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빙고(東氷庫)보다 유명했던 두뭇개 얼음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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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빙고(東氷庫)보다 유명했던 두뭇개 얼음 공주
  • 서성원 기자
  • 승인 2022.02.11 17: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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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원의 엉뚱 발랄 성동 이야기] (41) 동빙고 터
겨울에 한강에서 채빙(採氷)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출처 한강사업본부)

○ 소재지: 서울시 성동구 옥수동 미타사 입구

옥수동에서 동빙고 위치(미타사 입구)

◆감춰진 동굴을 발견한 달맞이 여인 

철종 11년(1859년) 정월 대보름날이었다. 비단옷을 잘 차려입은 여인네가 미타사 요사채에 들었다. 미타사가 있는 곳은 종남산(終南山)이라 하는데, 지금의 남산을 말한다. 미타사 비구 스님이 비단 여인에게 어딜 가는 길이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차림새로 봐서는 먼 길을 갈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단 여인이, 달맞이 왔다고 대답했다. 미타사가 있는 산봉우리는 한양 최고의 달맞이 명소였다. 달과 한강을 보려면 그만한 곳이 없었다. 두뭇개 앞 한강은 동호(東湖)로 불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저녁 무렵, 비단 여인은 달맞이봉으로 올라갔다. 먼저 온 사람들이 있었다. 강바람에 코끝이 시렸다. 여인은 한적한 곳에서 달맞이하고 싶어, 강 쪽으로 내려갔다. 그러다 주위를 살피는 듯한 한 남자를 발견했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더니 나뭇가지를 들추고 땅속으로 사라졌다. 바라보던 여인은 숨이 막혔다. 잠시 뒤, 사라졌던 남자가 굴에서 나왔다. 남자는 굴 입구를 돌과 나무로 가리고는 서둘러 강으로 내려갔다. 비단 여인은 굴 쪽으로 한발 한발 다가갔다. 
굴속에 들어간 여인은 기절할 뻔했다. 처녀를 본 것이다. 얼음 속에 누워있는 처녀였다. 피부는 창백했지만 살아있는 듯 편안해 보였다.

◆겨울 새벽, 두뭇개에서 저자도로 들어가는 빙정(氷丁)들 

비단 여인은 두뭇개 나루터 관리에게 알렸다. 관리의 조사로 괴사건의 실체가 드러났다.

두뭇개에는 동빙고(東氷庫)가 있었다. 남자는 그곳의 빙정(氷丁)이었다. 한양에는 나라에서 관리하는 빙고가 네 곳이었다. 서빙고, 동빙고 그리고 궁궐 안 두 곳에 내빙고가 있었다. 나라의 빙고든 개인이 하는 빙고든, 겨울이면 얼음을 채웠다. 그러면 여름에도 얼음을 쓸 수 있었다. 여름 얼음은 금값처럼 귀했다. 궁궐에서도 쓰고 벼슬아치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음식을 보관하는 곳이면, 필요한 게 얼음이었다. 나라에 큰 제사가 있을 때 더더욱 그랬다. 이런 얼음은 겨울에 한강에서 채취해서 보관했는데 창고가 빙고다. 채빙(採氷)하는 사람을 빙부(氷夫), 빙정(氷丁)이라 했다. 
채빙은 주로 새벽에 시작했다. 얼음판에 들어가 채빙할 곳을 새끼줄로 표시를 한다. 강기슭에 불을 피우기도 하지만 여간 추운 게 아니다. 그보다도 까딱 잘못하면 미끄러져 한강에 빠져 죽을 수도 있다. 짚신을 칡으로 감았지만 일은 고되고 위험했다. 

◆두뭇개 얼음 공주 

우 빙정은 철종 10년 겨울에 두뭇개에 왔다. 저자도 근처에 있는 얼음을 궁에서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우 빙정이 얼음을 지고 두뭇개 나루로 나왔을 때다. 한 처녀가 그에게 다가왔다. 처녀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군밤이었다. 고마웠다. 배고픈 참에 맛나게 먹었다. 그래서 아름답게 보였다. 선녀가 따로 없었다. 그런데 처녀가 이번엔 빈손을 내밀었다. 우 빙정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밤값을 달라는 것. 우빙정은 난처했다. 가진 돈이 없었던 것. 그래서 몸으로 밤값을 때워야 했다. 그러면서 처녀를 알게 되었다. 이름은 옥수였다. 빙정은 옥수만 생각하면 얼음이 무겁지 않았다. 맛 나는 것이 있으면 알뜰히 챙겼다. 옥수도 그런 빙정을 내치지 않았다. 옥수는 거동 불편한 홀아버지 밑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해, 옥수의 부친이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열흘 뒤, 옥수도 눈을 감았다. 두뭇개 사람들은 역병을 의심해서 그들을 멀리하면서, 옥수를 어떻게 했느냐고 빙정에게 물었다.

“고단한 땅에 붙잡혀 산 사람이잖아요, 한강에 실어 보냈습니다. 먼바다로 가라고.”
사람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쯧쯧, 옥수야, 좋은 데 가서 편히 살렴.”

한데 진실은 달랐다. 빙정은 옥수를 도무지 그냥 보낼 수 없었다. 영원히 같이 하고 싶었다. 우 빙정은 사람들 발길이 뜸한 달맞이봉 아래에 몰래 땅굴을 팠다. 토굴에 옥수를 데려다 놓고 채빙한 얼음으로 채웠다.
우 빙정은 얼음을 다루는 사람답게 옥수를 지극정성으로 관리했다. 
얼음 속의 옥수 얘기는 두뭇개를 휘돌아 삽시간에 도성까지 퍼져나갔다. 

◆영원히 살고자 했었던 얼음 공주

우 빙정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나라의 얼음을 사사로이 이용했으니 마땅히 처벌받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반대 목소리도 있었다. 조사 과정에서 비밀 빙고를 만든 까닭이 밝혀졌다. 옥수는 달이 비치는 한강을 좋아했다. 그런 옥수와 함께 우 빙정은 동네 사람들 눈을 피해 달맞이봉에서 만나곤 했었다. 옥수가 숨을 거두기 전, 달맞이봉에서 영원히 살고 싶다는 손짓을 그에게 남겼다. 그게 달맞이봉에 빙고가 생겨난 까닭이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영의정 권도임은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우 빙정을 풀어주었다. 문장가다운 처신이었다. 반대파들은 그 일과 함께 다른 일까지 묶어서 영의정 권도임을 공격했었다. 그는 산음현으로 귀양을 가야 했다. 그해 봄, 그곳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동빙고(東氷庫)는 왜 두뭇개에 있었을까 

얼음은 이용한 기록은 신라 지증왕 때부터다. 
빙고에 얼음을 넣어두려면 채빙을 해야 한다. 얼음 한 덩이는 길이가 1척 5촌(45㎝), 너비는 1척(30㎝), 두께는 7촌(21㎝)이다. 세 덩이씩 묶어서 지게로 운반했다. 얼음 한 덩어리의 무게가 5관(18.75㎏)이니까 세 덩어리면 어느 정도 일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두뭇개에 동빙고가 세워진 까닭은 저자도(楮子島)와 관련이 있다. 저자도는 왕실의 섬이어서 얼음이 깨끗했다. 채빙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그래서 두뭇개에 동빙고가 들어온 것이다. 동빙고 얼음은 종묘의 제사 등, 주요한 행사에 사용했다. 서빙고는 왕실의 생활용으로 썼다. 왕은 복날에 총애하는 신하에게 빙표(氷票)를 나눠주기도 했다. 

빙고에 보관하는 얼음은 이듬해 가을까지 녹지 않게 관리해야 한다. 남부지방은 주로 석빙고였지만, 동빙고는 석재와 혼합한 목빙고(木氷庫)였다. 
채빙 시기에 얼음이 얼지 않으면 사한단(司寒壇)에서 기한제(祈寒祭)를 지냈는데 동빙고 근처에 있었다. 이렇게 옥수동(玉水洞)은 '물이나 얼음'과 관련이 깊은 동네다. 그래서 옛날에는 '빙고골'로 불리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다락옥수'는 빙고를 연상시키는 건축물이다.

동빙고 터 푯돌. ⓒ서성원
사한단 터 푯돌. ⓒ서성원
 미타사 입구이면서 아파트 입구에 나란히 있는 두 푯돌. ⓒ서성원
1957년 한강 채빙(출처 국가기록원)
1957년 한강 채빙(출처 pinterest)
강세황, 서빙고. (출처 조선미술관 소장, 김달진 미술연구소)
다락옥수 외부ⓒ서성원
다락옥수 내부 모습.ⓒ서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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