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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준기 문학평론가시절 좋은 때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오늘이 지나가면 아침에 뜨겁게 솟아올랐던 태양은 다시 떠오르지 않으며, 찬란한 과거의 발자취도 태평성대였던 부귀영화(富貴榮華)는 허공에 메아리로 흩어지는 것이 아닌가? 사람의 일은 한 치 앞을 못 내다본다는 말이 있듯이 누구든지 먼 곳을 바라보는 혜안이 없으면 반드시 주변에는 근심 걱정거리가 생기기 마련이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짚고 넓게 대비해야만 만사가 불여튼튼하고 밝고 창창한 미래의 주역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본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어원은 예나 지금이나 불변의 법칙이며 아무런 씨앗도 뿌리지 않고 노력도 없이 무슨 꿈을 꾸며 어떤 빛나는 미래지향적인 생각이 떠오르겠는가 말이다. 사람들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돈이 풍족하다고 해서 반드시 모든 것이 행복한 것이 아니며 또 한 돈이 없다고 해서 꼭, 불행하다는 것은 아니다. 물질과 정신세계 합일치가 되어야만 영혼과 육신도 편안하고 만사가 형통할 것이라고 본다. 시련과 고난은 참을 수 있다고 하지만 꿈과 희망 이상이 없는 가난은 비참하고 초라한 결과가 기다리기 마련이다. 어차피 우리네 인생은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인 것을 어찌 하여 귀중한 생명을 담보로 삼을 것은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부지런히 공덕을 쌓고 복 짓는 일을 하다 보면 노력한 만큼의 대가는 자신이 일구어 놓은 금자탑의 높이보다 더 태산을 이룰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즉, 인과응보(因果應報) 뜻글처럼 선을 행하면 좋은 보답을 받고, 악을 행하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말임에는 틀림이 없다. 출이반이(出爾反爾)라 좋은 일과 나쁜 일의 출처는 스스로에 의하여 좌초된 결과가 기다린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처럼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는 글처럼 영혼의 계절을 맞이하여 후회하지 않는 날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바이다.

뉴스 | 성광일보 | 2024-05-29 13:27

윤백중 수필가들어가는 문은 고대 로마의 개선문처럼 아치 모양이며 성서를 상징하는 내용의 비유와 풍류의 언어로 장식되어 있다. 러시아 황실 문장인 쌍두 독수리가 출입자를 감시하듯 내려다보고 있다. 상트페테르브르크에 있는 토끼섬의 표트르 파블롭스키 목조사원을 건설하는 데 많은 자금과 인원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목조사원은 화재와 번개의 피해로 얼마 후 석조사원으로 개축했다는 설명도 있다. 사원의 이름도 성자의 이름을 본떠서 지었다.쌍두 독수리 문장은 이미 동서 로마로 분리되기 전인 로마제국에서도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표상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쌍두 독수리는 이 도시가 200년 이상 러시아 수도였으며, 러시아 황실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15세기경 이반 3세 때부터 쌍두 독수리 문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쌍두 독수리 가슴에는 모스크바 공후의 문장인 말 탄 성자 게오르기가 창으로 뱀을 찌르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으며, 왼손에는 황제의 위엄을 상징하는 지팡이를, 오른손에는 십자가가 달린 황금 구救를 들고 있다. 잘 보이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쌍두 독수리 문장에는 성 베드로를 모욕했던 시몬이 하늘에서 요새로 떨어지고 있는 모습도 새겨져 있다. 또한 성 베드로가 기도를 통해 악마를 내쫓는 형상이 백색으로 조각되어 있다. 표트로 프스키의 문을 지나서 안으로 들어가 서쪽으로 갔다. 표트로 대제의 모조 목선을 전시해 놓은 방과, 화폐를 만들던 조폐국의 방을 보았다. 표트르 파블롭스키 사원 맞은편으로 들어가면서 정문에서 200미터 쯤 거리 왼쪽에 표트르 대제의 동상이 있다. 청동 좌상으로 된 표트르 대제의 데드마스크를 본뜬 이 동상은 세계적 현대 조각가 미하일 셰마킨이 1991녀에 만든 작품이라고 하는데 관람용 같이 보였다.얼굴은 잘 생겼으나 양 손가락이 징그럽게 길다. 키는 2미터가 넘어 보였다. 실제로 표트르 대제는 미남이었다고 하는데 동상 전체가 우수꽝스럽게 생겼다. 손가락이 긴 것은 대국으로 뻗어가는 뜻을 상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표트르 대제의 청동상은 두 무릎과 손목 손가락이 반질반질하게 되어 있다. 이곳을 만지면 소원이 성취된다는 안내자의 속설 설명 때문으로 보였다. 이런 속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러 곳에 있다. 필자도 손목과  손가락을 만져보았다. 여기서 좌측으로 돌아 남쪽으로 100미터 정도 가면 네바강으로 나가는 큰 문이 있다. 이 문은 이 섬이 감옥으로 사용할 때 죄인을 사형시켜 시신을 네바강에 버릴 때 사용했던 문이라고 한다. 이 문 우측에 홍수 때 물의 수위를 표시하는 A-B 선이 설명과 함께 실제 홍수 때 물 높이를 표시한 것도 보았다.가장 최근에 있었던 홍수는 1999년 핀란드 만에서 불어온 태풍이 네바강을 역류시켜 발생한 것으로, 발트 해수면보다 2.66미터 높은 수면을 기록하고 있다. 1975년 9월의 홍수 물 높이와 비슷했다. 섬 전체가 물에 잠긴 것은 백 년 동안에 네 번 있었다고 한다. 이곳 큰문을 지나 네바강과 마주치는 미니 선착장같이 된 물가에는 성벽 밖 서쪽 담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담 모퉁이를 도니 모래사장과 야외 수영장이 나왔다. 이곳에는 젊은 남녀들이 거의 나신으로 햇볕을 쬐고 있었다. 이곳도 북유럽과 같이 햇볕이 부족하여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장면이라 생각했다. 처음에 나무로 만든 요새를 대리석 성벽으로 수리한 것이 1780년이라고 음각陰刻한 대리석 표시가 성곽 바깥쪽 성벽 한 곳에 붙어 있다. 개방된 나라의 사회는 사원도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하늘로 높이 솟은 황금빛 첨탑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이 정교 사원은 필자가 갔을 때는 사원 전체를 수리하느라고 일반인의 입장을 막았다. 가이드의 섭외로 어렵게 들어갔다. 탑도 전체를 보수 중이라 제일 높은 산의 높이가 70미터인 이 지역에서 121.8미터 높이의 황금빛 첨탑이라고 설명하는 안내자의 말에 실감이 나지 않았다. 도메니코 트레지니라는 이탈리아 건축가가 1700년 초부터 21년 동안 건축하였다는 이 사원은 반원 모양의 전통적인 러시아 정교회 사원과는 달리 눈과 비바람에 잘 견딜 수 있게 실용적이고 상징적인 철탑 구조로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사원 내부도 커다란 창을 통해 빛이 밝게 비쳐 들게 하여 황금빛 장식들과 잘 어울리게 했다.이곳은 첨탑 중간 아래쪽 종루 밑에 커다란 시계가 걸려 있어 18세기부터 요새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 교회가 종소리로 시간을 알리던 중세의 방법이 시계로 바뀌었는데, 이것은 당시 파리 로마 런던에서나 볼 수 있던 사원 외벽의 시계가 러시아의 새 수도에도 나타난 것이다. 첨탑 종루 윗부분에 매달려 있는 철재 천사 조각상을 이곳 사람들은 '날아다니는 성처녀'라고 부른다고 설명했다. 이 첨탑은 1800년 초 스웨덴과 전쟁할 때 스웨덴을 꼭 이겨달라고 기원하는 의미로 지은 사원이라고 한다. 수도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정해진 뒤 토끼섬 안의 사원은 로마노프 왕조의 황실 납골당으로 이용되었다는 설명이다. 알렉산드로 3세와 상프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표트르대제의 유해도 이곳에 잠들어 있다고 말했다. 현재 상트페트르부르크 역사박물관이 있는 이 성당의 내부는 성상벽 聖像壁과 성모의 탄생을 그린 귀중한 그림들이 있다고 설명했다.토끼섬은 유럽의 성곽 도시처럼 견고하게 화강암으로 쌓아 올린 울타리로 되어 있다. 요새는 원래 전쟁 때 방어 목적으로 설계되었으나 전쟁에 사용된 적은 없고, 18세기 후반에는 정치범들을 수용하는 교도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표트르 대제의 아들 알렉세이도 아버지의 개혁을 반대하다가 죽임을 당하기 전에 갇혀 있던 곳이라고 한다. 19세기 중엽 도스토옙스키가 페트라세프스키 사건에 연루되어 반년 이상 옥고를 치룬 곳으로도 알려진 곳이다.네바강 변에 걸쳐있는 작은 토끼섬이 러시아 로마노프왕조 제4대 황제 표트르 대제의 유해가 잠들어 있는 러시아 제국의 중요한 역사의 현장이었음을 확인하면서 깜짝 놀랐다. 무인도일 때 토끼가 많이 살아 토끼섬으로 불렀다고 한다.

뉴스 | 성광일보 | 2024-05-29 1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