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칼럼 12 가끔은 내가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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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칼럼 12 가끔은 내가 나에게
  • 김정민 기자
  • 승인 2022.09.20 21: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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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영
수필가⋅문학평론가⋅문학 강사⋅이야기가 있는 문학풍경 대표저서; 가위바위보⋅반딧불 반딧불이⋅스타 탄생의 예감⋅영화 쏙쏙 논술 술술⋅이야기가 있는 문학풍경⋅카페 정담
수필가⋅문학평론가⋅문학 강사⋅이야기가 있는 문학풍경 대표저서; 가위바위보⋅반딧불 반딧불이⋅스타 탄생의 예감⋅영화 쏙쏙 논술 술술⋅이야기가 있는 문학풍경⋅카페 정담

나이가 지긋해지면서, 가끔 내가 나에게 묻는 말이 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또 가는 방향은 제대로 알고 있는가.’ 하지만 생각이 깊어질수록 머리는 복잡해지고 물음에 관한 답은 안갯속 그림자처럼 더 뿌옇게 가려질 뿐이다. 이러한 물음은 마음이 편치 않을 때 더 자주 떠오르기 때문에 답답한 심경은 그만큼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불쑥불쑥 찾아드는 생각을 마음 뒤편으로 단번에 물릴 수 있는 능력 또한 내게는 없으니 팔자에 없는 속앓이려니 하고 지낼 수밖에. 다만 영적 분별력을 높여서 세상살이의 수수께끼를 하나하나 풀어가다 보면 인생의 본향과 앞으로 전개될 세계에 대한 앎의 지혜가 쌓여 어느 정도 접근 방식을 찾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해본다.

가수 김태정이 부른 가요 중에 ‘종이배’라는 노래가 있다. 나이가 웬만한 사람들에게는 제법 알려진 노래이다. 부드러운 소리맵시에 따스함이 더해져 듣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노랫말 또한 머릿속에서 잠시 흥얼대다가 잊히는 일반 가요와는 달리, 별난 마음을 향내 나는 정으로 다듬어 부드럽게 여운을 이어가는 멋스러움이 있다. 일상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는 노랫말 중에서도 ‘물’과 ‘길’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우리 인생이 바로 ‘물’과 ‘길’과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종이배의 1절은 “당신이 물이라면, 흘러가는 물이라면, 사모하는 내 마음은 종이배가 되오리다.”로 시작한다. 여기에서 종이배는, 사물에 화자의 감정을 이입하여 자신의 존재를 낮추고 자연에 순응하고자 하는 자세를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자칫 종이로 배를 만들어 물 위에 띄우겠다는 발상은 세사世事에 어두운 사람의 분별없는 열정 정도로 오해받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절대자를 향한 화자의 간절한 소망 의식이 내부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종이배가 되겠다고 자처하는 것은 절대자의 섭리를 깨달은 자의 자신감으로도 볼 수 있다. 절대자를 찬미하며 진리와 함께 갈 수 있는 길을 떠나겠다는 강한 의지가 돋보인다. 마지막 연은 더욱 절절하다. “저 바다로 님과 함께 가오리다.”라고 한다. 수동의 몸짓에서 능동의 행동으로 바뀌어 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화자가 그토록 간절하게 바라는 물의 존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물은 절대자의 가르침, 말씀,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 화자는 겸허의 몸가짐과 관용의 마음가짐으로 만물을 이롭게 하는 물에서 성자의 가르침을 보았으며 그 감정을 절제된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종이배의 2절은 “당신이 길이라면, 내가 가야 할 길이라면, 내 모든 걸 다 버리고 방랑자가 되오리다.”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방랑자이다. 방랑자는 정한 곳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말한다. 하지만 이 노랫말에서 전하고자 하는 방랑의 참뜻은 단순히 떠돌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세속적인 관심사나 범속한 마음 따위에서 벗어나, 깊은 수행을 통해 깨달은 순수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방랑은 세상 온갖 유혹에 현혹됨이 없음을 비유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방랑자가 가는 길은 어떤 길일까. 아마도 그 길은 선지자에 의해 다듬어진 선禪의 길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길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필연적으로 갈 수밖에 없는, 가야만 하는 외통의 길이기도 하다. 길은 애초부터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목적이 분명한 사람이 내디딘 첫발을, 뒤따르는 자가 있고 또 다른 이가 그 뒤를 쫓아가다 보면 자연스레 길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노래에서 전하고자 하는 길은 선택의 순간에 목숨으로 진리를 지켰던 순교자들의 피멍과 그를 이어가고자 하는 성인들의 깨달음으로 다져진 길이며 그 길의 종착지는 절대자와 맞닿아 있을 거라 예단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노랫말 속에는 절대자의 뜻을 알고 그 존재를 믿는 자만이 그 길을 바로 갈 수 있음을 행간의 의미로 좇아갈 수 있는 것이다. 가수는 혼신을 다해 노래 부른다. 세상 욕심 다 버리고 오직 한 분만을 향해 가야 하는 방랑의 믿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절절하게 읊고 있다. 세상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과감하게 따르겠다는, 절대자를 향한 강력한 희망의 의지가 돋보인다. 노래를 반복해서 듣다 보면 절대자를 향한 간절함과 고통의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의 의지적 표현이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분위기에 따라서는 다정다한多情多恨의 인간적인 면도 느끼게 되어 내가 품어야 할, 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된다. 내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방향성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난다. 이는 종이배와 같이 위태하기도, 낯선 길 위에 홀로 남겨진 방랑자 같기도 한 우리네 삶에 대한 무한 그리움과 충만함의 여운이 그윽이 전달되기 때문이지 싶다. 우리는 보통 먼 길을 돌아야만 피안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피안이, 사실은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이 노래는 전하고 있다.

뼛속이 비어 있어서 하늘을 나는 새와 같이 자신을 비움으로써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자유를 찾겠다는 간절한 소망의 노래 한 소절이 여전히 매력적인 호소로 마음 공간을 가득 채운다.

“당신이 길이라면 내가 가야할 길이라면

내 모든 걸 다 버리고 방랑자가 되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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