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영산(靈山) 가는 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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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영산(靈山) 가는 길(2)
  • 성광일보
  • 승인 2024.04.18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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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당
소설가
성동문인협회
소설분과장
김근당 소설가

남자는 2년 동안의 수업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것이 교환학생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송이에게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남자가 처음 강의실에 들어갔을 때 만난 여학생이었다. 강의실은 어느 전시회에 온 것 같이 기이했다. 꿈속 같다고 해야 맞을 것 같았다. 여학생들은 정교하게 만든 마네킹 같았고 남학생들은 나무로 깎아 만든 하얀 인형 같았다. 모두 검은 눈망울만 반짝였다. 강의실은 화사하고 사무실같이 책상마다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남자는 교수가 소개하는 동안 교단에 서 있었다. 삼십여 명 학생들에 의한 눈빛이 한 몸에 쏠렸다. 갈색 피부에 근육질의 훤칠한 몸매가 이상한 모양이었다. 호기심인지 얕잡아 보는지 모를 눈빛들이 반짝였다. 남자는 타이가지역 대학에서 온 '하칸'이라고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고 뒷자리에 가서 앉았다. 앉고 보니 여학생 옆자리였다. 얼굴이나 몸매가 예술 작품을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냉정하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는 여학생이었다.

송이는 Z시 남학생들 같지 않은 육체적 야성미와 순박한 얼굴에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남자는 그렇게 교실의 명물이 되었다. 남학생들에게는 배척의 대상이 되었지만 여학생들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강의가 끝나고 쉬는 시간이면 여학생들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남자는 여학생들에게 떠나온 나라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남자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와 형제들과 함께 멀고 먼 북쪽 타이가지역(침엽수림 지대)에서 사냥을 하며 살았던 이야기,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고 긴 겨울에는 숲속에서 며칠 밤을 자며 노루나 늑대를 사냥하기도 했던 이야기, 밤에는 숲속의 높은 나뭇가지 끝에 걸려있는 달이 사람의 정기를 깨우기도 한다는 이야기였다. 

남자는 할아버지가 당부하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어디를 가서 살든 나무처럼 살아야 한다고, 굳세고 정직하게 뿌리를 내리고 커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여학생들이 들어 보지 못했던 이야기에 끌려 점점 더 모여들었다. 남자는 점점 스타가 되어 갔고 옆자리 송이가 놓아주지 않았다.

남자도 점점 송이에게 빠져들어 갔다. 세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고 고향은 너무나 멀리 있었다. 송이의 신비로운 검은 눈동자가 놓아주지 않았다. 순진하고 거칠고 직설적인 세나와 달랐다. 남자는 졸업하고 본국에 돌아가지 않았다. 결혼하면 이 도시의 시민이 될 수 있었다. 남자는 그렇게 이 도시 사람이 되었고 졸업하는 학생들이 제일 선호하는 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남자는 그렇게 고향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어젯밤에는 생각지고 않았던 꿈을 꾸었다.

아내와 밤새도록 말다툼을 하고 새벽녘에야 깜빡 잠이 든 때였다. 남자는 영산의 오솔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겨울이었다. 나무들은 잎을 털어 버린 채 잔가지들은 하늘을 높이 뻗고 있고 바닥에 떨어진 낙엽과 하얀 눈이 푹신하게 쌓여 있었다. 산자락을 돌아갈 때였다. 뒤에서 푸드득 하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다시 '푸드득 딱' 하고 정신없이 나는 소리와 함께 눈가루와 낙엽이 온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 순간 몸이 갑자기 공중으로 달려 올라가는 것 같았다. 남자는 눈이 휘둥그러져 위를 올려다보았다. 날개 짓 한 번에 일이 미터씩 올라가는 커다란 흰꼬리수리가 크고 날카로운 발로 자신을 움켜잡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고향 하늘에 자주 나타나던 새였다. 남자는 왠지 두렵지 않았다. 흰꼬리수리는 북쪽으로 날아갔다. 도시를 지나고, 언덕을 지나고, 벌판을 지나고,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 끝없이....

얼마나 날아갔는지 몰랐다. 남자는 기쁨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벌판을 지나는 동안 동쪽 하늘에 여명이 비쳤기 때문이었다. 흰꼬리수리가 갑자기 하강하여 하얀 눈밭에 내려놓고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납자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차츰 눈에 들어오는 주변 풍경들, 바윗돌이 들쭉날쭉한 뒷산도 앞으로 펼쳐진 벌판도 낯설지 않았다. 하늘 높이 검게 우거진 수림도 그대로였다. 그런데 산 밑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집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만치 벌판 한가운데서 눈을 헤치며 풀을 찾고 있는 순록들이 보였다. 남자는 누구라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에 순록의  무리가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순록은 스무 마리였다. 남자가 집을 나올 때 가지고 나왔던 순록도 스무 마리였다. 스무 마리? 남자는 혼란한 상황을 설명해 줄 누군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저만치 눈 속에 묻혀 있는 붉은 꽃나무가 보였다. 남자는 꽃나무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산자락 밑에 있는 꽃나무는 하얀 눈에 덮인 등불 같았다. 오므린 꽃잎 속에서 촛불이 타고 있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꽃을 손으로 건드려 보았다. 꽃 속에서 세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왜 이제야 돌아왔나요?”힘없는 목소리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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