렸구요, 아이들도 밤새 박스를 만드는 걸 도왔어요. 과정이 특별한 작품이었고 작업이었어요.”그걸 나는 '물고기'라고 했었다. 작가의 말을 듣고, 나는 작가 가족들에 뭔가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저는 고래와 물고기도 구분하지 못하는 인간입니다요, 네에, 그러믄요.Q: 그림을 판매도 하나요?“그럼요, 저 생계형 작가에요.”그래, 작가의 작품이 팔리기도 하고, 작품을 만들어 달라는 클라이언트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동화 같은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기를 기대해 본다. '생계형 작가'라는 말이 내 머리에 깊게 들어와 박혔다. 코로나로 다들 어렵지만, 특히 예술가들은 그 어떤 직종보다 힘겨울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가들의 생계가 나아지려면 코로나가 풀려야 하려나, 난감하네.최제희 작가가 좋아하는 하트로 구성한 설치 작품. ⓒ서성원  Q: 일러스트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대학을 마치고 조교를 했는데, 살아갈 길이 막막했어요. 언젠가 인사동을 갔는데, 일러스트 전시를 보게 되었어요.”그래서 서양화에서 일러스트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일러스트를 따로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일러스트는 생활인으로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작가의 길 Q: 그림은 작가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가?“그림으로 마음을 풀어내죠.”어떤 뜻인지 아니까 추가 질문을 안 했다. 아마도 더 많은 얘기를 내포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야 생각하니 아쉽다. 문득 사진이 떠오른다. 작가와 작가의 지인들을 한 프레임에 넣어 찍었던 적이 있다. 때로는 말하지 않아도 보이는 게 있다. Q: 음악 듣는 거 좋아하시죠? “너무 좋아하죠. 음악이라면 다 좋아요. 저는 태평소를 10분 들어본 적도 있어요.”“듀란듀란을 좋아해요. 노래를 들으면서 작업했어요. '나를 노래하다'요. 최근에 성동신문에 실었던 'dream'은 신명나게 그렸어요.”나는 가요를 좋아한다. 어쩌다 마음에 드는 곡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러면 10분이 아니라, 며칠은 행복하다. 노래 하나로 한 계절을 행복하게 보낸 적도 있으니까. 그래서 음악을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만나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음악을 들으며 작업하고 카페에서도 작업하고Q: 그림 작업하면서 기억나는 게 있겠지요?“옆도 안 돌아보고 그림만 그렸던 거 같아요. 4학년 때 학교에서 가건물을 작업장으로 내어 줬어요. 추웠던 겨울엔 호일을 감아서 겨울나고, 촛불 키고, 그렇게 살았어요. 그래도 그때가 젤 재미있었던 거 같아요.”“93년돈가 동생이 천마산 스키장에서 알바를 하고 통으로 된 앞치마를 가지고 왔었거든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것 하나만 쓰고 있어요.”앞치마 얘기를 들으면서 그게 궁금했다. 말하진 않았다. 그런 앞치마를 입고 싶어도 입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작가가 알까. 그리고 내가 내 몸처럼 생각하고 버리지 않는 게 뭘까. 누구나 하나쯤을 있을 것이다. 전시장 모습. ⓒ서성원  93년에 동생에게 선물 받은 앞치마, 지금까지 그것 하나로 써요. Q: 작가의 일러스트는 동화적 상상의 세계를 그린 것이 많다. 이것은 작가의 의도인가, 아니면 작가의 성향인가? “성격이 밝진 않아요. 대학 때도 어두운 색을 많이 써서 질책을 받기도 했거든요. 일러스트를 하다 보니까 이렇게 바뀐 거 같아요. 회화하고는 이게 다르잖아요. 일러스트는 의뢰인에게 맞출 수밖에 없어요. 사람들이 아무래도 밝은 걸 원하잖아요. 이런 압박감 때문에, 내가 길들어진 것 같아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압박감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다는 못 벗어난 거 같아요.”Q: 혹시 작품 쪽에서 앞으로 계획 같은 게 있다면?“제가 안으로 내재 돼 있는 게 많은데, 그걸 확 털고 나서야 하는데, 그게 안 돼서, 작품에서도 많이 보일 거예요. 그림하는 친구들이 그래요. 넌, 왜 이렇게 답답하니, 그런 얘기들을 많이 들었거든요.”“주인공이 있으면 옆에 배경들은 조연들이잖아요. 너는 주인공을 부각시켜야 되는데, 다들 튀어나오려 하잖아, 그랬어요. 제 생각은 그래요. 얘들도 주인공처럼 나오고 싶을 거 아냐, 얘들도 소중하니까 나오게 하고 싶어요. 그래요, 아직은 제가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는 거 같아요, 아직까지는. 그리고 새로운 걸 개척하는 것보다 지금까지 해오던 걸 계속하고 싶어요.”조연들도 배려하는 마음 따뜻하고 맑은 심성의 작가이런 답변이 나온 데는 까닭이 있다. 나는 작가에게 작품에서 새로운 길을 열어보면 어떻겠냐고 물어봤었다. 현재의 작품 속의 캐릭터는 순수하고 맑은 소녀 이미지가 강하다. 이것을 20대 초반의 숙녀쯤으로 가면 어떻겠느냐고. 캐릭터의 배경은 동화적 상상의 세계를 유지하고 캐릭터만 성인의 세계에 막 발을 들여놓는 캐릭터(어떤 면에서 이질적인 조합이다)라면 유니크한 그림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제안이었다. 작가의 답은 앞에 그대로다. 현재 자기의 세계를 유지한다는 것. 하지만 작가님, 성동신문 연재할 그림은 앞으로 그런 그림으로 시도해주세요. 부탁입니다. 예상 밖의 피드백이 있을지 모르잖아요. 덧붙이는 말-2022년부터 성동신문에 최제희 작가의 작품을 연재하고 있다. 그림이 있고 여기에 맞춰 내가 글을 쓴다. 글에 그림을 얻는 게 일러스트였다면 이것은 반대다. 그림이 주인공이고 글은 조연이다. “앞으로는 전시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은 들어요. 전시를 위한 작품도 해야겠지요. 전시라면 전시 공간에 어울려야 하는데, 아직은 부족한 게 있죠. 사람이 쇼맨쉽이 좀 있어야 하는데, 제가 그게 그래요.”“내년에는 '감정 한 스푼'으로 해서 (전시)해보려구요.”Q: 일러스트는 어떤 매력이 있는가?“회화는 사람들이 (작가의 의도를) 잘 모를 수도 있어요. 작가의 입장에서도 그래요, 사람들이 내 그림을 보고 (작가의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좀 그래요. 그런데 일러스트는 좀 친절한 편이잖아요. 일러스트 만의 재미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Q: 일러스트 작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꼭 대학을 나와야 하나 싶어요. 일러스트는 생계에는 도움이 되지 싶긴 한데.…”Q: 작품은 언제 작업하는 편인가(제작 의뢰가 들어와야 하는가, 등등)“(크게 웃으며) 밤에 많이 하죠. 카페에는 음악도 있고, 여기서 끼적이기도 해요. (이게 작품의 출발 혹은 촉발이지요.)내년에는 '감정 한 스푼'이란 제목으로 전시할까 싶고, 대중과 자주 만날 생각Q- 그 외에 하고 싶은 말은?“일러스트 작품에 대한 보수(가격)가 대체적으로 너무 낮아요. 작가에 대한 대우, 위치가 아직도 낮아요. 안타깝죠.”최제희 작가는 전시회를 자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충무로에 가서 작가의 작품을 만나게 된다면 그건 행운이다. 행운을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티비에서는 선거 개표 방송 중이다. 날이 밝아오는데, 구급차 싸이렌이 요란하다. 구급차 두 대가 우리 아파트로 들어온다. 그리고 방호복을 입은 구급대원이 들것을 챙겨서 내린다. 코로나가 끝나야 그나마 작가들 형편도 나아질 텐데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할까. 우울한 봄이 오고 있다.○ 최제희는? 경기대학교 서양화과 졸업 및 경기대 조형대학원 미술학과 졸업 프리랜스 일러스트레이터 성수동 연무장길에 <티티팩토리>를 열고 활동중. titijehee@naver.com www.instargram.com/titijehee○ 양은연이 말하는 최제희 '그녀의 세계에서는 커피잔 하나, 하트 문양, 활자, 사람, 풍경, 자연들이 크기, 색감의 강약이 제한없이 자유롭고 평화롭다. 주제와 비주제의 구분 없이 하나 하나 소중하게 다루어진 그녀의 그림은 그녀의 배려심과 닮아있다. 배려심은 사랑이다.''최제희 작가의 하트는 그녀의 그림에서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최제희 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우리는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는 평화롭고 행복한 마음의 안식처, 마음의 위안처에 이미 가 있게 된다. … 그녀의 그림 안에 들어가있고 싶은 향수를 느끼게 되는 것은 우리 내면 안에, 우리의 마음 안에 이미 최제희 작가가 꿈꾸는 마음의 위안처를 우리도 또한 알고 있고 꿈꾸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양은연-독일 브레멘 국립조형예술대 석사, 마이스터슐러 졸업. 현재 대학 출강 중.최제희 작가 포트폴리오 엿보기프뢰벨, <눈과마음> <좋은생각> 삽화 작업, '내 이름은 김삼순' 소설 표지화(눈과 마음), 대한적십자사 행사 스크린 작업, 삼성 애티콘 캐릭터 작업, KBS '강연100씨' 홈페이지 삽화, 캘린더, 치과 캘린더, 동시 동화집, 2018건강보험 달력, 성동문화재단 '성동별곡' 잡지 참여.  

뉴스 | 서성원 기자 | 2022-03-11 18:27

개나리가 피었던 한양대 민주열사 추모공원. ⓒ서성원○ 소재지: 서울시 성동구 한양대 인문대 앞 3월이다. 봄이다. 이맘때쯤 대학 캠퍼스는 활기차다. 새내기들 때문이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예전과 다르겠지. 그래도 좋다. 오늘은 한양대로 가보자. 비(碑)를 보기 위해서다.첫 번째 비에 대한 힌트다. 비가 선 이곳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풍광이 아름답다. 눈을 아래로 두면 도로, 시가지가 펼쳐진다. 눈을 들어보면 남산도 아스라하다. 휘어져서 한강으로 흘러가는 중랑천 물길 또한 멋지다. 목월 시비(木月詩碑)는 이런 곳에 있다. 위용도 당당하게.거기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또 다른 비(碑)가 주르르 서 있다. 키는 들쭉날쭉하고 고만고만하다. 민주열사비다. 한양대 캠퍼스 안에서 비가 있는 위치목월 시비를 만나다내가 처음 목월 시비를 본 것은 늦여름이었다. 마조단터 푯돌을 찾으려고 갔었고, 간 김에 몇 곳을 둘러보다 발견했었다. 시비가 크고 우람해서 쉽게 눈에 띄었다. 그 오솔길(158계단)을 지나가는 이라면 놓칠 수가 없을 만큼 컸다. 지금까지 내가 보았던 시비들은 소박했다. 명성에 비해 그랬다. 하지만 목월 시비는 달랐다. 위풍당당, 세상을 굽어보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시비에 적힌 시는 '산도화(山桃花)'였다. 왜 '나그네'가 아니지? '산도화'라는 꽃이 있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아니라는 걸 이 기사를 쓰면서 알았다. '산에 피는 복숭아꽃'란다. 목월 시비가 왜 한양대에 있는가. 목월은 1915년 경주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대구에서 중학교를 다녔고 일본 유학도 다녀왔다. 서울대, 홍익대를 거쳐서 1962년부터(59년이라는 얘기도 있다) 한양대에서 1978년 3월 사망할 때까지 교수로 있었다. 1993년에 시비가 세워졌다.  민족문화대백과 사전에 이런 말이 있다.'시사적(詩史的)인 면에서 김소월(金素月)과 김영랑(金永郞)을 잇는 향토적 서정성을 심화시켰으면서도, 애국적인 사상을 기저에 깔고 있으며, 민요조를 개성 있게 수용하여 재창조한 대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내 마음속에 깊게 드리워진 박목월의 '나그네'중학교인지 고등학교 땐지 모르겠다. 교과서에 '나그네'라는 시가 실려 있었다. 나는 그 시가 너무 좋았다. 짧지만 멋졌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남도 삼백 리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라는 말이 사람 마음을 휘저어 놓았다. 그리고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이라니. 나그네로 나서면 그런 길을 만날 것 같았고 그렇게 나도 나그네로 살고 싶었다. 이런 시와 함께 교과서를 통해서 알게 된 시인은 시만큼이나 훌륭했다. 세월이 흐른 지금, 교과서 바깥의 시인은 어떤가. 문학 작품은 작품만으로 봐야 할까. 그렇게 얘기하기도 한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관계없이 작품은 작품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시비를 둘러보다 눈에 들어온 민주열사비박목월 시비와 가까운 거리에 민주열사 추모공원이 있었다. 비들은 낮춤하고 올망졸망했다. 박목월 시비와 자연스럽게 비교과 되었다. 가까운 거리여서 그랬다. 민주열사 추모 동산에 들어가서 비를 둘러보았다. 귀한 자기 목숨을 내놓은 이들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바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정의가 바로 서는 세상을 위해. 하지만 나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예전에 들었는데 잊어버렸을까. 예전부터 알려지지 않아서 내가 몰랐던 걸까. 분명한 것은 내가 열사들을 마음에 담아놓고 있지 않았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내 목숨을 귀하게 여겼고, 지금까지 잘 살아남았다. 나는 추모공원에서 비에 적힌 이름을 읽었다. 열사들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불러보았습니다. 최응현, 김헌정, 한영현, 마상길. '상길이를 기리며'를 읽다가 어두커니 섰다. 마음속에서 무언가 뚝 떨어져 내렸다.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비의 제목에서 뚝뚝 묻어났다.여기 네 사람은 인터넷에 검색해봐도 자료가 빈약했다. 한양대 뉴스 포털에 실려있는 내용이 그나마 자세했다.올해에도 캠퍼스에는 개나리가 피고 벚꽃도 피겠지. 그리고 이들처럼 살다가 떠난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더 멀어지겠지.박목월 시비 중 산도화. ⓒ서성원박목월 시비. ⓒ서성원박목월 시비의 위치에서 먼 곳과 산 아래 시가지가 한눈에 드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서성원 민주열사 추모 동산, 민주열사 추모공원, 이렇게 두 가지 팻말을 세워놨는데 이유가 있을까. ⓒ서성원2021년 합동 추모제에서 추모비에 의식을 진행하는 모습 .(출처 추모연대)2021년 합동 추모제 모습인데 박목월 시비가 있는 곳에 천막을 설치했다. 뒤편으로 시비가 살짝 보인다.(출처 추모연대)민주열사 추모공원의 비. ⓒ서성원  

뉴스 | 서성원 기자 | 2022-03-11 18:10

○ 소재지: 서울시 성동구 성수1가1동 718-2번지2019년 삼일 운동 백주년 기념 행사 중, 왕십리 광장에서 가졌던 뚝섬만세운동 퍼포먼스.(출처 성동구청)은 겨울의 끝자락 2월 말이다. 3월이 다가온다. 그리고 삼일절을 맞을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 삼일절은 조금 남다르다. 내가 뚝섬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뚝섬과 삼일운동은 무슨 관련이라도 있단 말인가? 그렇다. 이곳 뚝섬에서 1919년 3월 26일에 만세 운동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뚝섬만세운동과 관련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얘기해 보려고 한다. 뚝섬만세 공원 위치뚝섬만세운동이 세상에 알려지기까지'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말을, 지역 혹은 동네로 범위를 좁혀보면 어떻게 될까. 동네 사람들은 자기 동네에 어떤 역사가 있는지 알기나 할까? 아마도 대부분 잘 모를 것이다. 특히 서울은 더 그렇다. 동네에서 살다가 여건이 바뀌면 다른 동네로 떠난다. 그런 생각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자기 동네 역사에 관심이 적다. 그런데 성동구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2005년 그 무렵부터 성동지역을 답사하고 역사를 공부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우연한 기회에 성수동 토박이 노인으로부터 얘기를 듣게 된다. 뚝섬에서 만세 운동이 있었다는 것을. 그 이후로 이들은 뚝섬만세운동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증언을 들었다. 이들은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직장인이고 주민이었다. 최창준 회장을 비롯한 회원들은, 뚝섬만세운동을 널리 알려야 했기에 성동구 공모사업에 지원해서, 2016년에 책자로 발간했다. 성동역사문화연구회란 이름으로 발간한 책은 '뚝섬 삼일 운동'이다. 이들과 성동구가 아니었으면 뚝섬만세운동은 컴컴한 서고 속에 묻혀 있었을 것이다. 동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고 싶었던 성동문화역사연구회 회원들의 노력 덕분에 뚝섬만세운동은 밝은 빛을 보게 되었다. '뚝섬삼일운동' 자료집이 밑거름되어 다양한 행사로 이어져 2019년은 삼일운동이 백 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때 성동구는 뚝섬 만세 운동을 구민들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로 삼았다. 이 해, 3월 1일에 삼일운동 백 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왕십리 광장에서 '뚝섬 만세 운동 '퍼포먼스도 했다. 이것을 발전시켜 성동구립극단은 '190326 뚝섬만세운동'이란 연극을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 이어서 성동구청은 2021년 3월 1일에 '뚝섬 만세 운동 기념비'를 세웠다. 뚝섬만세운동 기념탑. ⓒ서성원기념비를 세워놓으면 사람들이 눈여겨보게 될까뚝섬만세운동 기념비를 세운 것은 대단한 일이다. 2019년 행사도 그랬지만 정원오 성동구청장은 성동의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만든 것이다. 기념비를 세워두면 지역 주민이나 서울 시민이 관심을 갖게 될까. 특히 지역 주민들이 기념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현재는 기념비가 있다는 사실을 주민들이 잘 모른다. 기념비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월이 흐르면 널리 알려질까? 그렇지도 않다. 우리 주변에 이런저런 기념비나 비석들이 있다. 관심 있는 몇몇 사람들만 알뿐 주민들은 잘 모른다. 예를 들어보자. 송정동 둑방 근처에 일제가 세운 '수신비(水神碑)'가 있다. 우리의 아픈 역사다. 그런데 이 비가 있다는 것을 지역 사람들도 잘 모른다. 뚝섬만세공원과 트리마제먼저 성수동 주민들에게 뚝섬만세운동을 알려야 한다. 그래서 뚝섬만세운동 기념비가 세워진 곳을 '뚝섬만세공원'으로 하면 좋겠다. 아니면 이름이 길더라도 '뚝섬만세운동 공원'도 괜찮겠다. 기념비 제막식 때 성동구에서 이곳을 '뚝섬문화공원'이라고 적어놨다. 성동구에서도 이곳을 어떻게 명명할지 고민했으리라. 공원 이름은 주민 의견을 수렴하고 서울시를 거쳐서 지명위원회를 통과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이곳의 면적은 대략 5200㎡으로 1500평 정도다. 강변북로와 닿아있지만, 방음벽으로 차단되어 있다. 한강은 성덕정나들목으로 연결된다. 서남쪽에는 수도박물관 공원과 잇닿아 있다. 이 모든 것보다 유명한 것이 있다. 내가 언젠가 택시를 탔을 때다. 서울숲 근처에 왔을 때다. “손님, 다음엔 트리마제 뒤라고 하세요.” 이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알았다. 우리 동네가 아파트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는 것을. 그래서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몇 년 후에, 뚝섬만세운동 공원이 근처라고 했을 때, 택시 기사들이 어디인지 알아듣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뚝섬만세공원이 잊혀지지 않는 역사로 남으려면서성원'뚝섬만세공원'이라는 안내판을 두 곳에 설치했으면 좋겠다. 물론 뚝섬만세운동을 설명하는 안내판도 있어야 하겠지.이곳은 성수1가1동이다. 주민자치회 사업으로 뚝섬만세운동을 주제로 하는 행사를 한다면 주민들에게 공원이 알려질 것이다.그리고 성동구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성동문화원이 주축이 되어 삼일운동 행사를 이곳에서 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만하다. 성동구청에 소속한 성동구립예술단체가 정기적으로 행사를 하는 방법도 있겠다. 구립극단은 이미 연극을 공연한 바가 있어서 손쉽다. 공원 현장에서 합창단 연주도 해봄직하다. 성동문화재단은 뚝섬만세운동을 소재로 프로젝트 사업을 하면 좋을 것이다. 성동문화재단은 성동구를 '문화도시'로 지정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뚝섬만세운동을 이 사업을 연계해도 좋을 것이다. 뚝섬만세운동은 지역성을 드러내기에 좋고, 서울시민, 나아가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뚝섬만세운동 자료를 많은 사람들이 만날 수 있게 제공하는 일도 해야 한다. 역사 연구가, 컨텐츠 창작자들에게 알려져야 한다. 그러면 뚝섬만세운동은 문학, 미술, 영상, 음악, 무용 등 창작물로 나와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문화 예술이 될 것이다.역사를 잊은 동네 사람에겐 미래가 없다고 했다. 우리는 성동의 역사를 잊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 성동구는 크게 발전할 것이다.기념탑 일부.  ⓒ서성원뚝섬만세운동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한 정원오 성동구청장. (출처 성동구청 SDTV 캡처)기념탑 안내동판. ⓒ서성원2021년 2월 성동구 소식지(일부)뚝섬만세공원 전체 모습. ⓒ서성원2021년 가을의 뚝섬만세공원. ⓒ서성원 

뉴스 | 서성원 기자 | 2022-02-22 18:41

     해피 발렌타인 데이 / 최제희바이올렛은 동네에서 유명했다.그녀는 원피스를 즐겨 입었다. 그렇다고 아무 날이나 입는 건 아니었다. 살랑 바람이 부는 날, 원피스를 입곤 했었다. 원피스 자락이 피부를 스치면 좋았다. 그런 날은, 바이올렛 자신만 기분 좋은 건 아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들까지 마음 설레도록 만들었다. 살랑거리는 원피스와 찰랑대는 긴 머리칼은 누가 봐도 아름다웠다.바이올렛에게 친구들이 이렇게 물을 때가 있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이다.“바이올렛, 넌 어떤 때가 행복하니?”바이올렛, 역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답했었다.“두말할 것 없이, 아이스크림 먹을 때지.”그러면 친구들은 까르르 웃었다. 아이스크림이 아닌 다른 걸 상상하며 웃는 웃음이었다. 바이올렛은 아이스크림을 좋아하긴 했었다. 그렇다고 아이스크림 먹는 게, 인생에서 행복한 순간일 거라고 여기진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어쩌면 그게 진실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십 대 소녀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말하긴 뭣했다. 그런데 바이올렛에게 아이스크림을 같이 먹자고 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커피를 마셨더라도 아이스크림으로 마무리했다. 그런 날은 이상하게도 행복했다. '아, 인생 별거 아니구나. 아이스크림이 행복이구나.' 아이스크림 남자와 미래를 약속하고 싶었다.어느 날, 아이스크림 남자가 바이올렛에게 말했다.“찬 걸 자주 먹어서 그런지, 종종 배앓이를 해.”남자는 아이스크림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바이올렛의 사랑은 검은 하트만 남고 말았다. 바이올렛은 모든 걸 정리하고 조용하게 살았다. 열정적인 사랑은 또 그만큼 큰 상처가 남게 된다는 것을 아니까, 열정 사랑은 여러 겹의 보호막 속에 가두었고 나무 꼭대기 같은 곳에다 올려놔 버렸다. 그리고는 잎을 떨쳐낸 나무처럼 그렇게 살았다. 세월이 흘렀고, 겨울로 살아가는 그녀에게 크라밧이 나타났다. 바이올렛의 마음은 서서히 크라밧에게로 기울었다. 크라밧은 소년 같았다. 바이올렛은 크라밧에게 흔들리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네처럼 흔들리는 바이올렛이었다. 그녀는 크라밧과 함께 하기 위해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다. 그것은 나뭇가지에 큰 나뭇가지를 덧붙이는 짓과 다르지 않았다. 발렌타인 데이, 바이올렛은 크라밧을 불렀다. 흔들리는 마음을 전하려고 추운 날에도 원피스를 입었다. 그녀는 크라밧도 그네에 앉아주기를 바랬다. 그녀는 크라밧이 좋아할 것으로 생각되는 세 가지 선물을 내밀었다. 크라밧은 선물을 받아서 등 뒤로 감췄다. 뭔가 달랐다. 크라밧은 그네에서 내릴 듯 말 듯, 웃기만 했다. 바이올렛의 마음은 심란하다.·최제희 작가♤프리랜스 일러스트레이터 ♤재밌는 생각으로 행복과 밝은 에너지를 그리는 일러스트 작가. 연무장길에서 <티티팩토리>를 열고 활동하고 있음. ♤titijehee@naver.com     ·서울숲 작가○글 쓰고 사진 찍는 작가 ○'울숲'은 동네 울타리가 되는 숲을 말하는데 성수동 동네 사람으로 살고 있음. ○in.seoulsup@gmail.com

뉴스 | 서성원 기자 | 2022-02-14 13:03

겨울에 한강에서 채빙(採氷)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출처 한강사업본부)○ 소재지: 서울시 성동구 옥수동 미타사 입구옥수동에서 동빙고 위치(미타사 입구)◆감춰진 동굴을 발견한 달맞이 여인 철종 11년(1859년) 정월 대보름날이었다. 비단옷을 잘 차려입은 여인네가 미타사 요사채에 들었다. 미타사가 있는 곳은 종남산(終南山)이라 하는데, 지금의 남산을 말한다. 미타사 비구 스님이 비단 여인에게 어딜 가는 길이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차림새로 봐서는 먼 길을 갈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단 여인이, 달맞이 왔다고 대답했다. 미타사가 있는 산봉우리는 한양 최고의 달맞이 명소였다. 달과 한강을 보려면 그만한 곳이 없었다. 두뭇개 앞 한강은 동호(東湖)로 불릴 정도로 아름다웠다.저녁 무렵, 비단 여인은 달맞이봉으로 올라갔다. 먼저 온 사람들이 있었다. 강바람에 코끝이 시렸다. 여인은 한적한 곳에서 달맞이하고 싶어, 강 쪽으로 내려갔다. 그러다 주위를 살피는 듯한 한 남자를 발견했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더니 나뭇가지를 들추고 땅속으로 사라졌다. 바라보던 여인은 숨이 막혔다. 잠시 뒤, 사라졌던 남자가 굴에서 나왔다. 남자는 굴 입구를 돌과 나무로 가리고는 서둘러 강으로 내려갔다. 비단 여인은 굴 쪽으로 한발 한발 다가갔다. 굴속에 들어간 여인은 기절할 뻔했다. 처녀를 본 것이다. 얼음 속에 누워있는 처녀였다. 피부는 창백했지만 살아있는 듯 편안해 보였다.◆겨울 새벽, 두뭇개에서 저자도로 들어가는 빙정(氷丁)들 비단 여인은 두뭇개 나루터 관리에게 알렸다. 관리의 조사로 괴사건의 실체가 드러났다.두뭇개에는 동빙고(東氷庫)가 있었다. 남자는 그곳의 빙정(氷丁)이었다. 한양에는 나라에서 관리하는 빙고가 네 곳이었다. 서빙고, 동빙고 그리고 궁궐 안 두 곳에 내빙고가 있었다. 나라의 빙고든 개인이 하는 빙고든, 겨울이면 얼음을 채웠다. 그러면 여름에도 얼음을 쓸 수 있었다. 여름 얼음은 금값처럼 귀했다. 궁궐에서도 쓰고 벼슬아치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음식을 보관하는 곳이면, 필요한 게 얼음이었다. 나라에 큰 제사가 있을 때 더더욱 그랬다. 이런 얼음은 겨울에 한강에서 채취해서 보관했는데 창고가 빙고다. 채빙(採氷)하는 사람을 빙부(氷夫), 빙정(氷丁)이라 했다. 채빙은 주로 새벽에 시작했다. 얼음판에 들어가 채빙할 곳을 새끼줄로 표시를 한다. 강기슭에 불을 피우기도 하지만 여간 추운 게 아니다. 그보다도 까딱 잘못하면 미끄러져 한강에 빠져 죽을 수도 있다. 짚신을 칡으로 감았지만 일은 고되고 위험했다. ◆두뭇개 얼음 공주 우 빙정은 철종 10년 겨울에 두뭇개에 왔다. 저자도 근처에 있는 얼음을 궁에서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우 빙정이 얼음을 지고 두뭇개 나루로 나왔을 때다. 한 처녀가 그에게 다가왔다. 처녀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군밤이었다. 고마웠다. 배고픈 참에 맛나게 먹었다. 그래서 아름답게 보였다. 선녀가 따로 없었다. 그런데 처녀가 이번엔 빈손을 내밀었다. 우 빙정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밤값을 달라는 것. 우빙정은 난처했다. 가진 돈이 없었던 것. 그래서 몸으로 밤값을 때워야 했다. 그러면서 처녀를 알게 되었다. 이름은 옥수였다. 빙정은 옥수만 생각하면 얼음이 무겁지 않았다. 맛 나는 것이 있으면 알뜰히 챙겼다. 옥수도 그런 빙정을 내치지 않았다. 옥수는 거동 불편한 홀아버지 밑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해, 옥수의 부친이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열흘 뒤, 옥수도 눈을 감았다. 두뭇개 사람들은 역병을 의심해서 그들을 멀리하면서, 옥수를 어떻게 했느냐고 빙정에게 물었다.“고단한 땅에 붙잡혀 산 사람이잖아요, 한강에 실어 보냈습니다. 먼바다로 가라고.”사람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쯧쯧, 옥수야, 좋은 데 가서 편히 살렴.”한데 진실은 달랐다. 빙정은 옥수를 도무지 그냥 보낼 수 없었다. 영원히 같이 하고 싶었다. 우 빙정은 사람들 발길이 뜸한 달맞이봉 아래에 몰래 땅굴을 팠다. 토굴에 옥수를 데려다 놓고 채빙한 얼음으로 채웠다.우 빙정은 얼음을 다루는 사람답게 옥수를 지극정성으로 관리했다. 얼음 속의 옥수 얘기는 두뭇개를 휘돌아 삽시간에 도성까지 퍼져나갔다. ◆영원히 살고자 했었던 얼음 공주우 빙정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나라의 얼음을 사사로이 이용했으니 마땅히 처벌받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반대 목소리도 있었다. 조사 과정에서 비밀 빙고를 만든 까닭이 밝혀졌다. 옥수는 달이 비치는 한강을 좋아했다. 그런 옥수와 함께 우 빙정은 동네 사람들 눈을 피해 달맞이봉에서 만나곤 했었다. 옥수가 숨을 거두기 전, 달맞이봉에서 영원히 살고 싶다는 손짓을 그에게 남겼다. 그게 달맞이봉에 빙고가 생겨난 까닭이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영의정 권도임은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우 빙정을 풀어주었다. 문장가다운 처신이었다. 반대파들은 그 일과 함께 다른 일까지 묶어서 영의정 권도임을 공격했었다. 그는 산음현으로 귀양을 가야 했다. 그해 봄, 그곳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동빙고(東氷庫)는 왜 두뭇개에 있었을까 얼음은 이용한 기록은 신라 지증왕 때부터다. 빙고에 얼음을 넣어두려면 채빙을 해야 한다. 얼음 한 덩이는 길이가 1척 5촌(45㎝), 너비는 1척(30㎝), 두께는 7촌(21㎝)이다. 세 덩이씩 묶어서 지게로 운반했다. 얼음 한 덩어리의 무게가 5관(18.75㎏)이니까 세 덩어리면 어느 정도 일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두뭇개에 동빙고가 세워진 까닭은 저자도(楮子島)와 관련이 있다. 저자도는 왕실의 섬이어서 얼음이 깨끗했다. 채빙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그래서 두뭇개에 동빙고가 들어온 것이다. 동빙고 얼음은 종묘의 제사 등, 주요한 행사에 사용했다. 서빙고는 왕실의 생활용으로 썼다. 왕은 복날에 총애하는 신하에게 빙표(氷票)를 나눠주기도 했다. 빙고에 보관하는 얼음은 이듬해 가을까지 녹지 않게 관리해야 한다. 남부지방은 주로 석빙고였지만, 동빙고는 석재와 혼합한 목빙고(木氷庫)였다. 채빙 시기에 얼음이 얼지 않으면 사한단(司寒壇)에서 기한제(祈寒祭)를 지냈는데 동빙고 근처에 있었다. 이렇게 옥수동(玉水洞)은 '물이나 얼음'과 관련이 깊은 동네다. 그래서 옛날에는 '빙고골'로 불리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다락옥수'는 빙고를 연상시키는 건축물이다.동빙고 터 푯돌. ⓒ서성원사한단 터 푯돌. ⓒ서성원 미타사 입구이면서 아파트 입구에 나란히 있는 두 푯돌. ⓒ서성원1957년 한강 채빙(출처 국가기록원)1957년 한강 채빙(출처 pinterest)강세황, 서빙고. (출처 조선미술관 소장, 김달진 미술연구소)다락옥수 외부ⓒ서성원다락옥수 내부 모습.ⓒ서성원 

뉴스 | 서성원 기자 | 2022-02-11 17:43

 <ROOM LOVEMODE>  최제희서성원그 집은 언덕 위에 있었습니다. 동네를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곳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언덕집'이라고 불렀습니다.동네 사람들은 언덕집을 부자로 여겼습니다. 도자기 때문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도자기를 잘 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깨질까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텅스텐이 마음 편했습니다. 플라스틱 용기는 더욱 그랬구요. 그런데 언덕집 도자기는 밥그릇이 아니라 눈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언덕집을 부자로 보는 건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어른들은 도자기가 먼저 눈에 들었겠지만, 청년들은 달랐습니다. 샤넬이 먼저였습니다. 샤넬은 언덕집 딸입니다. 이름이 따로 있었지만,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럴 만한 일이 있었습니다. 샤넬이 고등학교 다닐 때입니다. 그녀가 버스를 타려고 집을 나서면 남자 녀석들이 골목에서 하나둘씩 나타났습니다. 샤넬과 같은 버스를 타려고 미적거리고 있었던 녀석들입니다. 이런 일이 잦아지자 샤넬의 아버지는 딸을 무척 염려했습니다. 남자애들 한둘이라면 있을 수 있는 일로 여겼을 텐데, 그렇지 않았거든요. 남자애들에게 경고도 하고, 경찰의 도움도 받아 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샤넬의 아버지는 남자애들이 샤넬을 쫓아다니는 까닭을 알게 되었습니다. 딸에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알 수 없는 꽃향기가 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남자애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샤넬'로 부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유명 브랜드가 그것이었거든요. 샤넬 아버지는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경호로 소문난 이에게 딸의 경호를 맡겼습니다. '검은고양이'입니다. 그렇게 되자 샤넬은 조롱에 든 새나 다름없었습니다.그런데 하루라도 샤넬을 보지 못하면 죽을 것만 같은 얼뜨기 하나가 있었습니다. 능소였습니다. 능소는 샤넬을 보려고 언덕집에 침입했습니다. 조금 모자라니까 위험한 짓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샤넬은 능소의 무모한 구애에 놀랐습니다. 하지만 어수룩해 보여서 아버지에게 알리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능소의 마음을 받아들이진 않았습니다. 능소의 위험한 줄타기는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샤넬의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두 사람의 밀애가 가족에게 알려진다면 결과는 보나마나였습니다. 그즈음, 샤넬 아버지는 집에서 한가하게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형편이 어려워진 것입니다. 그렇지만 샤넬에 대한 경호는 거두지 않았습니다. 처녀가 된 샤넬의 향기는 여전했고 능소의 마음도 그대로였었습니다. 사랑에 눈이 멀면 세상이 제대로 보이지 않죠. 샤넬과 능소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게 있었습니다. 검은고양이입니다. 검은고양이는 능소의 위험한 사랑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샤넬을 향한 능소의 마음은 나무가 거꾸로 자라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르는 척, 눈감아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최제희 작가♤프리랜스 일러스트레이터 ♤재밌는 생각으로 행복과 밝은 에너지를 그리는 일러스트 작가. 연무장길에서 <티티팩토리>를 열고 활동하고 있음.♤titijehee@naver.com       ·서울숲 작가○글 쓰고 사진 찍는 작가 ○'울숲'은 동네 울타리가 되는 숲을 말하는데 성수동 동네 사람으로 살고 있음. ○in.seoulsup@gmail.com

뉴스 | 서성원 기자 | 2022-01-25 15: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