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원의 엉뚱 발랄 성동 이야기] (45) 왕십리와 대중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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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원의 엉뚱 발랄 성동 이야기] (45) 왕십리와 대중가요
  • 서성원 기자
  • 승인 2022.04.11 10: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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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십리를 널리 알린 것으로 본다면 ‘59년 왕십리’ 노래비 같은 것을 세울만한데
김흥국 가수(제공)
김흥국 가수(제공)

○ 소재지: 서울시 성동구 왕십리

왕십리를 소재로 한 영화와 대중가요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조선 시대, 십 리를 가라는 말, 그 말을 했다는 곳이 왕십리다. 얘기가 그럴듯해서 왕십리는 널리 알려졌다. 그렇다면 70, 80, 90년대는 어땠을까. 입에서 입으로 정보가 전달되는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 드라마, 영화, 소설, 대중가요, 가곡 등으로 지역이 알려지는 시대가 되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왕십리를 소재로한 한 예술 컨텐츠가 더러 있었다. 그 중에 중요한 것만 들자면, 76년에 임권택 감독이 영화 ‘왕십리’를 만들었다. 87년에는 김남화가 대중가요 ‘왕십리’를 발표했다.(한참 후에는 이권희, 김희석, 강백수가 ‘왕십리’를 노래했다. 이혜솔은 ‘왕십리 아리랑’을 발표했다.)

이런 문화 컨테츠가 인기를 얻으면 자연스럽게 왕십리는 홍보가 된다. 여러 문화 컨텐츠 중에 왕십리는 널리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59년 왕십리’다. 오늘은 그 얘기를 하려 한다.

kbs 자료 화면 캡처
kbs 자료 화면 캡처

‘59년 왕십리’ 티비, 라디오로 전국에 울려 퍼져

내가 왕십리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말하는 게 도움이 될 것 같다.

80년대에, 나는 서울에 살지 않았다. 지방에 있었으니까 왕십리를 몰랐을까. 그렇지 않다. 십 리를 더 가라는 그 왕십리 말고 왕십리를 알았다. 어떻게? ‘59년 왕십리’ 때문이다. 이 노래는 ‘호랑나비’(89년 발표)로 한창 잘나가던 김흥국이 91년에 발표했다. 아마 그 이후로 대중 매체를 통해서 방송이 나갔을 것이다. 나는 서울에 살지 않았지만, 이 노래로 왕십리가 어떤 동네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90년대를 거쳐온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59년 왕십리’를 우리 기억 속으로 불러오려 한다.

여기서 잠깐, 이 노래를 잘 모르는 젊은 세대를 위해 가사를 옮겨본다.

왕십리 밤거리에 구슬프게 비가 내리면
눈물을 삼키려 술을 마신다 옛 사랑을 마신다.
정주던 사람은 모두 떠나고 서울 하늘 아래 나 홀로
아 아, 깊어가는 가을밤만이 왕십리를 달래주네.

kbs 자료 화면 캡처
kbs 자료 화면 캡처

‘59년 왕십리’에 담긴 정서

대부분의 대중가요가 그렇듯, 지극히 서민적인 애환을 노래했다. 노랫말을 한번 살펴보자. 왕십리 밤거리에 비가 내린다. 그것도 그냥 내리는 게 아니라 ‘구슬프게’ 내린다. 사실은 마음이 슬픈 상태다. 까닭은 뒤에 나온다. 정주던 사람이 모두 떠나고 홀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물을 삼키려고 술을 마신다는 건데, 이것 역시 지극히 세속적이다. 그때가 가을밤이었나 보다. 여기서 ‘왕십리를 달래주네’ 라고 하는 것, 나는 이 부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슬픈 사람은 ‘나’인데 왜 ‘왕십리’를 달래준다고 했을까. 정황으로 보면 ‘가을밤만이 나를 달래주네’라고 해야 옳다. 그래서 가사대로 되려면, ‘내’가 왕십리이고 왕십리가 ‘내’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 소절로 해서 노랫말이 확 살아났고 뜻이 깊어졌다.

여기서 하나, ‘왕십리’라는 지명에 대한 것. 서울 지명에 ‘~리’가 몇 곳에 남아 있다. 가까운 동네 ‘청량리’가 있고 수유리, 망우리가 있다. 최근에는 수유동, 망우동으로 부르는 것 같다. 이제는 왕십리와 청량리만 남았다. 청량리는 애인이 기차를 타고 떠나버려서 울고불고, 하기 적당한 동네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는 ‘59년 왕십리’와 비슷한 노래가 없다. 왜 그럴까. 이것이 8,90년대 왕십리의 이미지일 것이다.

알면 도움이 되는 것, 두 가지

‘59년 왕십리’는 이혜민이 작곡했다. 원래 곡명은 ‘왕십리’다. 김남화(김재희)가 1987년에 발표했다. 이것을 리메이크할 때 제목에 ‘59년’을 추가했다. 작곡가 이혜민과 김흥국의 출생연도이다. ‘59년 왕십리’는 1991년에 발표했다.

2년 전, <서성원의 엉뚱 발랄 성동 이야기>를 시작했다. 연재에서 ‘왕십리’는 주요 소재였다. 한두 번으로 끝낼 소재가 아니었다. 그래서 왕십리와 대중가요를 한 꼭지로 생각해 뒀다. 왕십리와 대중가요를 얘기하려면 ‘59년 왕십리’는 빼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혜민 작곡가와 김흥국 가수를 만나서 얘기를 듣고 싶었다. 이번에 이혜민 작곡가 얘기는 듣지 못했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왕십리’ 얘기를 듣고 싶다. 작곡자니까 할 얘기가 많을 것이다. 그리고 가수 겸 시인 강백수와는 전화 한 통화만 했다. 현재에도 활동하고 있으니까 만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영화 ‘왕십리’ 임권택도 그렇다.

<김흥국 인터뷰>

카페에서 인터뷰 중인 김흥국. ⓒ서성원
카페에서 인터뷰 중인 김흥국. ⓒ서성원

3월 23일, 나는 금호동 한 카페에 앉아있었다. 그때 카페로 쓱 들어와서 커피를 시키는 사람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약속 시간이 이른데다, 소탈한 차림새여서 그가 김흥국인 줄 몰랐던 것이다. 김흥국은 만나자마자 인터뷰를 하자고 했다. 다음 일정 때문에 서둘렀다. 인터뷰 중간에 이원주(성동신문) 대표가 자리를 함께 했다.

<59년 왕십리>를 부르게 된 사연이 있는가

김흥국 : “이혜민(작사,작곡자) 친구는 면목동에서 태어났는데 그때는 다 가난한 시절이었어요. 왕십리에 대한 추억이 많은 모양이에요. 그 친구가 만든 노래를 들려주는데, 구수하고 소박하고 그랬어요. 서울 사람이라도 그렇고 시골서 올라온 사람이라면 공감할 노래였지요. 어떻게 보면 슬픈 노래인데, 나한테 잘 맞겠구나 싶어서 부르게 되었지요.”

이혜민이 왕십리 출신이라고 밝힌 데가 많았다.

원곡 제목이 <왕십리>인데, <59년 왕십리>라고 바꾼 까닭은

“김소월의 <왕십리>라는 시가 있어요. 겹치면 그러니까 제목을 바꾸면 어떻겠냐고 작곡가한테 물었더니, 안 된대요. 입씨름깨나 했어요. 작곡가가 나랑 59년 돼지띤데, (설득하는데) 며칠 걸렸을 거에요. 친구가 그랬어요, 59년생만 듣는 거냐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요. 아, 이 사람아, 50년대, 60년대 왕십리에 대한 추억이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게 아니겠냐고. 그렇게 해서 그 노래가 사람들 가슴에 가닿게 되었어요. 왕십리가 고향이 아니어도 옛날 향수가 떠오르는 노래잖아요.”

‘59년 왕십리’는 김흥국에게 어떤 노래인가

“내가 최헌의 ‘오동잎’을 좋아했는데 그 노래를 편곡한 사람이 김기표 라는 분(나훈아의 ‘테스형’을 편곡했다고 한다)이에요. 그분에게 ‘오동잎’ 같은 스타일로 해달라고 부탁해서 정말 고급스럽게 나온 거예요. 안 그랬으면 완전 뽕으로 갔을 거예요. 저는 보컬 그룹사운드 출신이기때문에 트롯 가수는 아니에요. ‘59년 왕십리’는 대중 가요에요. 누구나 쉽게 따라부르고, 즐기는 노래지, 이걸 어떤 장르로 구분하려는 건, 창피한 일이라고 봅니다. 노래에 대한 맛을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 장르를 나누려 해요. 그거 나눠서 뭐할 거에요.”

‘59년 왕십리’가 어떤 장르에 드는지 모르겠지만, 김흥국은 여기에 할 말이 더 있어 보였다. 인터뷰 주제 바깥이어서 더는 묻지 않았다.

‘59년 왕십리’가 왕십리 홍보에 많은 영향을 줬겠지요. 여기에 대한 생각은

“사실 성동신문 대표에게 연락이 왔을 때 인터뷰를 안 하려고 했어요. 내가 인터뷰해서 뭔 도움이 되느냐(는 거죠). 솔직한 얘기로, 성동구에 대한 미련이 없어요. 실제 이 사람들 정치적으로 이러면 안 돼요. 성동 사는 구민들은 저란 사람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걸 충족을 못 시켰잖아요. 내가 왕십리가요제를 십 년 이상을(걸려서) 대한민국 최고의 가요제를 만들어 줬는데, 십몇 년 지났더니 없어졌더라구요. 이게 말이 되는 거예요. 여당 쪽에 누가 되면 없애고, 내가 보수니까, 야당 쪽에서 되면 살릴려고 그러고. 이거 뭐하는 짓들인지, 그런 사람들 혼 내야 돼. 이 아름다운 노래를. 그래서 안 할려구 그래요.”

이 질문에 김흥국은 서운한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노래비로 연결되었다. 나는 그 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이번 인터뷰만 해도 그렇다. 최근에 김흥국이 어떤 행보를 걸었는지 알지 못하고 추진했다. 인터뷰 일정을 결정한 뒤, 김흥국 노래를 유튜브로 들으려는데, 최근의 뉴스가 따라 나왔다. 김흥국은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를 공개 지지했고, 지원 유세를 했다는 것. 나는 난감했다. 인터뷰를 이 시기에 맞추어 진행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어서 예정대로 진행했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다. (나는 이혜민, 김흥국의 연락처를 모른다. 혹시나 해서 SNS에 올렸다. 이혜민과 김흥국을 아는 사람은 인터뷰하고 싶다는 내 뜻을 전달해 달라고. 등잔 밑이 어두웠던 셈이다.)

인터뷰 중에 이원주 대표가 자리에 합류했다. 두 사람은 전에부터 친분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김흥국은 최근 뉴스 소재가 되었던 일들을 얘기했다. 이것 역시 ‘성동 이야기’와는 관련이 없어서 소개하진 않는다. 4월 어느 날, 김흥국이 인수위에서 차담회를 했다는 소식을 인터넷에서 봤다.

그게 무엇이든 피고 지는 꽃과 다르지 않아

지금은 온 세상이 벚꽃이다. 분홍으로 화려하다. 봄이라고 벚꽃만 피는 것은 아니다. 권력 또한 이런 계절과 다르지 않다. ‘왕십리’를 노래한 가수들 또한 계절 따라 피고 지는 꽃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성동 구민으로서 ‘왕십리’를 소재로 노래들이 세상에 활짝 피어나길 기대할 뿐이다.

성동신문을 든 김흥국. ⓒ서성원
성동신문을 든 김흥국. ⓒ서성원
인터뷰하는 김흥국. ⓒ서성원
인터뷰하는 김흥국. ⓒ서성원
이원주 대표와 함께한 김흥국. ⓒ서성원
이원주 대표와 함께한 김흥국. ⓒ서성원
필자와 함께 기념 촬영하는 김흥국.
필자와 함께 기념 촬영하는 김흥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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