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수필가, 사진작가)몇 해 전 낙산공원 인근 한 카페의 야외 테라스에서 사진 촬영을 하다가 우연히 장미나무에 피어 있는 장미꽃을 보았다. 장미 특유의 붉은 색은 피보다도 강렬해 보였다. 헌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꽃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로 이미 생과 사의 구분이 모호한 그대로 박제가 되어 버린 모습이었다. 살아서 싱싱했을 때보다 더 오묘하고 깊은 색상과 자태를 뿜어냈다. 문득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이 떠올랐다. 살아서 그대로 미라가 되어버린 장미의 열반인가? 지구상의 유기체 중에 유독 인간만이 생로병사라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치를 거부하며 피하려고 몸부림친다. 다른 대자연의 생명체들은 있는 그대로의 순리를 받아들이기에 인간과 같이 느끼는 고통은 없다. 오죽하면 불교에선 이러한 “축생"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해탈”만이 궁극의 열반이자 최고의 경지라 선포하였겠는가? 물론 나이 들어 늙고, 병들고, 죽음의 열차의 종착역이 가까워질수록 슬프지 않을 인간은 없다.그토록 아름답던 얼굴과 피부는 생기를 잃고 주름이 자욱하며 꽃보다 곱던 몸은 마른 가시나무처럼 앙상하고 볼품 없어져가고 기억과 의식, 민첩성은 스스로 인지하기도 전에 서서히 퇴행되어간다.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인간도 피해가진 못 했다. 진정 “하루 밤의 꿈결 같은 젊음의 날들이여, 우리들의 뜨겁고 아름답던 사랑이여…”이미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필자 역시 슬픔이 찾아오는 것은 사실이다, 허나 상대적으로 좋은 점도 있다. 체력과 여건의 한계로, 하루에 이것저것 여러 일을 하고 벌리기보다는 하루 한 가지씩, 그것이 일이 되었건 사람과의 만남이든 좀 더 여유 있게 집중할 수 있어서 참 좋다. 그리고 와인과 위스키도 오랜 기간 숙성 될수록 맛과 향이 깊어지기 마련이다.사람 역시 그렇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오크통 속에 좋은 포도 원재료를 넣고 좋은 환경에서 숙성 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숙성된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는가? 진정 사람에게서 하늘 냄새가 나며, 눈빛과 표정은 늘 여유롭고 자상하며, 가슴속에는 무언가 뜨거운 태양을 품고 사는 사람이다. 그의 외적인 심미적 모습은 붉은 태양이 지면서 나타나는 노을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절대 과장이 아니다. 좋은 술을 감별하려면 반드시 깊고 넓은 성숙된 안목이 필요하다.현대 사회는 삶의 질 향상과 의료 수준의 발전으로 인간의 평균 수명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허나 100세까지 산다고 하여도 노년기의 삶의 기간만 기형적으로 늘어나는 것이 축복인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적어도 오십대의 신체 모습으로 칠십을 보내야 가치 있고 온전한 장수시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노력여부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사실 거의 어려운 일이다. 어차피 시간은 흐른다. 남은 시간은 갈수록 적다. 어쩌면 우리 삶의 가장 깊고, 짙게 숙성된 담금 주를 개봉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 이대로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기보다는 파티를 준비하고 축제를 즐겨야 한다. 참 벗들은 많을수록 좋을 것이다.함께 나눌수록 풍성할 것이다. 식탁 위에는 장미꽃 장식과 함께, 각자 살아온 드라마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줄 일기장과 사진첩, 좋아하는 시집 몇 권, 달콤한 쿠키 조각, 향이 좋은 쿠바산 시가 몇 개비, 그리고 아직 심신의 상태가 비교적 건강할 때 아낌없이 소중한 이들에게 사랑한다고 얘기하자. 시기를 놓쳐 버리면 가장 후회되는 것이 이것이라고 앞서 산 이들이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다.마음속에 진주를 품어도 밖으로 내뿜지 않으면 알지 못하고 눈으로 볼 수 없으며 만져볼 수 없다. 사랑도 가슴 속에만 머무르면 완전한 사랑이 아닌 것이다. 진정으로 타인을 사랑하려거든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또한 사랑을 할 때에는 실익이나 조건을 따지지 마라. 사랑 그 자체는 고귀하고 영롱한 것이다. “해는 저물 때 가장 붉다.” 붉을수록 뜨겁고 열정을 다한다는 것이다. 밤하늘의 무한의 별들도 그 수명이 다할 때 가장 밝은 빛을 낸다, 마지막 에너지를 소멸하고 한줌의 우주의 먼지로 돌아가는 것이다. 지난날 나뭇가지에 위태롭게 매달린 채로 박제가 되어버린 장미가 내게 말했다.“때가 되어 내가 피니 아름다웠고, 때가 되니 내가 지고, 계절이 바뀌면 또 다른 장미가 피어나 만발할 거라고.”
뉴스 | 성광일보 | 2024-05-10 15:09
김근당 소설가팀장인 남자는 그로 인해 경고 처분을 받았다. 남자는 허탈했다. 팀원들의 사기도 침체된 것 같았다. 그래서 남자는 퇴근 무렵에 기분풀이를 하자고 문자를 보냈다. 고향의 대학에서 흔히 하던 일이었다.주류와 경양식에 음악이 흐르는 카페였다. 팀원들은 남자가 권하는 술에 오랜만이라 취하는 것 같았다. 구석 자리는 조명이 흐르고 분위기가 묘했다. 몇몇 모여 앉은 팀원들이 계속 뭔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주도하고 있는 사람은 불빛 흐린 구석에 앉아 있는 선임이었다. 선임은 남자를 흘낏흘낏 건너다보며 직원들에게 계속 속삭였다. “분위기가 다운된 것 같은데 건배하고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자고, 서로 속닥거리지 말고, 자, 건배!”남자는 직원들의 관심을 끌어내려 했다. 그러나 분위기는 선임의 손에 있었다. 건배를 하는 척 술잔을 들고는 조금 지나자 자기들끼리 속삭였다. 남자는 귀를 세웠다. “저 원시인 같은 인간이 팀장이라고 팀원들 족치기나 하지, 어떻게 업무 라인이 마비되었는지도 모르고, 저런 멍청이하고 일 할 수 있겠니.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저 인간 때문에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니까.”선임의 속삭이는 소리가 남자에게까지 건너왔다. 남자는 술을 마셨다.“그러게 말이야, 회사 평가에서도 업무 성적이 늘 꼴찌잖아.”다른 직원이 속삭였다.“그래 저 인간은 우리와 인격 자체가 달라. 한 세기 전 구식 부품 같다니까.“선임이었다. 남자는 기가 막혔다. 이심전심 의식구조 아니면 그들만의 신호체계 남자는 팀 내 업무를 통제하고 여섯 명 팀원들의 의식과 신호체계를 장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직원들끼리 전연 생각지도 못했던 의식이 모아지고 있었다. “이선 씨! 나하고 나가서 바람을 좀 쏘이며 이야기할까요?”남자가 넌지시 말했다. 속삭이던 팀원들이모두 남자를 바라보았다.“좋습니다.”선임이 벌떡 일어났다. 남자가 앞장서고 선임이 따라 나왔다. 카페 옆 작은 공터였다.“이선 씨! 팀장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듭니까?”남자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예, 팀장님. 당신이 우리에게 해 준 게 뭐가 있습니까? 다른 팀에게 내내 뒤지거나 하고 말이야,”선임이 잘 되었다는 듯이 대들었다. 모두가 자기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그래, 내가 팀장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서툴다 칩시다. 그래도 우리가 열심히 하면 따라잡을 수 있지 않습니까?”“따라잡는다고? 당신 같은 얼치기로는 어림도 없지,”“팀원들 숨통을 조인 건 당신이야, 업무 체계도 모르는 당신 같은 원시인은 우리 일에 방해만 되거든,” 선임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남자의 주먹이 선임에게 날아갔다. 남자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선임이 마른나무 쓰러지듯 땅바닥으로 나가 떨어졌다.“사람을 쳤다 이거지,!” 선임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피, 피가......”남자가 급히 손수건을 꺼내 피를 닦으려 했다.“필요 없거든,”선임이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는 어딘가로 달려갔었다.남자가 사거리 앞에서 깜짝 놀란다. 영산까지 야산과 농장이던 푸른 벌판에 높은 건물이 들어서 있다. 남자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주변을 살펴본다. 건물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다. 남자는 정신이 아득하다. 넓고 푸른 들판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떠나온 고향처럼 한없이 넓은 초원이었다. 염소와 양들이 풀을 뜯고 목동들이 말을 타고 달렸다. 남자는 조금 전에 꾸었던 꿈을 떠올린다. 왜 그런 꿈을 꾸었는지 알 수 없다. 무섭게 소리치던 할아버지도 처음 보았다. 세나도 그토록 초췌한 모습일 줄을 몰랐다. 10여 년 전 겨울이었다. 남자는 눈보라 치는 벌판으로 순록을 방목하고 파오(이동식 천막집)를 지을 자리를 찾으러 나섰다. 세나와 결혼해서 살 자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고향의 젊은이들은 결혼하면 독립하여 혼자 힘으로 살아야 했다. 남자는 방목지를 찾아 서남쪽으로 얼마를 왔는지 몰랐다. 언덕을 넘어서자 해가 지고 있었다. 남자는 야영을 해야 했다. 천막을 치고 메밀 빵과 순록의 젖을 먹고 잠은 순록의 털을 넣은 침낭 속에서 자면 되었다. 남자는 그곳에서 이상한 풍경을 보았다. 지친 눈에 헛것이 보이는가 싶었다. 멀리 보이는 것, 그것은 보고 또 보아도 하늘의 별빛보다 큰 빛들이 수없이 보는 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난생처음 보는 풍경에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낙타를 몰아 길을 재촉했다. 확인하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가까이 보이던 불빛들은 의외로 멀리 있었다. 밤새 벌판을 가로지르고 강을 건너야 했다. 도착한 곳은 말로만 듣던 도시였다. 남자는 도로를 내달리는 자동차들과 촘촘히 늘어선 건물들에 압도당했다. <다음 호에 계속>
뉴스 | 성광일보 | 2024-05-10 14: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