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세대와 헐렁 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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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세대와 헐렁 바지
  • 김정민 기자
  • 승인 2022.06.15 01: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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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원
시조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 강남문학회이사. 저서로 산문집 『피아노 치는 시인』 등 3권. 시조집 『얼레와 어금니』 등 3권. 양천문학상, 『현대시조』좋은 작품상 등 수상
시조시인.수필가.칼럼니스트.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 강남문학회이사. 저서로 산문집 『피아노 치는 시인』 등 3권. 시조집 『얼레와 어금니』 등 3권. 양천문학상, 『현대시조』좋은 작품상 등 수상

나는 어느 글에서 직장을 그만 둔 60세 이상을 ‘꼰대’라고 부른다고 쓴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꼰대’, 즉 기성세대냐 아니냐는 갈림도 이 정년퇴직 전후로 가를 수밖에 없다고 강조 했습니다. 하지만 공무원이나 공기업직원만 정년이 60세 전후이지 사실은 50세만 되면 직장을 그만 두는 게 현재의 산업사회구조입니다. 사회에는 45세가 정년이라는 사오정이라는 말까지 유행합니다. 그렇다고 퇴직한 50세 이상을 모두 ‘꼰대’라고 부르기에는 국민정서상 허락될 수 없다고 봅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서두로 인용했느냐 하면 복장만 보고도 기성세대, 곧 ‘꼰대’ 여부를 금방 구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50세쯤 되는, 막 직장을 그만둔 사람들까지 복장만으로 기성세대에 포함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들의 복장은 근무 당시의 유행에 따라 사 입었을 테니 지금의 젊은 세대 복장과 별 차이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모르긴 해도 60세 이상 기성세대가 입고 다니는 신사복은 몸에 여유가 있게 좀 헐렁한 게 대부분입니다. 젊은이들처럼 타이트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턱 보면 금방 압니다. .그러나 풍성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자세히 살펴보면 힘이 없고 나약해 보이고 활기마저 없어 보입니다. 어깨가 축 처져서 몹시 지쳐 보이기까지 합니다. 다만 아직까지도 양 어깨에는 한 시대를 살아온 경륜과 자부심이 꺼지지 않는 마지막 불꽃으로 타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길을 가다가 통 넓은 바지를 입은 사람에게서는 구수한 누룽지 냄새가 납니다. 거부할 수 없는 위엄을 느낍니다. 움직이는 도서관의 뒷모습을 봅니다.

물론 요즈음은 노인들도 대부분 캐주얼 복장을 입기 때문에 통 넓은 바지를 입은 사람을 보기는 가뭄에 콩 나듯 합니다. 헐렁한 바지를 자주 보게 되는 장소는 주로 결혼식장이나 장례식장, 아니면 공공행사가 진행되는 장소입니다. 그런 사람들 대부분이 얼굴에는 주름살이 많고 언행에 활력이 없어 보입니다. 기성세대라고 얼굴에 씌어 있습니다. 어찌 보면 몸치장에 전혀 무관심한 세대처럼 보입니다. 그 노인들이 낡은 세대라고 손가락질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새 옷을 사 입지 않는 이유는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서 그렇습니다. 그게 살아 움직이는 지혜요 후배들에게 전해주는 실물경제학입니다. 옷장에 깨끗한 옷을 놔두고 구태여 몇 십 만원씩 들여서 새로 기성복을 사 입는 것은 낭비일 뿐만 아니라 새 옷을 입었다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헐렁한 바지는 재정능력과 시대상을 반영하는 복장으로 넘치고 부족함, 즉 분수를 아는 노인들의 또 다른 자화상입니다.

반면 60세 이전 사람들은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습니다. 굴곡이 들어날 만큼 팽팽합니다. 겉모습만 보아서는 무언가에 쫓기는 듯 하고 마음의 여유까지도 없어 보입니다.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하는 축소지향의 젊은이 상을 보는 거 같아 답답합니다. 각박한 사회상과 전투적 삶의 현장을 보는 듯싶어 측은한 생각마저 듭니다. 빨리빨리의 축소판입니다. 그게 자신감을 들어내는 상징이라면 좋을 텐데 무의식적 반항의 표출이라면 위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옷은 수많은 변천을 거듭해 왔습니다. 그래야 장사가 되는 상술의 하나라고 보지만 없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옷만큼 신경이 쓰이는 일도 없습니다. 길이는 길었다 짧았다, 통은 넓었다 좁았다 하니 그 장단에 맞추자면 엄청 많은 돈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 기성세대들은 춘하추동 네 벌의 신사복을 갖추기도 힘들었습니다. 여기에 문상 갈 때 입을 검정색 옷을 보태면 다섯 벌의 신사복이 필요하니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내게는 지금 거의 새 옷이다 싶은 신사복이 세 벌 있습니다. 1998년에 120만원을 주고 충무로에서 맞춘 옷이니 당시로서는 최고의 양복점에서 큰 맘 먹고 준비한 옷입니다. 그 중 아이들 결혼식 때문에 새로 맞춘 옷이 두 벌이니 그리 멋을 낸 편은 아닙니다. 헌데 문제는 비싼 옷이라고 아끼고 아끼다 보니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몇 번을 입지 않아 새 옷이나 마찬가지고 그나마 퇴직 후 살까지 쪄서 품을 두 번씩이나 늘리고도 이제는 캐주얼이 편해 그냥 장롱 속에 장식품으로 진열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엊그제 중요 모임이 있어서 신사복을 꺼내 입어 봤더니 또 뱃살이 늘었는지 품이 맞지 않아서 그냥 캐주얼 복장으로 나갔습니다. 둘러보니 신사복 반, 캐주얼 반이었습니다. 신사복은 척 보기에도 10여년은 실히 넘었을 쿨렁쿨렁한 윗도리에 아랫단이 넓은 헐렁바지였습니다. 모두가 직장생활 때 입던 옷인 듯싶습니다. 아무리 머리를 염색하고 나왔어도 기성세대라는 딱지를 벗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헐렁한 신사복에서 풍기는 자부심은 대단했습니다. 사철을 푸르른 대나무 숲을 보는 듯 장엄했습니다.

작년 가을에 며늘애가 기성신사복 한 벌을 인터넷으로 주문했다며 배달되면 입어보라고 전화가 왔습니다. 며칠 후 신사복이 도착하였습니다. 번쩍번쩍 하는 모습이 요즘 거리에서 자주 보아온 유행하는 꽤 비싼 옷이었습니다. 언젠가 나도 저 옷 좀 입어야겠다고 탐을 내던 바로 그 구미가 당기던 옷입니다. 허지만 옷을 입어보자마자 금방 벗어버렸습니다. 온 몸이 꽉 낌은 물론이고 촛대 같은 바지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기 때문입니다. 멋 보다는 편안함이 그리운 노인이기 때문인 듯 듯싶습니다. 한마디로 낯이 선 것입니다. 형식은 내용을 초월할 수 없습니다. 곧 바로 반품을 하였음은 물론입니다. 며느리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 후의 일이었습니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기도 제가 놀던 물이 좋다고 했습니다. 옷도 내 몸의 안경입니다. 아무래도 두 번 품을 늘려서 입은 신사복이지만 다시 한 번 더 품을 늘려서 입어야 할 거 같습니다. 지난번에도 허리부분을 천을 대고 늘렸는데 그 천을 다시 한 번 더 늘려야 할 듯싶습니다. 그래야 몸도 마음도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옷에 몸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몸에 옷을 맞추는 역발상입니다. 까마귀 몸에 흰색을 칠한다고 백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성세대는 늘 전조등이 되기를 자원합니다. 앞에서 뒤에 오는 세대들을 위해 한 줄기 빛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걸 보람이며 사명이라고 몸에 익히고 실행해 왔기 때문입니다. 비록 젊은 세대들이 ‘껍데기는 가라’고 외쳐도 나는 내 자존심과 체취가 밴 헐렁바지를 결코 버리지 않겠습니다. 내 가치를 존중하며 내 자리를 지키는 것도 역사의 한 몫임을 자부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성세대들은 비록 손가락질을 당할지라도 가치 있는 발자취를 남기고 아름답게 퇴장하는 헐렁 바지이고 싶습니다. 해와 낙엽은 질 때가 가장 아름다운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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