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동업이 만난사람] 통영 지리산도깨비 이장원과 해남 풍수박사 박경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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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동업이 만난사람] 통영 지리산도깨비 이장원과 해남 풍수박사 박경정
  • 원동업 기자
  • 승인 2024.04.13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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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터속 땅이름, 네비게이션 도로 밖, 진짜 세상에서 봄의 여행
인구 줄고 집 비어도 땅 지키는 아름다운 사람들 여전히 살고 있어
왼쪽 사진부터 ① 통영 가오치항에서 사량도를 잇는 배 사량호, ② 통영의 주산 여황산에서 바라본 통영의 밤풍경. ③ 남해안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할매들, 일곱 살부터 조개를 캐기 시작해 이 분은 올해 8학년이 됐다. ④ 진도 망금산 전망대서 해남 화원면 사이엔 명량해협이 있다.
왼쪽 사진부터 ① 통영 가오치항에서 사량도를 잇는 배 사량호, ② 통영의 주산 여황산에서 바라본 통영의 밤풍경. ③ 남해안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할매들, 일곱 살부터 조개를 캐기 시작해 이 분은 올해 8학년이 됐다. ④ 진도 망금산 전망대서 해남 화원면 사이엔 명량해협이 있다.
원동업 기자

33년 전인 1991년 남해여행을 했었다. 부산에서 시작해 광주까지 가는 15박쯤의 일정. 입대전 친구와 떠난 배낭여행이었다. 이번에 3월 29일부터 4박5일의 짧은 여행을 떠났다. 남해의 봄기운 아래 두 이웃을 만나기 위해서다. 통영 사량도 대항항 어촌신활력증진센터  지리산도깨비 이장원 활동가와 해남 풍수박사 박경정 대표가 그 호스트들,
여행을 떠나기 전 구글 프롬프트에 통영과 해남을 넣고 엔터를 친다. 전엔 10만분의 1 한국도로지도를 펼치고 찾았던 곳들이다. 통영서 2박3일을 지낸 다음의 행선지는 해남이다. 이전이라면 사량도에서 배를 타고 나와 통영시외버스터미널로 간 다음 진주로 가는 완행버스를 타고, 순천을 거쳐 해남으로 가는 번거로운 여정이었을 터. 당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이동수단은 버스가 전부였을 테니까. 이번엔 자동차에 여행가방을 싣고 간다. 최단거리 혹은 최단시간으로 안내해주는 네비게이션 서비스가 차앞에서 나를 안내한다. 세상은 변했다.
33년전, 충무에서의 김밥과 거제도 폐쇄된 군부대에서의 하룻밤과 닭장 화물차 아저씨가 데리고갔던 집이 기억난다. 논둑을 따라 학교에 가던 아저씨의 아이들. 해남은 1988년부터 1990년까지 농촌활동을 했던 곳. 옥천면, 황산면, 화원면, 내륙부터 진도에 이르는 여러 마을에서 나는 농민들과 아이들을 만났었다. 그때의 사람과 길의 풍광이 내 생에 영원히 아로새겨졌다. 내 삶이 스산할 때, 먼지 일 듯 황량할 때, 그 기억들은 흙기운으로 사람의 마음으로 내 안에서 다시 지펴졌다. 내 삶은 조금 더 안온하고 풍요하였다.
오늘의 길들은 쉬웠다. 1번 고속도로 경부선을 타고 가다, 대전에서 통영으로 이어지는 35번 고속도로를 타는 일. 충남 금산, 전북 무주와 덕유산과 장수, 경남의 생초와 산청과 진주와 고성을 거치면 어느새 통영이다. 해남으로 이동할 때 10번길 남해안고속도를 타고 갔다. '모든 길은 서울로 통하는' 한국에서, 해남-서울간 길 역시 쉽게 고를 수 있었다. 그러니 1천 킬로미터 남짓 여행길이지만, 여정(旅程)은 새털처럼 가벼웠다. 

33년전 배낭여행의 기억 따라간 2024년의 통영-해남 여행

통영은 통제영(統制營)의 약어니, 삼도수군통제영이 원래 이름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듬해인 선조16년(1593년) 삼도수군통제사 직제가 만들어져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겸임했다.  통영은 이순신과 뗄 수 없는 곳이다. 1895년(고종 32년) 폐영될 때까지 1백여 동의 관아건물들이 서고, 292년간 존속하며, 통영은 번성해왔다. 그 시대를 이곳서 일해온 박성진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삼도수군통제사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아우르는 무력을 가졌어요. 왕이 그 힘을 견제하기 위해서 통제사 임기를 2년 이상 두지 않은 거예요. 통제사가 계속 바뀌죠. 통제사가 내려올 때, 혼자 오지 않고, 시스템을 같이 갖고 오거든요. 이곳 통영은 그 시대 선진-첨단의 문화와 인재가 모인 곳이었어요. 그럼 또 이곳의 주민들이 가만 있었겠어요? 근처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엄마들이 그 인재들에게 아이들을 맡기려고 찾아오고요. 
군대도 여기서 훈련을 하잖아요. 3도 수군이 모두 어우러지면, 지역간 경쟁이 치열해요. 그 병사들 먹일라꼬 3도의 산물들이 또 다 따라와요. 수산물 풍부하지, 산 깊고 땅 넓지. 음식문화가 발달하게 돼 있어요. 
통영 12공방도 그런 예죠. 통제영이 워낙 규모가 큰 관청이라 물자 조달도 다 직접 하잖아요. 전국의 쟁이바치들이 모여들어요. 물건이 좋고 귀하니까, 한양에서도, 멀리 중국에서까지 주문이 밀려오고요. 현재의 통영이 문화예술에 강한 건 이유가 있는 거예요.”

통영의 밤은 화려했다. 세 척의 거북선(기동 가능하다)이 떠있는 통영의 밤바다엔 '통영 투나잇' 네온사인이 정답다. 그 둘레서 세 명의 중년은 섹스폰을 연주하고, 또 한 가수는 7080 포크음악과 락을 연달아 노래했다. 가족과 연인들과 친구들로 무리를 이룬 관광객들은 불야성의 거리에서 먹고, 마시고, 거닐고, 즐긴다. 통영꿀빵숍엔 길게 줄이 서있다.
이러한 번잡함을 벗어나 통영바다를 내려다보는 여황산 정상으로 길을 들어선다. 위로는 북포루, 동포루, 서포루를 잇는 통제영성(城)에 좌우로 동피랑, 서피랑이 있다. 피랑은 벼랑, 절벽을 뜻하는 이곳 말. 최고의 관광 전망이 옛날에는 군사적 전략설계와 동일시됐을 것.  이곳서 충무공은 한산대첩 학익진을 구상했을 것이다.

산과 바다 사이엔 군영과 마을이 동시에 존재했다. 통영의 땅과 역사를 토양 삼아 유치환, 김춘수, 김상옥, 박경리, 김용익, 전혁림, 유치진, 이중섭 그리고 윤이상까지가 꽃처럼 피었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 『김약국의 딸들』 『파시』엔 통영의 땅이 등장한다. 백석의 시(詩)는 이곳 서피랑에 새겨져있다. 29일은 통영국제음악제가 개막하던 날이었다. 윤이상 음악제로 불렸던 이 행사에 참여하는 지인들이 여럿이었다. 

스스로를 지리산도깨비로 소개한 이장원 선생. 그는 지리산에 올라 큰 반성을 했다.

땅과 사람의 모습 샅샅이 살펴야 삶의 길 보여

통영 가오치항에서 배를 타면 40분쯤을 지나 사량도가 나온다. 그곳 통영 사량도 대항항 어촌신활력증진센터에서 근무하는 장원 선생과 함께 지리산(이곳 사량도 상도에도 지리산이 있다)에 오르기로 한다. 넓고 중후한 ‘지리산’이기보다는 높이 훤칠한 설악을 닮은 산이다. 더구나 바다를 끌어당겨 보는 풍경이라니. 그 풍경을 보고 문화기획에 이골이 난 장원 선생이 깊이 반성한다. “사량도에 낚시객, 등산객밖에 없다고 한탄했는데, 이 산을 보고나면 그게 얼마나 무식한 말인지 알겠습니다”그는 아직 이 땅을 충분히 절감치 못한 터였다.

정상에 서보니 이 섬 이름이 사량(蛇梁)인 이유가 분명하다. 하도와 상도 사이 바다가 뱀(蛇)처럼 구불구불하다. 량(樑)은 기둥과 기둥 사이 지붕을 지탱하는 목재. 섬에서 육지 사이에 좁은 해협에도 이 '량'자를 쓴다. '섬에서 탈출해 육지까지, 들보(樑)를 타고 건널 수 있겠다'는 데서 '량'이 나온 게 아니겠냐고 장원 선생은 덧붙인다.  
우리 일행 '한국시니어교류협회'는 이곳 대항항 어촌신활력증진센터와 간담회를 진행했다. 도시재생을 주제로 창업교육을 받았던 대다수 구성원들의 관심사가 여전히 '지역-땅과 사람-의 재생'이기 때문이다. 

남해안 일대 땅과 바다를 1대 1로 벨트로 엮고, 그곳에 펼쳐진 300여개 어촌 마을에 새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국가 프로젝트에 이곳 사량 대항항이 선정됐다. 센터 박성진 팀장의 브리핑은 세심하고 알찼다. 섬의 현재 인적 구성과 그들의 연령과 생활 기반들이 촘촘하게 소개됐다. 그러한 바탕을 알아야 이곳의 사업은 촘촘히 효과를 낼 것이다.

사량도의 주민이기도 한 이재권 추진위원장이 들려준 사량도의 옛 이야기는 '섬'의 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진득하게 일러준다. 배가 삼천포에서 들어올 때, 섬할매들은 선착장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앉아 한 사람 한 사람씩 짚는다. “저 며늘아가는 참 곱다.” “저 집 아들은 대구 공장에 취직했데이.” 사람들을 지켜보는 건 할머니들만이 아니었다. 포구에 심겨진 느티나무에는 사람 열매가 열려있었다. 수줍은 동네아이들은 나무에 올라 숨어 낯선 이들을 훔쳐보곤 했던 것이다. 

어느새 관광지가 된 섬. 한해 60만도 찾고,  대략 30만이 오는 이 곳은 낚시와 등산객들의 보물섬이다. 하지만 주민들은 노인이 되어가고, 어느새 선생님들이 아이들보다 많은 곳이 되고 말았다. 분교를 포함해 여섯 개나 되던 초등학교는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풍수박사 박경정 선생은 물이 들어오는 방향으로 대문을 내라고 설명한다. 풍수가 그에겐 삶의 지침이다.

통영 다찌집, 해남 먹물오징어밥 정든가서 '항복하니 행복'하다

해남으로 떠나기 전 우리는 통영 시내 '다찌'집에서 저녁을 함께 했다. 통영음악제에 참석중인 현지인 현주 선생과, 오늘밤 먼저 서울로 떠나는 기태 선생이 자리에 함께 앉았다. 주인과 얼굴을 마주하고 먹는 일본식 선술집 다찌노미에서 유래했다는 이 술상 문화는 한국의 어부술상과 결합해 풍성하고 흥미로운 통영식 술상밥상 문화를 펼쳐준다. 해남 〈정든가〉에서 받았던 먹물오징어 밥상에서와 똑같이, 해남 〈도화지〉에서 받았던 보리굴비 밥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해산물들과 외할머니 인심 가득한 술+밥상에 그만 연거푸 항복을 하고 말았다. 

우리 땅에는 해남도 있고 남해도 있다. 해남과 진도 사이 명량(鳴梁, 울돌목)을 기점으로 서해와 남해가 갈린다. 섬 진도와 육지 해남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바닷길 명량은 험하기 이를 데 없다. 거기서 이순신은 남은 배 열두 척으로 적의 배 133척을 상대했다. 그 바다를 우리는 케이블카 타고 공중에서 수고 없이 관람했다. 

“(직접 오르는) 고생이 없으면 풍광도 (감흥이) 없어!”했던 게 엊그제 지리산에서의 최종 결론이었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진도 망금산 정상에 위치한 진도타워에서 해남 화원면에 이어지는 명량케이블카는 새의 시선을 직접 경험케 해준다. 섬과 산들이 겹겹한 실루엣들, 뉘엿뉘엿 지는 낙조, 4개의 현수교각이 지탱하는 진도대교, 회오리를 돌며 흐르는 울돌목의 파도가 어우러지자 감흥이 솟았다. 존재하는 것들은 이유가 있는 법이다. 

해남에선 박경정 선생이 우리의 숙박을 책임져주었다. 해남서 난 그는 그 땅에서 경제와 경영을 공부하고 공군장교로 복무했다. 10년을 증권사 샐러리맨으로 근무한 뒤엔 정당의 정책전문위원으로도 다시 10여년 넘게 일했다. 그뒤 세 번째 인생을 채운 것이 바로 풍수지리였다.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의 묘역공사를 책임 맡으면서 깊숙하게 '저쪽 언덕'에 발을 디뎠다.  
해남군청을 새로 지을 때 그는 긴요한 조언을 했다. 요즈음엔 비어가는 지역의 빈집을 조사하고 활용방안을 연구하는 용역을 맡아 진행하고 있다. 박경정 선생과의 짧은 인터뷰.

지역이 가진 땅의 힘, 문화의 저력 여전하다

 - 통영 사량도도 마찬가지였다. 해안가를 중심으로 어촌 지역엔 지역 소멸 이야기가 심각하다. 점차 인구가 줄어드는 이곳서 선생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
“어르신들이 돌아가시면 빈집이 남는다. 들어와 살 사람도 없고, 관리도 안 되면 폐가처럼 된다. 나는 해남, 영암 등 지방자치단체와 이런 집들을 조사하고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좋은 집과 나쁜 집을 선별한다. 상태좋고 길한 집은 고쳐서 귀농귀촌 하시는 이들과 시골유학을 오는 학생들에게 제공한다. 생활인구-관계인구를 늘이는 차원에서 민박집을 만들거나 레지던스로 제공하기도 한다. 이곳 보뜰한옥이나 해뜰한옥도 그렇게 생겨났다. 어떤 집들은 자연으로 되돌린다.”

- 해남은 어떤 곳인지 소개해 주시면? 무엇이  여기에 필요할까?
“1970년대 24만의 인구가 요즈음은 6만7천여 명으로 줄어들었지만, 해남의 농업생산성은 여전히 크다. 쌀과 배추, 고구마와 김, 마늘까지. 이곳은 친환경농업 생산 1번지이기도 하다. 기술인력들과 부가가치를 높이는 기업들도 많이 들어와 줬으면 한다.”

해남 대흥사 인근 호남식당의 상차림이다. 산에서 캔 버섯들만으로 음식을 만든다. 남도는 음식의 고장이다.

해남읍내에서는 오일장이 열렸다. 그 풍부한 물산들이 이곳에 모인다. 우리 땅 곳곳이 도시화되기 이전, 오일마다 열리는 장은 축제의 장이요 경제적 교류의 공간이었다. 지역마다 1-6일장, 2-7일장이 달라 장돌뱅이들은 떠돌았다. 해남 오일장서 만난 아영이네 국화빵, 칡즙과 쌍화탕을 파는 저 아저씨도 그렇게 삶의 주기가 형성돼 있다.
아영이네 국화빵 세정 씨는 어릴 적 자주 서울 사는 외삼촌, 고모와 이모댁을 찾아간 적이 있다. 당시엔 아이 혼자서도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에서 시골로, 그리고 그녀처럼 시골서도 서울로, 흩어진 가족들을 찾아가 방학 동안을 머물렀었다. 지역으로의 여행은 공간만 가로지르지 않는다. 우리는 시간을 가로질러 과거로 혹은 미래로 돌아다니곤 한다.

통영 가오치항에서 사량도를 잇는 배 사량호,
통영의 주산 여황산에서 바라본 통영의 밤풍경.
남해안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할매들, 일곱 살부터 조개를 캐기 시작해 이 분은 올해 8학년이 됐다.
남해안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할매들, 일곱 살부터 조개를 캐기 시작해 이 분은 올해 8학년이 됐다.
진도 망금산 전망대서 해남 화원면 사이엔 명량해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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