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좌석은 우리 모두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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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좌석은 우리 모두의 것
  • 김정민 기자
  • 승인 2023.09.12 18: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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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철
(사)세계문인협회 부이사장, 광화문사랑방시낭송회 회장, 서울교원문학회 자문위원(사)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월간 문학세계 편집주간시집 : 고향생각 한 잎, 꼭 끼는 삶의 껍질, 나를 앉힐 공간 하나, 지워지지 않는 흠집 외
(사)세계문인협회 부이사장, 광화문사랑방시낭송회 회장, 서울교원문학회 자문위원(사)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월간 문학세계 편집주간시집 : 고향생각 한 잎, 꼭 끼는 삶의 껍질, 나를 앉힐 공간 하나, 지워지지 않는 흠집 외

 지하철을 타면 좌석을 먼저 찾게 되는 나 자신이 부끄럽다. 가능하면 서서 가는 것이 몸에 좋다고 하지만 앉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나이가 무엇인지 앉아 버릇한 것이 습관이 되고 말았다. 오늘도 지하철을 타고 왕십리에 있는 사무실에 나가는 길에 겪은 일을 되새겨본다.

지하철의 좌석을 예전에는 따로 구분하지 않았었다. 어느 때부터 칸 양쪽 끄트머리에 따로 떨어져 있는 좌석을 경로석이라는 이름을 달아 우대하여 마음을 써주는 것이 고마웠다. 그러던 것이 노인이 많아지면서 그 자리에 앉기도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나이가 65세가 넘으면 앉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진 노인인데, 앉아있는 사람을 일어나라할 수도 없고 내가 나이가 위라도 양보하라 강요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일반석은 노인들에게 양보하는 자리가 아니라 젊은 사람들 좌석으로 인정한 셈이다. 경로석이 따로 있으니 그 자리로 가서 앉으라는 암시가 담겨진 말이다.

그러다가 경로석이 아니라 교통약자석이라고 이름이 바뀌었다. 그러니 나이하고 상관없이 어린이나 몸이 불편한 사람들 차지가 된다. 나쁜 생각은 아니지만 일반석에 앉은 젊은이들이 서 있는 노인을 보고 앉아있기 불편한 상황이 발생한다. 다시 좌석의 중간쯤에 임신부를 위한 좌석이 만들어졌다.

비워주기를 바라지만 어면 경우는 임신부가 오면 비워준다 하면서 그냥 앉기도 한다. 그러나 앉아있는 사람에게 양보 받기는 쉽지 않은 노릇이다. 어쨌든 좋은 아이디어를 내서 편리를 도모하는 것은 좋지만 이용자들의 협조를 요하는 일들이다.

오늘도 노인들이 앉아 있는 경로석이 모두 차서 서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사람이 많아 일반석 쪽으로 밀려나 서있었다. 앞에 앉은 젊은이가 목적지에서 일어나 내렸다. 옆에 섰던 젊은이가 앉으려던 나의 발을 밀치면서 앉아버렸다. 나는 딴전을 피며 위를 바라다보고 외면하였다. 내가 옆에 서있는 줄도 모르고 자리가 나니까 안기가 바빴던 까닭이다.

잠시 후에 다시 자리가 났지만 대각선방향이었다. 앞에 서 있던 아가씨가 앉으려다가 나를 보고 앉으라고 하자 내 앞에 먼저 앉았던 사람도 양보하고 나섰다. 나는 겸연쩍어 다음 역에서 내린다며 사양하고 말았다. 그 사람들도 마냥 기다리다 얻는 기회라고 생각하면 그 행운을 빼앗는 것 같아 출구 쪽으로 옮겨가 섰다가 다음 역에서 내렸다가 바로 옆 출구로 다시 올라타야 했다. 비윗살 좋게 그냥 앉아가도 좋으련만 불편한 마음을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결국 지하철에 자리가 없을 때는 서서가더라도 서 있는 자리를 일반석 쪽에 두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빈자리가 있어도 앉을 사람이 없을 때는 가서 앉더라도 그렇지 않을 때는 아예 기다리지 말자는 생각이다. 말마따나 오래가는 거리도 아니고 여섯 역에 불과한 거리를 서있는 다고 어려울 건 없다.

항간에 들리는 소리가 늘 마음에 걸린다.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만 65세 이상의 노인을 지공선사라고 이르는 말 때문이다. 요금도 내지 않고 타면서 자리까지 타박을 하느냐고 할까봐서다. 아직 건강을 유지하고 있으니 별 문제는 삼지 않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서 있기 어려운 노약자의 경우를 걱정하는 것이다.

어렸을 적에 아버지의 어색한 양보 이야기가 생각난다. 명절기간 중에 붐비는 버스를 탔는데 할아버지와 손녀가 나란히 좌석을 못 잡고 서있는 걸 보고 할아버지께 양보를 해드려야겠다고 마음먹고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시라고 권하였는데 앉으시라는 할아버지는 안 앉으시고 고등학교 학생 정도 나이로 보이는 손녀를 앉히는 바람에 할아버지께 양보한 게 아니라 손녀에게 양보한 꼴이 되어 옆에 서서 바라다보기가 끝내 어색하고 후회가 되더라는 말씀을 하셨다. 양보를 받았으면 응당 당사자가 앉아주어야 양보한 사람도 마음이 편하고 만족할만한 보람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양보는 나보다 나이가 위인 어른께 하는 것이지 약자도 아닌 손아래 사람에게 양보하는 경우는 거의 불가능한 경우였기 때문이다. 손녀가 귀여워서 할아버지가 양보를 해주셔도 손녀가 할아버지께 양보된 자리이니 할아버지께서 앉으시도록 해드리고 앉지 않는 것이 맞는데도 그냥 덥석 앉아버렸으니 양보한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섭섭하셨을까 이제사 헤아려 보게 되었다. 아버지께서도 적지 않은 나이였음에도 선뜻 자리를 양보하셨건만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야속하셨을 것이다.

이렇듯 양보는 쉽지 않다. 저리는 제한되어 있고 모두가 앉을 수가 없을 때 노약자가 우선적으로 앉도록 하는 것이 맞는다. 모두가 알고는 있지만 실천하기 어렵다. 건강 보다 피곤하기로 말하면 더 이상 따질 것도 없이 젊은 사람들이 앉아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좀 더 넓은 시각에서 보면, 집안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부모님을 어른으로 모시듯 사회에 나와서도 마주치는 어른들을 모시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지금은 젊을지라도 머지않아 나이가 들면 누구나 노인이 된다. 지금 노인을 잘 모시면 나중에 내가 그만큼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누구에게도 양보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무리 이기주의가 팽배해진 사회라 하더라도 육체적인 불편을 겪는 이웃을 등한시 할 수는 없다. 작은 마음의 배려 하나가 사회를 따뜻하게 만드는 지름길이 된다. 내가 남에게 사랑을 받으려면 내가 먼저 남을 사랑해야하고 내가 남에게 도움을 받으려면 내가 먼저 남에게 배려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날로 사악해져가는 사회분위기를 무관심하게 좌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가 지켜야할 공중도덕이 실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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