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그 함의를 찾아가는 길 (하)—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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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그 함의를 찾아가는 길 (하)—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고—
  • 김정민 기자
  • 승인 2023.09.0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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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술
(전)상문고등학교 교사, (전)코이카 해외봉사단원(키르기스스탄), 서울자치신문 칼럼니스트
(전)상문고등학교 교사, (전)코이카 해외봉사단원(키르기스스탄), 서울자치신문 칼럼니스트

 “가해자들에게 지옥을 선사한들 무슨 소용이냐! 나는 결코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갈기갈기 찢어 놓은, 놀다가 돌을 잘못 던져서 사냥개의 다리를 다치게 했다고 수백 마리 사냥개를 풀어 그 8살 난 아이를 갈기갈기 찢어 놓은, 그 가해자 장군과 얼싸안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설령 아이 자신이 그 놈을 용서해준다고 하더라도 어머니는 그 박해자를 용서해서는 안 돼! 차라리 나는 복수의 순간을 맛보지 못한 나의 고통을, 도저히 풀릴 길이 없는 나의 분노를 간직할 거야. 나는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난 그저 신에게 그 입장권을 정중히 반납하는 거야.” “그건 반역이야.” 알료샤가 대답한다.

이러한 주장보다 이반이 알료샤에게 낭송하는 산문시 『대심문관(The Grand Inquisitor)』은 더욱 복잡한 심리적 갈등의 층위를 드러낸다. 여기서 이반은 그리스도를 고발한다. 그리스도의 죄는 인류에게 자유의지를 주고 그 대신 안락을 빼앗아간 것이다. 이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선택해야 하는, 자유라는 힘겨운 짐을 지고 살아야 한다. 왜냐면 인간에게 양심의 자유보다 더 매혹적인 것은 없지만 이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이후 찬반 양론의 철학적 쟁점이 된다.

연일 종교 재판이 열리던 16세기 에스파냐의 세비야. 그가 자신의 왕국에 오겠다고 약속한 지 벌써 15세기가 지났는데… 백 명의 이단자들이 화형에 처해진 다음 날 그가 조용히 나타난다.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보고 그를 에워싸고 따른다. 죽은 소녀가 관에서 부활하고, 감격한 민중은 흐느낀다. 바로 그때 대심문관인 추기경이 근위대에게 “체포하라!” 명령하고, 그는 감옥에 갇힌다.

한밤중에 감옥의 철문이 열린다. 혼자 들어온 아흔 살의 대심문관이 묻는다. “네가 그자냐? 정말로 그자인 것이냐?” 노인이 따진다. “도대체 뭣 하러 우리를 방해하러 온 거냐?” 노인은 그가 인류에게 묶고 풀 수 있는 권리, 즉 자유의지를 주었으니, 이제 와서 그걸 사람들로부터 빼앗을 수 없다고 질타한다. “무섭고도 영리한 정신이 너에게 빵, 기적, 그리고 권력을 제시하지 않았느냐? 너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그 세 가지 유혹을 모두 거절했다. 하지만 빵 없이 어떻게 선행을 할 수 있으며, 기적 없이 어떻게 모든 이들이 경배하게 할 수 있고, 카이사르의 검 없이 어떻게 안락의 왕국을 세울 수 있겠느냐?”

대심문관은 누군가 인간들의 복종을 담보로 자유를 대신 맡아줄, 즉 그들의 양심을 지배할 자가 있어야 한다고 강변한다. “그들의 양심을 지배하고 그들의 빵을 손아귀에 거머쥔 자들이 아니라면, 누가 그들을 지배할 수 있겠느냐? 이제 우리는 카이사르의 검을 거머쥐었으니, 너의 편이 아니라 그의 편이다. 이게 우리의 비밀이다!” 노인이 사탄과 한패라고 선언한다. “내일 맨 먼저 너를 화형에 처하겠다!” 이때 그는 말없이 노인에게 다가와, 그 핏기 없는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춘다. 그 순간 노인은 몸을 부르르 떨며 감옥의 문을 열고 외친다. “어서 가라. 그리고 두 번 다시 오지 마라… 절대로!” 그는 떠나간다.

알료샤가 소리친다. “형의 대심문관은 신을 믿지 않아. 바로 이게 그의 비밀의 전부야!” “결국 너도 눈치챘구나. 정말 거기에 비밀이 있지.” 이렇게 이반은 그리스도의 존재를 거부한다. 그는 대다수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보다 종교적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더 잘 사는 길이라 말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입맞춤은 의심에 대해 사랑과 믿음의 승리를 암시한다. 신이 없다면 인간의 행동에 도덕적 제한이 없어지지나 않을까 불안해하며 이반이 덧붙인다. “죄다 털어놨다. 그래도 한 가지를 약속하마. 먼 훗날 내가 술잔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을 때, 네가 어디에 있든, 다시 한번 이야기하러 너를 찾아가마.”

알료샤는 이반과 헤어진 뒤 조시마 장로가 임종을 맞고 있는 수도원으로 달려간다. 장로는 모든 인간의 일에서 사랑과 용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무릎을 꿇고 팔을 활짝 편 채 땅에 입을 맞추고 숨을 거둔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나리라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하루도 안 돼 그에게서 시체 썩는 냄새가 나고, 이에 조롱하는 말들이 오간다. 그렇게 드높은 정의가 치욕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알료샤의 마음은 피투성이가 된다. 그는 오래 전부터 기적이 아니라 정의를 갈구했으니.

그날 동료 신학생 라키친은 알료샤를 그루셴카의 집으로 데려간다. 그는 알료샤가 성자에서 죄인으로 전락하는 걸 보고자 했다. 하지만 알료샤는 두 사람에게 진실을 털어놓는다. “나는 사악한 영혼을 찾아 여기로 왔어. 내가 저열하고 사악했으니까. 정작 나는 여기서 진실한 누나를 발견했어.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보물 같은 영혼을… 그루셴카, 당신은 내 영혼을 회복시켜 줬어요!” 이에 그루셴카는 5년 동안 가슴속에 갈아온 복수의 칼을 내려놓는, 자기를 버리고 간 남자를 용서하는, 구원(redemption)의 첫발을 내딛는다.

그날 밤 꿈속에서 알료샤는 조시마 장로를 만나는데… “아이야, 너도 오늘 갈증에 허덕이는 여인에게 ‘양파 한 뿌리’를 주지 않았느냐?” 잠에서 깬 알료샤는 밖으로 나가 흐느끼면서 땅에 입을 맞추고 맹세한다. “결코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하여 용서를 빌고 사랑을 행하리라.” 땅에 몸을 던졌을 때 그는 연약한 청년이었지만 일어섰을 때는 한평생 흔들리지 않는 투사가 되어 있었다. 사흘 뒤 그는 수도원에서 나왔다.

그 뒤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한밤중에 표도르 파블로비치가 살해된 채로 발견된다. 유력한 용의자로 드미트리가 체포되고, 그의 피의 사실은 넘쳐난다. 피 묻은 셔츠, 돈 뭉치 등등. 드미트리는 법정에서 마지막 항변을 한다. “아버지의 피에 관한 한, 저는 절대로 죄가 없습니다! 제가 죽인 게 아닙니다! 금수처럼 방탕하게 살았지만 선을 사랑했습니다. 저에게 저의 하느님을 빼앗지 말아 주십시오.” 친부살해 뉴스가 전국을 강타한다. 이는 사회윤리적 차원의 반란이자 혁명이었으니… 작가의 눈은 이를 바탕으로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 스메르쟈코프, 카테리나, 그리고 그루셴카의 행적을 따라가며 이들의 행동과 심리를 현미경처럼 들여다본다. 특히, 죄의식을 파헤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인생 고백록이다. 주요 등장인물들이 그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는 표도르 파블로비치에게 자신의 이름 표도르를 선사한다. 이에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 그리고 스메르쟈코프의 부칭은 모두 표도로비치가 되고, 그래서 이들은 모두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의 아들들이 된다. 특히, 세 살에 사망한, 그의 둘째 아들 알렉세이는 이 소설의 도덕적 중심인물 알료샤로 부활한다. 28살에 시베리아 유형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드미트리의 삶은 그가 28살에 사형선고 받은 것을 닮았다. 고뇌와 갈등에 시달리는 이반의 의심은 감옥에서 성경을 천착한 그의 철학적 세계관을 웅변한다. 또한, 평생 간질발작에 시달린 그의 경험도 스메르쟈코프의 삶으로 형상화된다.

원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2부작으로 계획된 소설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소설의 1부를 마치고 2부를 시작하지 못한 채 1881년 폐동맥 파열로 사망한다. 이에 이 미완의 소설은 더 많은 상상과 토론을 가능하게 한다. 이를테면, 이반은 아버지를 혐오하고 은밀한 살의를 품었던, 그리하여 무의식적으로 살인을 교사했다고 자책하며 끝없는 죄의식에 시달리는데… 그는 과연 구원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그 길은 어떤 길일까?

또한, 이 소설의 주인공 알료샤는 2부에서 혁명가가 되는 것으로 구상되는데… 평범하지만 순수한 사랑과 믿음으로 무장한, 그래서 더욱 특이한, 알료샤는 왜 혁명가가 돼야 할까? 그가 혁명가로서 싸워야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는 이 소설의 제사(題詞)에 그 답이 있지 않을까 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복음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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