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영산(靈山), 백두산에 가다(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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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영산(靈山), 백두산에 가다(Ⅱ)”
  • 성광일보
  • 승인 2024.07.25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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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광일보(성동신문·광진투데이)문화기획단 백두산 탐방
- 6월 21일~25일까지 4박5일, 백두산 및 고구려유적지 탐방
보호한다는 핑계로 유리벽에 갇혀있는 광개토태왕 비석, 현수막을 펼치고는 사진도 찍지 못하도록 감시가 철저하다.
김흥국 편집위원장
김흥국 편집위원장

지난 3월 성광일보(성동신문·광진투데이) 편집위원 모임에서 이원주 대표가 십여 년을 진행해 온 역사문화기획단이 금년은 해외 역사 탐방을 해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단합이 잘되기로 소문이 났듯이 전체가 찬성한 가운데 첫 번째 탐방지는 당연, 민족의 영산 백두산과 웅대한 고구려의 역사가 숨 쉬는 광개토대왕 능이 있는 집안으로 결정되었다. 그렇게 백두산 역사탐방의 시작은 조촐했으나, 기대는 거창했다.

이 땅의 신령한 산마다 산신령이 계시듯이 민족의 성지 백두산은 당연히 단군 할아버지가 산신령이란 오랜 말이 기억났다.
행여나 마음에 출발부터 고조상 할아버지께 어리광 부리듯 시진평도 몇 차례에 간신히 본 백두 천지를 제대로 보게 해달라고 단군 할아버지께 빌고 빌면서 올랐다.
기도의 염원이 통했는지, 아님 멀리서 온 손자들이 갸륵했는지 안성맞춤으로 비바람과 안개가 걷히면서 백번 가서 두 번 본다는 천지를 한번 가서 두 번 보는 기적을 맛보았다.
모두가 기쁨과 환호의 감격을 맛보며 이어서 흐르는 눈물의 짠맛도 보았다. 백두 정상에서 배고픔 대신 몇 가지 맛을 동시에 본 것이다.

북쪽(북파)에서 바라 본 백두천지<br>
북쪽(북파)에서 바라 본 백두천지
서쪽(서파)에서 바라 본 백두천지<br>
서쪽(서파)에서 바라 본 백두천지

백두산 호수의 명칭이 천지가 된 것은 조상님의 깊은 철학이 담겨있다. 우리 민족은 파미르고원에서 출발하여 북으로, 북으로 이동해서 천산산맥을 지나 멀리 알타이산맥의 동쪽을 따라 바이칼 호수에 자리를 잡았다.
오랜 세월 빙하기가 끝나서 바이칼 호수의 물이 점점 불어 호수 북쪽에 살던 동이족의 일부 인, 맥족은 베링 해를 건너 아메리카로 넘어가 아메리칸인디언이 되었고 나머지는 계속 남하하여 멕시코까지 내려갔다.
그래서 “멕시코”는 맥족이 사는 곳 “맥이곳”이 영어로 멕시코가 된 것이다. 그들의 전통에는 지게와 윷놀이 등 많은 부분을 우리 민속과 공유하고 있으며 우리의 옛말들이 이들 속에 남아있다.
한편으로 바이칼 호수 남쪽에 거주하던 우리 직계 조상은 호수물이 불어남에 따라 점점 남쪽으로 이동하여 고조선의 본거지인 요하 지역에서 요하문명을 만들었다. 

요하문명은 동이족이 만든 동이문명으로 오늘날 중국은 이를 동북 공정의 일환으로 황제족문명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는 속상한 현실이다. “오호~ 신 이시여 이러한 분통 터지는 일이 더 이상 생기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조상은 수천 년 역사와 민족의 얼을 간직하기 위해 바이칼 호수를 천해라 불렀고 天海의 맥을 이은 백두산 호수를 天池라 불렀다. 마치 엄마와 자식을 핏줄 연결하듯 기운을 연결한 것이다.
천지는 옥황상제의 딸이 거울을 떨어뜨려 생겼다는 전설과 딱 맞는 하늘 연못으로 天海와 天池는 하늘 바다와 하늘 연못으로 배달민족의 기운이 힘차게 맥놀이 하는 동이족의 성지다. 그래서 백두산 탐방은 조상의 얼을 찾아 역사의 숨결을 느끼는 문화탐방 길이다. 하지만 곳곳에서 조상의 숨결을 차단하는 분통의 길이 계단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조상의 얼을 느끼기에는 단속이 심해 느낌이 들어올 여유가 없었으며, 역사의 현장에서 현수막을 걸고 사진을 찍을 수조차 없었다. 조상의 땅에서 조상님 뵐 면목이 없는 주워 온 자손이 된 기분이다. 두고 보자는 무서울 것 없는 마음만 분통에 담았다.
대충 250년 전, 조선의 열혈선비도 같은 길에서 분통을 마음에 담았으리라~.
양반전을 쓴 연암 박지원은 요동 땅을 지나면서 “한바탕 울기 좋구나! 정말 울고 싶구나!”라며 넋두리를 하였다(好哭場, 可以哭矣). 넓고 넓은 조상 땅을 보고 좁디좁은 조선의 울타리에 이전투구하며 당파싸움에 이골 난 정치하는 작자들과 불쌍한 백성들의 굶주림을 생각하고 크고 풍성한 조상의 땅에서 빼앗긴 들에 대한 설움이 깊었을 것이다.

그는 열하일기에서 부전자축(不戰自縮)이라 표현했다. 전쟁도 하지 않고 빼앗긴 조상의 땅에 한탄했으며, 위대한 조상에 대한 못난 설음과 널븐 땅에 대한 부러움의 울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바탕 크게 울고 싶구나!! 했다.

필자도 조상의 땅을 돌아보며 조상의 땀과 얼이 스민 역사의 땅에서 사진도 제대로 못 찍는다니 정말 씁쓸한 울분을 느끼며 “호곡야 가이곡의~”라고 울부짖었다.
“잠시만 기다려라~! 내 곧 배달민족의 영웅 광개토태왕 할부지를 만나 작금의 억울함을 세세히 일러바치리라~!! 그래서 호태왕의 신령한 힘으로 이 민족의 미래에 다시 한 번 영광이 펼쳐지게 되는 그 날을 빌고 빌어 꼭 분통을 삭이리라~!!!” 단단히 마음먹고 광개토태왕의 능을 찾았다.

필자는 우리 배달민족의 영웅을 꼽으라면 첫 번째 민족의 시조인 환인 천국의 안파견 시조를 꼽는다. 두 번째는 배달민족의 기개를 중원 천지에 남긴 배달국 14대 자오지 환웅인 치우천왕을 꼽고, 세 번째로 호태왕 광개토태왕을 꼽는다.(나머지 몇 분은 독자 여러분이 꼽아보시길)

 

 

 

 

 

 

광개토대왕의 정식 명칭은 국강상광개토경 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나라의 격을 하늘만큼 높이고 강역을 최대로 넓히고 만백성을 평안하게 한 큰 덕을 가진 왕이란 뜻의 최고 호칭으로, 줄여서 호태왕이라 한다.
오래전 광개토대왕의 명칭을 호태왕으로 통일하자는 한중일 역사학자의 합의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훌륭한 명칭을 우리 사학자들이 반대해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심한 강단 주류사학자들이다.
호태왕이 돌아가신 뒤, 아들 장수왕은 능 조성 작업에 착수하면서 태왕의 업적을 새긴 천척비(千尺碑)를 세웠다. 당시 6.4미터 높이는 사람의 몇 배 크기로 동아시아 최고 높이의 비석이며 단단한 화강암에 총 1.775자를 새겼다.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部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유석시조추모왕지창기야.  출자북부여. 천제지자. 모하백녀랑. 부란강세. 생이유성)으로 시작하는 내용은?

장군총으로 불리고 있는 장수왕릉

옛날 나라의 기틀을 닦으신 시조 추모왕께서는 북부여에서 오신 천제의 아드님으로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다. 알을 깨고 내려오시니, 출생 자체가 성스러웠다.는 내용이다. 참고로 하백은 서해용왕을 말한다.
태왕의 전성기 강역이 약 56만 제곱킬로미터라고 한다. 이는 한반도 면적 22만 제곱킬로미터의 약 2.5배의 넓이다. 북으로는 블라디보스톡을 넘어 러시아 일부와 서쪽으로는 내몽골 가까이 강역을 넓혔다. 명칭 그대로 “국강상 광개토경”을 이룬 것이다.

일제는 태왕의 비문 일부를 위조하여 그들의 임나일본 설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들이 이 땅에 저지른 온갖 해악 질과 위조된 많은 문서를 보면 이 또한 비석의 글자를 위조했음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본래 섬나라 백성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습성이 있다. 제대로 아웅 한 것이 진주만 습격이다. 그래서 미국이 철저한 보복을 한 것이다. 

그들의 못된 짓은 우리 역사를 조작하여 환국을 환인으로 배달국의 환웅을 환인의 아들로 변조하여 우리의 9000년 역사를 4000년 역사로 꾸겨 넣었다. 그리고 단군을 시조로 만들기 위한 시나리오는 곰과 호랑이가 인간이 되기 위해 하늘에 빌었고 이들의 간청을 못이긴 천신의 아들 환웅이 나타나 3×7일을 굴속에서 쑥과 마늘을 먹으면 인간이 된다고 했다.

용맹한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뛰쳐나갔고 미련한 곰은 끝까지 남아서 여인으로 변했다. 그래서 천신인 환웅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으니 그분이 단군시조다.
얼마나 유치한 각본인가? 유전법칙을 연구한 멘델이 관을 뚫고 나올 발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수십 년을 이렇게 배웠다. 일제는 단군신화에 너희 조선은 미련곰탱이 자손이니 일본의 식민백성으로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일본 왕을 섬기며 이등국민으로 살라는 저주를 주입한 것이다.

단군신화로 환인과 환웅은 천신이 되어 사라지고 환인 천국과 환웅 배달국의 5000년 역사가 석기 시대로 포장되어 통째로 사라졌다. 수천 년의 역사도 말아 먹는 그들에게 비문 글자 몇 개 말아 먹는 것은 밥 말아 먹듯 쉬웠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엉터리역사를 배워 염색체도 틀린 곰의 자손으로 동물원의 곰을 할머니라 불러야 하는 곰탱이가 되었으며, 배달민족의 근거는 사라지고 오늘날 배달하는 사업체만 성업 중이다. 정말 한심한 이 나라 강단 주류사학계다.

각설하고 왜정 때 조국을 잃은 비분에 정처 없이 떠돌던 독립투사 겸 사학자가 있었다. 나라를 잃고 굶주리며 떠돌던 단재 신채호선생은 어렵게 찾은 호태왕비석의 진위를 제대로 알아보았고 비석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내용을 판독하여 위대한 상고역사를 쓰는 자료로 삼았다.

우리는 단재 선생이 흘린 눈물의 호태왕비석에서 또 다른 비분의 눈물을 삭였다.
일체의 현수막을 들고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말과 보호한다는 핑계로 유리벽에 갇혀 손길도 숨결도 느낄 수 없는 속상함은 1700년의 세월을 건너온 후손의 도리를 제대로 못한 송구함이다. 하지만 뒤편에 태왕을 모신 능이 있다하여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오호통재라~ 바라보는 태왕의 능은 사진처럼 허술해도 너무 허술했다.
못나디 못난 조선의 왕릉도 이런 푸대접은 없을 정도로 허망했다. 올라가는 돌계단은 무너져 더 이상 쓰러질 곳이 없을 만큼 쏠려 있으며 능 입구는 도굴당한 현장을 감식반 기다리듯 적나라하게 열려 있었다.
이것들이 저들의 직계 조상이라면 이러한 대접을 했겠냐는 울분에 울화와 함께 이번에는 혈압까지 올랐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인가? 

당당한 고구려의 기상을 가진 후손들이 아닌가? 곧 마음을 정리하고 정갈히 일렬로 맞추어 목례로 합장하며, 또 한 번 위대한 호태왕께 빌고 빌었다.
“먼 훗날 당신의 후손들이 미래의 중심에서 잃어버린 조상의 땅을 회복할 기회가 왔을 때 이승과 저승에서 힘을 합하여 영광의 그날을 함께 하자고, 그래서 통쾌하게 분통을 삭일 그날을 기대하며 안 죽고? 호시탐탐 기다리겠습니다.”며 미래를 예약했다.

태왕릉을 참배하고 내려오니 입구에는 장사에 밝은 중국인 부부가 특유의 웃음으로 우릴 맞이한다. 이 더운 날, 너희들이 시원한 음료를 안 먹고 못 배기지 하는 웃음이다. 우리는 인심 좋은 부자나라 관광객처럼 깎을 틈도 없이 얼린 음료수와 캔맥주로 목을 축이고 노란색의 토산 막걸리가 있어 혹시 조상의 손맛이 있을까 하여 한 통 샀다. 옥수수 막걸리가 달기도 하지만 우리 입맛은 아니었다. 하긴 이번 여행은 역사 답사를 겸한 다양한 맛 여행이 아니던가?

이어서 호태왕의 아들로 뒤를 이은 집안(集安)의 장수왕 장군총을 향했다.
장수왕(長壽王)은 말 그대로 長壽를 한 왕이다. 재위 기간 79년으로 약 97세의 향년을 지냈다. 
자신의 위치를 최대한 활용하여 안으로는 왕권을 강화하고 밖으로는 주변 나라를 장악했으며 선조 대의 원수인 북연과 백제도 단단히 복수하여 조상의 한도 풀었다. 이는 오랜 세월 노련한 정치의 관록으로 국력을 단단하게 세운 결과다. 

하지만 필자는 엄청 아쉬움이 남았다. 만약에, 만약에 역사에는 만약이란 약은 없지만 광개토태왕이 장수왕 수명 절반만 살았다면 오늘날 중국의 역사와 지도가 바뀌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강하게 해본다. 하늘은 어찌 영웅이나 천재는 요절시켜 데려가는지 쯧쯧쯧

이러한 아쉬움을 가지고 수박 겉핥기식으로 각잡고 장군총을 맴~돌때, 때마침 내리는 소낙비를 핑계로 서둘러 다음 일정을 향했다.
내일 심양을 가기 위한 디딤돌로 단동시로 가는 길의 중간에 배 타고 압록강 맛보기 일정이다. 양념으로 강 건너 북조선 인민 쳐다보기는 덤이다. 
강은 국경이 없어 배로 가까이 다가갈 수도 있지만 그럴 필요를 못 느껴 그냥 먼발치서 인민들의 삶이 고달프지 않기를 빌면서 얼룩진 북녁땅을 바라보았다. 어쩜 그렇게 같은 하늘, 같은 핏줄로 정반대의 삶을 사는지,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애잔한 동포애를 느꼈다.

압록강 건너편에 있는 북한의 철조망과 감시초소

하지만 애잔함에는 인정머리가 없는 듯, 두만강 푸른 물이 아닌 압록강 푸른 물에 노 젖는 뱃사공의 노랫가락에 묻혀 버리고 지는 해를 아쉬워하며 서둘러 단동으로 향했다. 단동은 압록강 하류의 신의주와 마주한 북중 간 최고의 교역 다리가 있는 곳이다.

어둠이 짙어진 단동은 십여 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활달한 시가지와 화려한 조명으로 신도시에 온 분위기였다. 휘황한 조명의 다리와 옆에 나란히 짝해 있는 압록강 단교(斷橋)는 한국동란의 참상을 잊지 않으려 발버둥 치듯 짤린 모습 그대로 할 일을 잃고 있었다. 다리 저편 어둠이 물든 시간의 장막 속에 북녘 땅과 함께 이성계를 만든 위화도가 웅크리고 있다. 까마득한 시공 틈에 역사의 낱장 넘기듯, 어딘가 속삭이는 역사의 현장 보듯, 잠잠한 시간 틈에 동포와 조상과 역사는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여행의 마지막 밤을 그냥 보내는 것은 마치 성스러운 여행의 신성함을 훼손하는 듯, 좁은 호텔방에 둘러앉아 백두 천지와 장백폭포 호태왕릉을 안주로 마치 이승의 마지막 날 대하듯 압록강 물이 먼저 마르나 술이 먼저 마르나, 이 밤에 산접동새가 어디서 울던 우리는 마시고 떠들고, 떠들고 마신다. 내일이 없는 나그네의 오늘이 되어 화기 애매한, 막 밤을 그렇게 보내고 그렇게 먹어도 속이 쓰리지 않는 중국산 파이주(白酒)에 놀라며 이른 아침 심양으로 향했다.

휘황한 조명의 다리와 옆에 나란히 짝해 있는 압록강 단교(斷橋)

심양은 동북 삼성에서 가장 큰 도시로 원나라의 수도였으며 국제공항이 있어 백두산 여행 때 많이 이용하는 곳이다. 그래서 마지막 역사 탐방은 심양의 북릉공원을 택했다.
공원은 청나라 2대 황제 황태극의 능으로 우리에게는 병자호란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우리는 이미 그의 싸가지 없는 성깔을 남한산성이란 영화를 통해서 맛보았다.

영화는 망해서 꿈틀거릴 힘도 없는 명나라를 궤변에 가까운 충성심으로 어버이 모시듯 섬기다 죽자는 파와 항복해서 살자는 파가 굶주린 백성은 염두에도 없이 말싸움하는 내용이다.
결국 썩어빠진 선비들의 갑론을박 끝에 인조는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삼고구궤(三顧九饋)라는 만백성의 임금으로 타국의 임금에게 신하의 예로 항복하는 의식이다. 
삼고구궤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이마에 피날 만큼 땅에 찧는 비참한 굴욕이다. 그렇게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고 60만에 이르는 인질을 보낸 인조는 조선의 보기 드문 암군이다. 이러한 내용은 송파구 삼전동 삼전도비에 새겨져 있다.

한겨울 수천 리 길의 추위에 인질의 절반은 얼어 죽고 맞아 죽고 굶어 죽었다. 그러고 남은 인질은 명나라 싸움에서 화살받이로 세워졌다. 그러고도 살아남은 모진 목숨은 숭덕제 능공원의 가장 힘든 호수 바닥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여성들은 화냥년(還鄕女)으로 돌아와 손가락질에 시달렸다.

정치판 패거리 싸움의 결과로 백성만 죽을 지경이다. 당시의 당파싸움이 작금의 이 나라국회에서 딱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어쩌면 그리도 닮았는지 !! 백성만 불쌍하다. “오호통재라~~” 할 수 있는 욕이 있으면 다 먹이고 싶다.

왼쪽 동상 사진은 숭덕제 황태극 동상이다. 또렷하게 새긴 “애신각라 황태극”이란 글자는 필자가 크게 덧붙였다. “愛新覺羅”는 “신라를 아끼고 신라 사람임을 잊지 말자”는 뜻이다.
청나라는 신라의 후손 김함보의 자손이 세운 나라로 처음에 황태극은 같은 동이족으로 명나라를 섬기지 말고 서로 형제로 지내자는 제의를 했지만 깔끔하게 거절당했다. 그래서 그들은 명나라와 싸우기전에 배후에 작용할 조선을 먼저 박살 낸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그는 간신히 반백년을 살았다. 우리는 간신히 공원 입구에서 “성광일보 문화기획단 백두산 탐방”이란 현수막 사진 한 장을 쫓기듯 건졌다.
4박 5일의 백두산답사와 고구려 역사 탐방은 내 삶의 버킷 리스트 중 하나로 숙제 하나를 마친 느낌이다. 오래도록 간직될 변화무쌍하게 천지가 펼친 드라마는 더없는 선물이다. 건강하고 무탈하게 함께한 성광일보 대표를 비롯한 회원들께 고맙다는 인사를 올리며 졸필의 역사 탐방기를 마무리한다.  【김흥국 편집위원장】

북릉공원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는 성광일보문화기획단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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