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종이상자 리모컨(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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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종이상자 리모컨(4)
  • 성광일보
  • 승인 2024.02.28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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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정
소설가
성동문인협회 회원
윤 정 소설가

엄마가 아빠에게 살짝 눈을 홀기는 것을 보면 엄마도 나처럼 아빠의 말을 환영하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엄마와 친구 엄마들은 통통해서 귀엽다고 하는데 아빠만 살 빼라고 합니다. 내가 아기일 때 미숙아로 태어나서 좋은 분유를 먹였다고 하는데 너무 많이 먹었나 봅니다. 

엄마가 해주는 밥도 맛이 있어서 한 공기씩 먹으면 엄마는 예쁘다고 칭찬을 하면서도 더 주지는 않습니다. 나는 밥을 잘 안 먹는 친구들에 비해 엄마의 말을 잘 들어 키도 크고 살이 찌나 봅니다. 잘 시간이 됐는데 아빠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다른 날도 내가 잠들기 전에 들어오는 일이 많지 않지만 오늘은 더 늦는 것 같습니다. 엄마도 더는 기다리지 않고 주방과 거실에 불을 끄고 내 옆에 누웠습니다. 
엄마는 며칠 전부터 안방에 가지 않고 내 침대에 와서 같이 눕습니다. 아빠가 초등학교 들어가서도 쓰라고 어른들도 누울 수 있는 넓은 침대를 사주셨기 때문에 엄마와 누워도 좁지 않습니다. 자다가 보면 엄마는 나가고 없지만 가끔은 내 옆에서 아침까지 있습니다. 

나는 엄마와 같이 자는 것이 좋지만 아빠가 싫어할 것 같습니다. 한참을 자고 있다가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엄마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아빠 목소리만 크게 들립니다. 발음이 분명하지 않은 것을 보니 아마도 술을 마셨나 봅니다. 문을 열자 나는 큰소리를 지르며 주저앉아 울었습니다. 거실은 테이블과 소파가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고 빨래 걸이가 부러져서 걸어놓았던 내 옷과 엄마 옷이 여기저기 뿌려져 있었습니다. 

엄마는 눈을 크게 뜨고 무서워하고 있고, 아빠는 막 의자를 들고 엄마를 내려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태어나서 그렇게 무서운 장면은 처음 보았습니다.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가끔 무서운 사고가 나는 것은 보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기에 안심을 했는데 지금 내 눈앞에 벌어진 일은 정말 무서웠습니다. 가금 아빠가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은 들었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입니다. 엄마도 무서웠는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아빠, 엄마한테 왜 그래!”

전에 엄마는 길을 잃어버리거나 나쁜 일이 생기면 신고하라고 전화번호를 가르쳐 준 적이 있습니다. 아빠가 엄마를 때리는 것은 아주 나쁜 일이라 안방에 들어가서 화장대에 놓인 엄마의 핸드폰을 눌렀습니다. 울면서 급하게 찾으니 숫자 112가 잘 안 보였습니다. 

“여보세요. 무슨 일이십니까?”
"우리 아빠가 엄마를 때려요, 빨리 와주세요,"
 “주소를 말해 주세요.”
 “행복동 금잔디 아파트 1404호요. 경찰 아저씨 빨리 와주세요.”

거실로 다시 와보니 아빠가 씩씩대고 있고 엄마는 어깨를 감싸며 울고 있었습니다. 머리를 치려던 의자는 빗나가 엄마의 오른쪽 어깨를 스치고 나가떨어졌습니다. 나는 아빠가 무서웠지만 엄마를 왜 때리냐고 울면서 아빠를 주먹으로 마구 쳤습니다. 그런 나를 엄마가 떼어 놓으며 내 방으로 같이 갔습니다. 잠시 후에 누군가 와서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누구십니까?”
“경찰입니다.”
“왜 그러시죠?”
“아파트 주민이 누가 크게 싸운다고 신고가 들어와서요.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무 일도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아빠의 말만 듣고 경찰은 그대로 가버렸습니다. 아빠 말만 믿고 들어와서 살피지도 않고 그냥 가버리다니. 신고는 내가 했는데 어떤 주민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경찰도 거짓말을 합니다. 엄마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습니다.

“아까 방문했던 경찰입니다.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습니다.”
“폭력사건이면 내일 아침에 오셔서 신고하세요.”
“네, 고맙습니다.”

엄마가 전화를 끊고 조용히 우는 소리를 들으며 나도 울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아침이 됐습니다.
어린이집에 갈 준비를 마치고 현관을 나설 때까지 안방에서는 아빠의 코 고는 소리만 크게 들렸습니다.
어제 아빠가 어지럽힌 거실은 아무도 치우지 않아 어젯밤 일어난 일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아무런 말없이 나왔습니다. 엄마의 눈은 퉁퉁부어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어린이집에서 아이들과 노느라고 엄마 생각을 하지 않다가 엄마가 나를 데리러 올 때 갑자기 걱정이 되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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